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출판이고, 출판은 혼자 글을 쓰는 것과 달리 독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보니 홍보가 당연히 따라오게 된다. 물론 출판사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가지고 여러 매체를 통해 홍보를 하겠지만, SNS는 요즘 시대 필수적인 홍보 수단일 뿐만 아니라 독자들과 저자와의 만남이 많아지다 보니 더욱 활용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나도 출판사 측으로부터 SNS를 통해 책에 대한 홍보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들었다.
당연히 내 책에 대한 홍보이고 출판사와 같이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니 적극 협조해야 할 일이지만 나로서는 좀 당황스러운 측면이 있었다. 물론 BAND 같은 모임은 소식을 받는 입장이다 보니 근근이 체크는 했었지만, facebook 같은 SNS는 적극적으로 안 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동기 모임에서 한 친구의 축하 글(2022.12월)
facebook 같은 SNS를 안 하기 시작한 것은, 나의 생각과 행동들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개됨에 따른 피로감 때문이었다. 물론 젊은 시절에는 글을 올리고 친구들의 댓글을 즐기며 스스로를 과시하는데 도취되었던 적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점점 나이가드니 그런 것에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특히 내 생활을 별로 공개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불쑥 들어왔다가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SNS에 웃기고 재밌는 글이나 사진을 달면 많은 댓글과 관심이 따라오지만 정말 내가 맘속에 있는 언급을 하거나 마음이 우울할 때 쓴 글에는 별로 댓글이 없거나 심지어 아무런 답이 안 달릴 때도 있다 보니, 더 이상 남을 위해 광대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서 그랬다. '트루먼쇼'의 트루먼처럼 되긴 싫었다.
그러고 몇 년이 흘렀다. 40대 후반이 되면 직장 생활에서는 가장 바쁠 때 중 하나이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SNS에 글을 쓸 일도 없었다. 가끔 오는 친구들의 소식 정도? 그리고 브런치스토리도 큰 범주에 보면 SNS로 들어갈 수 있겠어서 필명도 이름을 밝히지 않고 Tangpi라는 가명을 썼다.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에서 글을 쓰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재미도 알게 되었다. 이런 점이 브런치스토리가 좋은 점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다시 SNS를 통해... 그냥 다시 조금씩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책을 알리는 홍보 차원이라면...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자연인이다'로 몇 년간 살았던 사람이 다시 산으로 내려가는 느낌? 별로 사람들이 이제는 찾지도 않을 텐데... 하지만 출판사에서도 저렇게 노력하는데 나라고 갖다 주는 밥만 떠먹어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에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정말 투박하게 내가 이렇게 상 탔습니다 식으로 간단히 포스팅을 했다.
다음날 일어나 확인해 보니 생각보다 댓글이 많이 달려있었다. 특히 이젠 거의 30년 전이 되어버린 중학교 친구들이 와서 축하 댓글을 달아준다는 것이 새삼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던 시절, 서울 건대부중에서 만나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즐거웠던 친구들. 이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며 만나 본 지도 너무 오래된 것 같았던 그들이 댓글로 모두 모였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다시 뭉치자고 한 번 해볼까? 실제 어떤 친구는 같이 보자고 한 친구도 있었지만, 브라질에 있다는 나의 공간적 한계도 있고 그래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현실의 제약은 쉽게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렇게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라도 서로를 지켜보고 있었고, 댓글이나마 축하해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어느 유튜브 방송에서 '같이 슬퍼해주기보다, 같이 축하해 주기가 더 힘들다'는데 이렇게 축하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할 일이 아닌가.
1988년 어느 봄, 중학교 졸업 앨범을 찍으러 간 올림픽 공원에서
나는 책에 대한 홍보에 앞서 나에 대한 관심을 복구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수위에 오르면 책에 대한 포스팅으로 연결하여 자연스럽게 내 책에 대한 홍보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이후로 몇 개 더 포스팅을 하다가 '참을 수 없는 유머의 가벼움'을 주체 못 해 사진을 또 올렸다. 출장을 간 아마존 지역에서 우리 돈으로 2,500원만 주면 아나콘다 하고 사진을 찍을 기회가 생겼었는데, 그 사진을 올리자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은 엄청났고, 아마 내가 포스팅했던 것 중에 아들하고 프레디 머큐리 흉내 낸 사진을 올렸던 것보다 더 댓글이 많이 달릴 만큼 호응이 있었다.
15년간 연락이 끊겼던 후배도 '술 담그려면 소주 1톤은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라며 연락이 왔다
댓글과 좋아요를 달은 사람들을 보면서, '아, 이들이 그래도 내 사이트를 보고는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연락이 끊겼던 이들. 누구 말마따나 그들이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 또한 그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던가. 서로가 서로의 무관심에 숨죽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무관심을 깨고 나와보니 아주 그들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로 나는 또 재밌는 사진도 더 내다가, facebook과 Instagram, 심지어는 카카오톡 대문 사진에도 나의 브런치스토리의 글들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 정도 침을 발랐으면 이제는 내 글을 살짝 노출하면 되겠지 하면서. 또 대사관의 동료들이나 현지 교민분들에게도 알리기 시작했다. 아 저 사람이 글도 쓰네, 내지는 어 참사관님도 브런치 하셨어요? 하면서 관심을 보내주었다. 기분 좋은 관심이었다.
드디어 브런치북 스토리가 은근슬쩍 노출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sns로 돌아왔다. 물론 그전과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나와 과거를 함께했던 이들과 아직은 연결할 수 있는 연결고리 중 하나로, 또 예전에는 누군가가 나를 계속 지켜본다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런 지켜봄이 이제는 관심으로 감사하는 나이가 되었기에 sns를 더 이상 미워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지, 그 자체가 문제의 대상은 아니니까.
지난 6월 초, facebook에 연결된 메신저로 '부재중 영상 통화'가 찍혀 있다는 걸 확인하고, 뭐지?라는 생각에 확인을 해보니, 스웨덴에서 근무할 때 같이 근무하던 동료 직원이 보내온 것이었다. 스무 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나지만, 속 깊고 나이를 뛰어넘어 내가 감사해할 수 있는 동료였다. 스웨덴을 떠난 후 거의 연락이 없었는데 그 또한 facebook과 브런치스토리를 보고, 내가 따라갔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고 연락이 온 것이었다.
6월 초 어느 날 받은 기분 좋은 관심
'불특정한 관계의 피곤함'으로 멀어졌던 SNS가 브런치스토리로 이어지면서 '기분 좋은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기분 좋은 관심' 하나하나가 정말 감사해지는 나이에 느껴본다.
오랜만에.
https://youtu.be/lotCMV_HeV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