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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Nov 14. 2022

한라산 감각

제주의 날 2

 나는 왜 한라산에 오르겠다고 생각했을까? 걸어 다니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등산을 즐기는 편은 아닌데 말이다. 산 정상을 찍어 본 경험이라면 초등학생 때 걸스카웃 활동으로 오대산, 대학원 OT 때 한라산, 회사 워크숍 때 인왕산, 딱 그 정도다. 그런데 굳이 한 번 올랐던 한라산을 또 오르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원 OT 때 이후로 10년 가까이 지난, 그 사이 월급쟁이로 살다 4개월 전에 백수가 된 시점에 말이다.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볼까? 가보지 뭐.’ 대단치 않게 결정된 등산이었지만 전날 밤 샤워를 하다가 ‘날씨 안 좋아져서 입산 금지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슬몃 떠오른 것을 보면 조금 두렵기도 했던 것 같다. 실족이나 탈진을 해서 헬기 구조대의 도움을 받게 되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그 송구스러움을 못 견딜 것 같다. 무엇보다 성취감 느낄 일이 거의 없는 백수가 괜한 실패감을 느끼게 될까 걱정됐다.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도전은 도전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지금 글로 적으려니 부끄럽지만,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에 10년 만에 다시 오르면 아직 이 몸뚱아리가 제법 쓸만하다는 것을 증명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비장함은 새벽 어스름과 함께 사라졌다. 들고 있던 플래시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질 무렵, 시각부터 시작해 한라산이 감각을 깨웠다. 나는 무장해제됐다. 그러니까…


 이날은 반짝 추위로 한라산에 올해 첫 상고대가 핀 날이었다. 단풍과 상고대의 조화는 이전까지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가을과 겨울이 함께 있는 한라산은 내가 꿈에서도 경험한 적 없는 시각적 자극을 가져다줬다. 아침 안개가 걷히며 드러나는 다채롭고 풍성한 색색의 봉우리들.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풍광이 지극히 현실이라는 것에 감복했다.


 내내 청각을 자극한 것은 조릿대 잎이 바람에 날려 서로 부딪히는 소리였다. 등산로를 제외하면 나무 없는 땅에는 모두 조릿대가 빼곡했다. 얇은 조릿대 잎은 잔잔한 바람에도 파르르 떨며 소리를 냈다. 사라락, 타라락. 해가 중천에 뜰 즘에는 서리가 녹아 조릿대 잎에 떨어져 내는 소리가, 이따금씩 큰 바람이 불면 높은 나무의 잎들이 진동하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등산객을 무서워하지 않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날갯짓 소리에 놀라고, 최근에 보수한 듯한 등산로에서 신선한 흙냄새를 맡았다. 등산로 계단을 오르며 점점 숨이 가빠지면 찬 공기가 콧구멍과 입안을 지나 비강과 기도, 폐포에까지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뒤돌아 서면 발아래로 폭신하게 펼쳐진 숲에 구름 그림자가 지나간다. 마침내 도착한 백록담에서는 강한 바람에 눈을 뜨기도 힘든 와중에 안구 뒤쪽까지 서늘함을 느꼈다. 백록담 주위를 감싼 하얀 구름 너머로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가 만나는 직선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도전이니, 증명이니, 그런 생각들은 의미를 잃었다. 한라산은 그저 그날 그렇게 있음으로 해서 나를 감각하게 했다. 그것은 대단한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대단치 않아야 했다. 모든 감각과 감각 기능은 내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며 순전히 행운의 누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불운으로 인해 감각의 일부 또는 전체를 잃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겸손해졌다. 한라산을 내려오는 동안 다리 근육은 떨리고 발목 관절은 비명을 지르는 듯했지만, 그것마저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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