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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태진 Nov 08. 2019

'나이 드는 것’은 어렵다

반면에 ‘나이 먹는 건’ 쉽다

  출판단지에는 이렇다 할 단풍나무가 없다. 대로변에 늘어선 나무는 벚꽃나무라 가을이면 황량한 가지만 앙상하게 남는다. 하지만 단지 안쪽 작은 골목길 곳곳으로 단풍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어 아쉽게나마 단풍을 볼 수 있다. 물론 출판단지를 내려다보는 심학산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가득하다. 주위에 늘어선 논에도 노랗게 물든 벼가 건강한 자태를 뽐내니 가을은 곳곳에서 목격된다. 

  완연한 가을답게 하늘은 높고 고요하다. 


출판단지 어딘가에서

  

  가을, 책 읽기 좋은 계절 출판단지는 더 열심히 책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의 계절은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책이 안 팔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단풍 구경을 가야 할 시기인데 책을 읽을 리 없다. 그만큼 야외활동을 하기 좋은 요즘이라는 것이다. 붉은 단풍이 늘 반갑지는 않다. 


  법륜 스님이 한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잘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다.’ 건강하게 나이 드는 것의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야말로 청춘의 젊음보다, 외형적인 아름다움보다 더 가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단풍은 붉게 물들기 위해 온 힘을 불사른다. 붉게 물들어 타오르고 나면 곧 낙엽이 될 운명이지만 그래도 기어이 붉게 물들고 만다. 낙엽이 되지 않겠다고 세월을 거스르며 푸르른 잎사귀로 버티는 잎사귀는 없다. 흐르는 시간에 순응하여 단풍이 되고 낙엽이 된다. 

  붉은 단풍을 보며, 세월의 흐름에 거스르려 버둥거리는 우스운 사람은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 거스르기는커녕 뒤쳐지지나 말아야 하는데...


  나이 든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더구나 봄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이라니 여간 아름다워서는 안 될 것 같다. 봄꽃은 그냥 그 존재 자체로 빛이 나는데. 과연 찬란한 봄꽃보다 아름다워지는 게 가능한 소리인가? 법륜 스님이 거짓말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지만 그만큼 ‘나이 드는 것’은 어렵다는 뜻 이리라. 반면에 ‘나이 먹는 건’ 쉽다. 가만있어도, 먹기 싫어도 떠먹여 주는 게 나이다. 


  요즘은 술자리가 더 그립다. 술이야 언제든 마실 수 있지만 예전처럼 신나는 술자리를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나이가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쉽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맹목적으로 술을 마시던 시절의 친구들은 이제 다들 바쁘다.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었다. 아직 총각인 친구는 사장님이 되어 돈 버느라 바쁘다. 다들 막중한 책임감에 허우적거리느라 술잔을 기울일 시간이 없다. 

  혼자 술잔을 채우고 기울이며 생각한다. 새로운 추억을 만들지 못한 채, 옛 추억만 되새기니 왠지 쓸쓸한 것 같다고. 몽롱하게 취해갈 때쯤, 역시 몽롱하게 취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이미 어디선가 술잔을 기울이고 기울이고 기울인 후였다. 


  "닌 뭐한다고 서울에 있노. 부산으로 온나." 

  "서울 아이다. 파주다." 

  "그기가 그기지." 

  "그기가 그기가 아이다. 겁나 멀다. 서울이랑 파주랑. 니가 온나. 술마시러." 

  "뭐 해 먹고살라고 오라노." 

  "그냥 온나." 

  "미친놈."


  그래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가을은 놀아야 제 맛이다. 책이야 언제든 읽을 수 있지만 단풍 구경은 일 년에 고작 며칠이니까. 놀기 좋은 이 가을에 가만히 앉아 책만 보는 건 자연에 대한 무례다. 아무 산이나 하나 붙잡고 친구들과 오르다 중턱쯤 퍼질러 앉아 술잔을 기울이면 되겠다. 가을은 역시, 아니 가을도 역시 술이 어울리는 계절이다. 



* 상단 이미지는 영화 <라스트 미션>의 한 장면이다. 영화의 주인공 할아버지는 여유로움이 넘친다. 마약운반 일도 태연스럽게 잘도 해낸다. 나도 모르게 그의 범죄를 응원하게 될 정도로... 아무튼, 잘 늙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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