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속이기 in Sweden 외전(4)
* 아내의 43번째 생일날에
때로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짜증이 나는 경우가 있다. 40대 중반이 넘어서면 더 그런 일이 많은 거 같다. 호르몬이 변하고 어쩌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었는데, 실제 나도 그 나이가 되니 설명은 할 수 없는데 화가 나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다. 직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참을 뿐, 특히 집에서는 더 그런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이유 없는 투정이라고 볼 수는 없고, 쌓아두면 말할 수 없는 분노에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참는 것이 꼭 답이 아닌 경우도 있다. 그땐 과감하게 '하루 가출'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배우자든 자식이 든 간에 자신이 화나는 점을 표출하고, 나 스스로가 소중한 사람이란 걸 자신에게도 그리고 가족에게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하루 가출을 할 필요가 있다.
한 5년 전인가? 한국에서의 그날은 모두 일요일이라 늦게까지 자고 있었다.
나 혼자 깨서 소파에 앉아 있는데 아내가 부스스 일어나 말한다.
"오늘 뭔 날이라도 되나? 안 자고 모하노?"
에이... 옷 갈아입고 그냥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일어난 아들이,
"아빠, 오늘 뭐 잊은 거 없어?"
"뭔데?"
"나랑 아침에 농구한댔잖아."
일말의 기대가 사라져 그냥 나와버렸다.
왜 저러지? 하는 둘의 눈빛을 뒤로하고.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집을 박차고 나오는 순간, 아내의 카톡이 빗발친다. 미안하니 빨리 들어오라고. 엄마의 사주를 받은 아들놈도 '아빠 보고 싶어요'로 갖은 유혹을 한다(나쁜 놈, 벌써 지 엄마한테 넘어가서...).
요즘 만연한 가정적이고 착한 아빠 콤플렉스에 빠진 사회의 영향을 받았는지, 주섬주섬 차려입고 나와 많은 갈등이 인다. 젠장 사실 뭐 목욕탕이나 도서관 등 몇 개 빼고는 특별히 갈 데도 없으면서, 주말에 좋은 아빠가 되어 같이 놀아주고 싶었는데... 아내와 아들과 텔레비전에 나오듯이 살갑게 대해주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하지만, 이때가 위기다.
결코 굴복하면 안 된다.
에구 그래... 하고 발길을 집으로 돌리는 것은 대한독립만세라고 외치려고 3.1 운동에 나왔는데 나중에 뭐 잘못되면 어쩌지 하고 다시 집으로 기어들어가는 꼴과 같다. 전화를 꺼버리고 굿굿하게 가던 길을 간다. 마땅히 정해진데도 없지만.
사실 어제 토요일에 집에 있으면서 느낀 건... 나 없어도 아들이나 집사람이나 자신들의 친구들과 잘 논다는 것이다. 아들놈은 미술학원 갔다가 아예 친구들하고 피자 사달라고 엄마를 불러대고 이후 레고마을에 가서 블록 가지고 하루종일 놀고, 애엄마는 그런 아들놈 피자 사주러 동네 아줌마랑 몰려가면서 밥은 알아서 챙겨 먹으라고 한다. 그 사이 나는 동네 산을 두 번이나 올라갔다 왔다. 아... 은퇴하고나 가는 등산인줄 알았는데...
혼자 있다 보면 이래저래 미뤄뒀던 나 자신에 대한 일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부든, 일기든, 건강이든, 친구든, 인간관계든... 일상에 치여 보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한 많은 것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치 공부는 계속하고 시험은 계속 치르는데 정작 복습하고 정리하지 않으면 남지 않는 것처럼...
조금 더 발전하다 보면, 굳이 누군가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 이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나 고민을 스스로 해결하고 고민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팟캐스트를 듣다 보면, 아... 나만 이런 것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아... 이 사람은 이래서 나보다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구나... 등등... 요즘 좋은 내용들이 워낙 많고, 간혹 신문의 주말 특집 섹션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그때는 신문에 연재되는 은퇴 이야기가 참 재밌게 보았다- 등도 혼자만의 시간을 참 풍요롭게 한다.
전에는 주저하던 나주곰탕집에 들어가 특자로 시켜본다. 다 필요 없다. 나한테도 좋은 거 먹여보자는 식으로. 그리고 혼밥에 대한 실험도 해보게 된다. 난 오히려 좋던데? 밥 먹는 시간만큼은 맛있는 것을 사 먹어주면서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아밀라아제와 음식이 섞이는 동안의 음미를 할 수 있는, 내가 살아있다는 좋은 느낌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친구에게 연락할까 하다가 이렇게 된 거 좀 더 해보자... 하며 길거리도 걸어본다. 아... 이런데가 있었구나... 나중에 이런데 살면 좋겠다.. 또 이건 이렇게 바뀌었네... 세상에 저렇게 못생긴 얼굴을 달고도 즐겁게 사는 사람... 등등.... 의외로 재밌는 것 많다... 그리고 시간 때우기의 성지인 동네 목욕탕도 방문해 아재들의 삶을 미리 탐방하기도 하고, 그 속에 생활의 재미도 느껴본다.
한증탕에 있는데 충청도 아재 둘이서 얘기한다.
ㄱ : 야 병철이가 낼 서울가 유 라고 문자를 보냈는디, 문자가 쪼개져서 유 자가 한 시간 뒤에 왔댜...
ㄴ : 거 가끔 그렇게 쪼개져서 올 때가 있어...
ㄱ : 그런 놈들 때메 고향 사람덜이 느리다는 오해를 받는 겨...
.......(순간 정적....) 한 3분 뒤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자 둘이 나갔다.
잠시 후 나도 나가 온탕에 들어가니 아까 두 아저씨가 있었다. (흐르는 정적....)
ㄴ : 근데 임마 마지막 글자가 한 시간에 오든 하루 있다 오든 뭔 문제가 생기는 겨?
ㄱ : 참 대답도 빨리 허네... (다시 정적... ㅋㅋㅋ)
목욕 다 마치고 나오니 두 아저씨 열심히 물기 다 닦고 드라이로 물기도 다 말리고 있었다.
나도 다 거울보고 드라이를 하는데 ㄴ 아저씨가 뭘 계속 찾는 거 같았다.
ㄱ : 아까 너 한증탕에서 열쇠 두고 나오던디....
ㄴ : 이런 *** ~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말어 임마...
한국은 참 시간 때울 데가 많다. 간혹 인간 코미디들도 있고... 가출도 해보니 괜찮은데? 하는 자신감도 든다.
하지만, 나의 가출은 오후 3시가 돼서 끝나버렸다. 친정에 뭔 일이 생겨 급히 내려가야 한다는 아내의 카톡에 그럼 애는 어떻게 할 건지 걱정되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애가 좋아할 떡볶이, 순대, 빵을 사가지고... 물론 집사람의 카톡이 거짓말이라는 건 짐작한다. 하지만, 이런 것도 여러 번 해봐야 늘지, 익숙지 않으면 그다지 오래 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하루 가출은 눈 딱 감고 시도해야 한다.
해봐야 하루를 넘지 못하는 것이 태반이기 때문에...
집에 돌아오면 역시나 내가 없이도 아내와 아들은 잘 놀고 있다. 그리고 늦은 생일 축하를 받는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외로움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점점 친구들과 지인들로부터의 연락이 소원해지고 멀어지는 것에 서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문을 넣어야 한다. 그 빈자리를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으로 채워야 한다.
근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까.
계속 운동해야 근육이 생기듯, 우리는 외로움에 익숙해지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갖고 음미해야 한다.
커피 한 잔을 친구로 만들어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젊은 날에 들었던 유행가가 내 주변을 감싸도록 하며,
스스로의 생각과 끊임없이 교감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나이 들수록 인간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말 그대로 '나이 들수록', 그리고 여자보다 인간관계를 맺는데 서툰 남자들이 40에서 50으로 넘어가며 그렇게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게 쉬울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럼 그 인간관계의 대상에 '자기 자신'을 넣는 것이 어떨까.
예전에 일기예보라는 그룹의 '인형의 꿈'이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한 걸음 뒤에 항상 내가 있었는데
그대 영원히 내 모습 볼 수 없나요
나를 바라보며 내게 손짓하면..
언제나 사랑할 텐데....
여기서의 노래하는 그 '인형'은 그동안 내가 등한시했던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한 걸음 뒤에 서있던 '나'를 위해 맛있는 것도 사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또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게 평생 나의 인간관계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는지.
이 또한 가출을 통해 얻은 소득이다.
남자들이여, 가출을 하자. 잠깐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