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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Dec 25. 2020

마누라 속이기 season 1-2

높이뛰기 세계 신기록 표지판이 전해주는 메시지-뛰어 넘어!

아내 몰래 스웨덴 중부를 관통하는 '인란드바난'을 따라가는 여행을 떠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별로 오래 가진 않았다. 생각하고 물에 뛰어든다기보다는 뛰어들고 나서 생각하고, 후회를 하더라도 해보고 후회하자는 결단 아닌 결단을 내렸다. 일단 떠나보자고 맘을 먹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직원에게 뜻을 같이할 것을 물었는데 흔쾌히 같이 가겠다고 하여 더 용기가 났다. 


야, 이게 얼마 만에 혼자 가는 거야. 설렌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려나간 자국이 선명하다

결혼 이후 여행은 일정, 식당, 숙박 예약은 물론 운전도 도맡아야 했고 계획을 세우면 도착 시간까지 재곤 했었는데, 이번은 일단 떠나고 나서 나머지는 생각하기로 했다. 동행하는 직원도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운전 교대는 물론 먹을 것은 본인이 다 준비하겠다고 했고, 나는 내 차와 숙식비와 중간중간 밥값이나 부담하기로 했다. 


나이 먹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했는데, 지갑을 열어 젊은 시절 골치 아픈 준비를 덜어낼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니던가. 이후 밤마다 아내와 아들이 잠이 들면 독립투사가 거사를 준비하듯 몰래 일정도 짜고 혼자 킥킥대며 좋아했다. 몰래 주말에 차 트렁크에다 양말과 속옷도 좀 넣어두고.



드디어 아내와 아들이 떠나는 날이 왔다. 아내는 일주일간 잘 지내야 하는데 어떡하냐고 계속 걱정을 했다. 집에서 심심할 텐데 외로워도 내 생각하면서 금방 올 테니까 잘 지내고... 식사는 거르지 말고 냉장고에 반찬 해놓은 거 챙겨 먹고 세탁기도 알려준 대로 하고... 등등...


"뭐, 어쩔 수 없지... 나야 니가 애 하고 재밌게 놀다 오면 좋지 뭐."



아쉬움을 뒤로하고 모임 장소에서 내리는 아내와 아들에게 슬픈(?) 표정 후 안녕 인사를 하고 차를 출발하는데, 걱정스러워하는 아내의 얼굴이 오버랩이 되면서 갑자기 감정이 솟구치고 말았다.


"이 야호!" ^0^~

나는 미친 듯이 차 안에서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차는 스톡홀름 시내를 벗어났다. 예상대로 푸르른 자연이 펼쳐졌고, 스웨덴의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동행하는 직원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 이런 좋은 자연을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왔으면 좋았겠다는 죄책감도 들었다(물론 실제 데리고 다니다 보면 별 관심들이 없지만...).


또, 아내가 저녁에 전화해서 어디냐고 확인할 텐데 괜히 나왔나...라는 생각과 그냥 오늘 저녁까지 달리는 대로 가고 어느 정도 가서 돌아올까, 그냥 집에서 편하게 유튜브나 보면서 맥주 한잔 하고 주말에다 휴가까지 냈으니 늦잠을 자도 괜찮은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머리 위에 하얀 천사와 검은 악마가 쌍으로 날고 있었다. 갈까 말까를 다시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우리 Dalarna(스톡홀름에서 2시간 정도 거리)까지만 갔다가 돌아오자."


집에서 기르던 개는 목줄을 풀어놔도 멀리 못 도망간다더니, 혼자 떠나는 것이 맘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다. 일정으로 짠 지역들은 여행 책자에도 안 나오는 그냥 Inlandsbanan에 따라 찍어놓은 것이고, 거기에 뭐 대단한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다음을 기약하고, 지나가는 길에 간단히 점심이나 먹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들른 곳은 Dalarna의 관문인 Avesta였는데 큰 버거킹 가게가 있어 간단히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주차장에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목각 인형인 달라호스(Dala horse) 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스웨덴에서 가장 큰 달라호스로(높이 13m, 길이 12.8m), 옆에는 스웨덴 출신의 높이뛰기 세계기록 보유자 아르만드 두플란티스가 기록한 높이(6.18m)를 표시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내 키가 작은 게 아니라, 이 동상이 큰 겁니다.

  

지나가다 햄버거 가게에 들렀는데, 거기에 스웨덴을 상징하는 달라호스 중에 제일 큰 놈을 만난 것은 참 우연치고는 기분 좋은 우연이었다. 이래서 일단 나와봐야 뭘 봐도 보는 것이지. 배를 채우고 나서, 일단 계획한 일정대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 핸들을 돌리기로 했다. 거리나 시간상 이 근처에서 중심지이기도 하고 유명하다는 Mora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지나 Siljan 호수가 펼쳐지기 시작했는데, '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만한 풍경이었다. 이 호수는 뭐지 하고 찾아보니 "스웨덴에서 이 호수를 보지 않고 떠나는 것은 결혼식에서 신부를 보지 않고 가는 것과 같다"라는 표현도 있었다.  


마치 바다와 같은 널따란 호수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숲들은 '이야~'라는 말을 연발하게 했다. 그냥 보기만 해서는 너무 아까운 것 같았고, 어차피 오늘 돌아보고 갈 건데 발이라도 담가 보자라는 생각에 차를 세울만한 곳을 찾다가 Rättvik이라는 곳에 내렸다.   

우측 하단 69번과 70번 국도를 따라 상단으로 올라가면서 Siljan 호수 주변  Rättvik-Mora-Orsa가 차례로 나온다.


조그만 도심지에 있는 기차역 앞에 차를 대고 역을 가로질러 가니 모래사장이 길게 나타났다. 원래 호숫가에 모래사장이 있던 건가? 하고 생각하고 지나다 보니 내 앞에 있는 건 호수가 아니라 바다라고 착각할 만큼 넓디넓은 풍경이 펼쳐졌다. 깨끗한 물-파란 하늘-푸르른 숲이 삼위일체가 되어, 호수 안 100여 미터까지 펼쳐진 데크를 따라 걷다 보니 청명하다고 생각했던 스톡홀름의 자연은 자연이 아닌 것이었다. 숲-호수는 스웨덴의 영혼이라는 말이 정말 절실히 와닿았다.



여기서 뜬금없이 업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이...


지난해 11월 중국발 미세먼지에 대한 심각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을 무렵, 스웨덴이 주도하여 국가 간 국경을 초월한 대기오염 문제의 해결하고자 체결한 세계 최초의 국제협약인 '장거리 월경성 대기오염 협약(CLRTAP)' 관련 정책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


이 협약의 추진에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참여 계기는 영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심각한 대기 오염으로 생성된 산성비가 바람을 따라 북유럽까지 이동하여 이 지역의 숲과 호수를 오염시켰는데, 호수나 숲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매우 중요하고도 특별한 문화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이들은 영혼이 숲에서 태어나 죽으면 숲으로 돌아간다고 생각)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었다. 당시 그게 무슨 뜻인지 가물가물 했는데, Siljan 호수는 머리로만으로 이해하기 부족했던 나의 한계를 현장에서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하늘-구름-숲-물-데크가 나하고 어우러져 있다.


호수에 앉아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까 발걸음을 돌렸었다면....? 어쩌면 아까 달라호스 옆의 높이뛰기 세계 신기록 표지판은 그만큼 나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고 뛰어넘으라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억지로 이유를 대려니 허허.. 낯 뜨거워라). 늘 쳇바퀴 돌면서, 조금 나왔는데 또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해?  아직도...



"그냥, 조금 더 가보자. 아예 오늘 Orsa에서 자고. 더 좀 올라가 보자고."


동행한 직원도 좋다고 해서 우리는 다시 북으로 계속 나갔다. 호수는 계속 펼쳐지고 풍경은 더 좋아지는 것 같았다. 약간 어두워지는 상황에서, 아내가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전화가 왔다. 집이 아닌 거 같다고 하길래, 답답해서 드라이브 나왔다고 얼버무렸다. 


진짜냐고 꼬치꼬치 따질 줄 알았던 아내는 의외로 운전 조심해서 들어가라고 하고 끊었다. 나는 북유럽에서 관습법 같이 내려오는 '얀테의 법칙' 10가지 중 9번 법칙이 떠올랐다.



"아무도 당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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