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벌판에 홀로 서게 되었을 때
대한민국 직장인의 평균 퇴직연령이 50세라고 한다. 실제로 나이 오십이 넘어가면서 내 또래의 주변 지인들이 하나 둘 회사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왔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중에는 간혹 나에게 새로운 일자리 소개를 부탁하는 이들도 있고, 부동산 중개업이나 소규모 요식업에 뛰어들었다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 그런 상황이 닥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리석었다. 그래서 더욱 당황했다. 가까운 지인들은 나에게 “너는 잘 헤쳐나갈 거야. 나는 믿어. 별로 걱정 안 해”라고들 했다. ‘걱정되지 않는다’는 말로 나를 위로해 준 셈이지만, 그 말은 오히려 나를 더 걱정하게 만들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지금껏 여러 번 위기가 있었지만 항상 잘 헤쳐왔잖아. 나도 나를 한번 믿어보자.’
‘차라리 이번 기회에 (새로운 자리를 찾을 때까지) 그동안 바빠서 마음껏 할 수 없었던 일들이나 실컷 해보자. 독서, 운동, 여행, 글쓰기 등등.‘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다. 책을 펼쳐서 몇 장 넘기거나, 운동기구 위에 올라가서 좀 걷다 보면 이내 묵직한 쇳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여행이며 글쓰기는 엄두도 내기 힘들었다.
10년 전에 잘 다니던 직장에서 갑작스럽게 나오게 되었을 때,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공황장애 증세가 왔었다. 그때는 아이들도 더 어렸었고 외국에서 살고 있었던지라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가 무척이나 막막했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때보다는 상황이 좀 더 낫잖아?'
'사회 초년생도 아니고 겁쟁이처럼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 거야?'
나이가 마흔만 넘어도 ‘불혹(不惑)’이라며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는 나이 오십이 넘고 나름 산전수전도 여러 번 겪어봤으면서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것은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한 지인이 내게 해준 말이 나 자신을 조금은 더 너그럽게 바라보게 해 주었다.
“어릴 때는 오히려 두려움이 더 적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회사를 다니다가 불편하거나 힘들면 쉽게 그만둘 수도 있었거든요.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데 대한 부담도 적었고요.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수록 두려움도 함께 커지는 것 같아요. 아마 짊어진 짐의 무게가 더 커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어려움에 더 의연하게 대처해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아직 지탱해야 하는 책임감의 무게가 전혀 줄지 않았고 반면에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은 점점 좁아져가니 불안감이 오히려 더 커지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걱정했던 것보다 빨리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다. 운이 좋았고 참 다행이다. 한창 커가는 아이들과 갈수록 보살필 일이 많아지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직도 한참은 더 현역으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
구직전선에 나서게 될 때마다 매번 스트레스가 있었다. 부디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하지만 몇 번 글로도 쓴 적이 있듯이 막상 일 년 뒤에, 혹은 다음 달, 아니 당장 내일도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일이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을 겪는 분들에게, 그리고 미래의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에 터널을 빠져나오며 생각한 것들을 기록으로 정리해 본다.
<갑자기 벌판에 홀로 서게 되었을 때 도움이 되는 것들>
1. 상황을 분석하고 객관화하기
앞으로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상황들을 모두 나열해 본다. 각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이나 행동들을 적어본다. 그리고 각각의 선택지에 대한 장단점들도 생각해 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눈앞에 펼쳐놓고 나면 나의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무엇이며 그때 취해야 하는 조치들은 무엇인지까지 생각해 두는 것은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된다.
2. 사람들을 만나고 기회를 모색하기
사람들을 두루두루 만나고 겸손하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 회사를 나오거나 그만두게 되면서 사람 만나기를 힘들어하거나 꺼리는 이들을 간혹 본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특히 번듯한 직장에서 잘 나가다가 갑자기 상황이 힘들어지면 더더욱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활동반경을 넓히고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나야 한다. 가만히 집에 앉아서 인터넷만 쳐다보고 있는다고 돌파구가 생기지는 않는다.
3. 남의 생각에 휘둘리지 않기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바뀌는 순간 급격하게 자신감이 떨어질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직장이나 직책을 본인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 겉옷이 벗겨졌을 때 과연 스스로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혼란스럽고 회의감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의 가치에 대한 평가를 남들의 시선이나 외부 요인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우리 주위에는 누군가가 약해졌을 때 늑대처럼 달려들어 사람을 깎아내리려는 이들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남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이나 그들의 평가에만 나를 맡겨두지 말고 한 개인으로서의 ‘나’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이 필요하다.
4. 자신감 끌어모으기
자신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하지만 없는 자신감을 억지로라도 끌어모아야 한다. 자신감이 없어지면 이는 어떻게든 표시가 나기 마련이다. 초조해지고 여유가 없어 보이고 불안해 보이고 약해 보인다. 행여나 자신의 눈이 광채를 잃고 겁먹은 강아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감 없어 보이는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다.
5. 계획을 세우되 유연하게 대응하기
막연하게 잘될 것이라는 낙관론은 금물이다. 구체적인 계획과 행동이 필요하다. 내 경우에는 plan A, plan B, planC, plan D를 세웠고, 처음 계획들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거나 상황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계획을 수정하거나 추가했다.
6. 탈출구를 만들고 정신 붙들어 매기
아무리 위에 열거한 대로 다 한다고 해도 불확실성 속에서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좋은 일조차도 무르익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고, 또 대개 일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마음의 동요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나는 마음이 불안감의 소용돌이에 빠지려고 할 때면 하루종일 넷플릭스의 영화나 드라마를 정주행 한 적도 있다. 일종의 현실도피일 수도 있고 그리 바람직한 방법은 아닐지도 모르나 적어도 무너지지 않도록 나를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평소에 다양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쌓아두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많은 분들이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도와주려고 애써주셨다. 직접적인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런 분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내게 실질적인 힘이 되는 도움의 손길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올지 모른다. 특히 가깝고 친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소위 '약한 연결고리(weak ties)'를 통해 올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이번에도 그러했고 예전에도 그랬었다. 그러니 매일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친절과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언제 나에게 귀한 인연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끝으로 가장 감사하고 도움이 되었던 사람은 바로 곁에 있는 아내였다. 아마 속으로는 나보다 더 불안했을 것임에도 내 앞에서는 한 번도 불안한 기색을 보이거나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주었다.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다시 의욕이 솟구친다.
(2024년 2월)
다시 곱씹어 본 예전에 쓴 글들
• 예측 불확실성에 대하여
https://brunch.co.kr/@taejin-ham/21
• 계획과 유연성에 대하여
https://brunch.co.kr/@taejin-ham/12
• 약한 고리의 힘에 대하여
https://brunch.co.kr/@taejin-ham/36
• 자신감의 중요성에 대하여
https://brunch.co.kr/@taejin-ham/9
• 자기 평가에 대하여
https://brunch.co.kr/@taejin-ham/63
• 자존감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