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엄마를 보러 갔다. 병실에 들어서자 오전의 햇살이 실내를 환하게 비추고 있고, 늘 고요하기만 하던 병실에는 왠지 약간의 부산함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침대에 누운 엄마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병상 옆에는 못 보던 수액이 매달려 있고, 튜브가 얇은 담요 아래로 앙상하게 마른 엄마의 발에 연결되어 있었다.
"며칠째 계속 식사를 너무 못 하셔서 수액을 맞혀드리고 있어요. 저희가 잘 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간호사 선생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엄마가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걸 보니 차마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냥 깨어나실 때까지 조용히 곁에 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옆 병상 할머니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씀하셨다.
"그렇게 멀뚱멀뚱 앉아만 있지 말고, 깨워요. 보고 싶어 하셨는데."
하긴 엄마도 종종 이렇게 말했었다.
"잠이야 하루 종일 자는 거고, 네가 오면 한시라도 더 보고 싶다."
나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조용히 불렀다.
"엄마~"
엄마는 잠결인 듯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시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왔나?"
“네, 아들 왔지요.”
그러자 엄마가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좀 주시는 듯하다.
"와~ 우리 엄마, 손 힘이 세네?"
엄마가 옅은 미소를 띠신다
“힘도 세졌고, 또 귀도 좋아지셨나봐. 내 말도 예전보다 훨씬 더 잘 알아들으시네?”
나는 엄마 귓가에 바짝 붙어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그게 다가 아녜요. 머리카락 숱도 많아졌어요, 하하”
나의 말에 엄마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다시 젊어지는 모양이라."
병실에는 엄마를 포함해서 여섯 명의 할머니들이 계시고, 두 명의 간병인이 있다. 엄마가 처음 입원했을 때는 중국 동포인 자매 두 분이 함께 일했었다. 두 사람은 나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엄마의 상태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친절하게 설명해 줬었다.
"우리 할머니, 아드님 오시면 그렇게 좋아하셔."
나는 좋은 분들이 엄마를 돌봐 주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놓였었다. 하루 종일 병실에서 할머니들을 돌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인지라, 나는 병실에 들를 때마다 간병인 두 분의 간식거리도 조금씩 함께 챙겨드리곤 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처음 보는 다른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병실의 간병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혹시, 여기 전에 계시던 분들은 어디 가셨나요?"
그러자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만뒀어요. 다시 안 옵니다."
서운했다.
그날 이후 병실을 지키는 건 중년의 간병인 아주머니와 말수가 적은 아저씨였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부부였다. 이분들은 이전 간병인들에 비해 무뚝뚝하고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엄마를 위해 가져간 간식에는 "배변에 도움 안 돼요."라며 손사래를 쳤고, 만들어 간 팥죽을 나중에 좀 드실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더니 "(전자레인지에 사용할) 동전 주세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서, 두 사람의 일하는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지켜보니 그분들은 말수가 많지 않을 뿐, 묵묵하지만 성실하게 환자들을 돌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설날인데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내 말에 간병인은 슬쩍 미소 지었다.
"딸이 하나 있어요. 한국에 살아요."
"그러시군요. 많이 보고 싶으시겠어요."
그녀는 짧게 웃었다.
엄마 옆 침대에 누워계신 할머니는 내가 엄마를 보러 갈 때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늘 뚫어져라 쳐다보신다. 크고 동그란 눈이 꼭 ‘날 좀 보라’고 부르는 듯하다. 한 번씩 눈이 마주쳐서 목례를 드리면 꼭 한 마디씩 하신다.
처음에는 주로 불평처럼 들리는 말씀들을 늘어놓으셨다.
"엄마가 밤새 잠을 안 자고 계속 사람을 불러서 다들 힘들었어."
"간호사가 주사 놓으려 하면 막 소리를 지르셔."
"운동치료사가 휠체어 태워 가려하면 '어디 가는 거냐'며 계속 물어."
그럴 때면 나는 그저 "아휴, 죄송합니다"라고만 했었다.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계속 불평을 듣자니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가 단순히 불평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하루를 나에게 알려주려 하셨던 것이다.
"엄마가 밥을 너무 안 드셔."
"어제는 누가 엄마한테 왔다 갔어."
"엄마가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에 가겠다고 해."
할머니는 아마도 호기심 많고 수다스러운 성격이셨을 것 같다. 엄마의 귀가 어둡지 않고, 조금만 더 정신이 또렸하셨더라면, 두 분이 나름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잠에서 깨었어도 여전히 눈을 거의 감고 계셨다. 하지만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귓가에 들려드리는 동안, 잡은 손에 계속 힘을 조금씩 주며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셨다. 문득, 딸아이가 어릴 때 내 손가락을 꽉 붙잡고 다니던 모습이 중첩되며 떠올랐다.
한 시간 남짓 지나고 나자, 엄마가 내 손을 스르르 놓으며 들릴락 말락 하게 말했다.
"바쁜데 와줘서 고맙다. 이제 가봐라."
나는 엄마에게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고 병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엄마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2025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