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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Aug 02. 2021

삶의 기준

 뜸하던 단톡방에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앳되고 촌스러운 대학생 열댓 명이 계곡에 발을 담그고 쪼로로 서 있는, 딱 봐도 싸이월드 재질의 사진이었다.

  사진을 올린 당사자도 이게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맨 왼쪽의 모자 쓴 인물이 지금의 내 배우자고, 그 앞에는 나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나 같지가 않아서 그거 나 아니라고 했더니 '아니고 싶은 거 아니냐'는 답이 돌아왔다. 결론을 내지 못한 단톡방에는 'ㅋㅋㅋ'만 가득 차올랐다. 


 잠잠했던 또 다른 단톡방에도 알림이 떴다. 

 코로나 때문에 심심하다고, 다들 뭐 하고 있냐는 기웃거림이었다. 단톡방의 또 다른 친구는 한창 육아 중이라 딱히 심심하지는 않을 터였을 텐데도 다정하고 반갑게 답을 해 주었다.

 문자언어에는 표정과 음성의 높낮이가 없다. 대신 이모티콘과 문맥을 통해 상대가 전하고자 하는 뜻을 유추한다. 저쪽 단톡방의 'ㅋㅋㅋ'는 긍정, 동의의 의미로 쓰였으나 이쪽 단톡방에서는 아니었다. 'ㅋㅋㅋ'가 'ㅠㅠ'와 붙으면 자조적인 웃음, 한숨 섞인 허탈한 웃음의 의미가 된다. 

 친구는 자기는 요즘 일어나면 청소하고 빨래하고 일 좀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깜박하면 하루가 다 간다고, 이게 무슨 삶인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할 건 많은데 몸은 힘들고, 잠깐 책이라도 볼라 치면 글씨는 눈에 안 들어오고, TV도 보려면 볼 수야 있겠다마는 딱히 재미도 없지 않냐고 했더니 공감의 'ㅋㅋㅋ'가 돌아왔다. 


ㅋㅋㅋ


 한 두 해 전, 이 친구가 했던 말을 나도 똑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은 너도 열심히 살았으니 좀 쉬어야지, 했다가 된통 당했다. 나는 쉬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 이 삶이 쉬는 것도 아니라고, 이게 쉬는 거면 너도 출근하기 전에 일찍 일어나서 쉬고, 퇴근하고 나서도 쉬고, 주말에도 많이 많이 좀 쉬라고. 

 타자화 된 언어로는 대개 이렇게 정의한다.

유산 활동을 수반하지 않는 소모적인 삶. 

 누구도 자진해서 살고 싶지 않은, 자아를 담아내기엔 한참 부족해 보이는 삶, 반면교사로 살았던 삶.

 무수히 많은 내적 투쟁 끝에 부러지기보다는 흔들리면서 살아갈 수는 있게 되었지만,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정의하는 수준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남의 문법은 현대 한국인의 언어생활에 깊게 녹아든 영어식 문법처럼 익숙하다. 쉽게 가져다 쓰고는 아차, 하고 뒤늦게 깨닫거나,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언젠가 가사노동의 가치를 계산해 놓은 기사를 본 적 있다. 계산법은 후루루 흘려버리고 결론으로 성큼 내려가 보니 한 달에 기본 2백만 원 안팎에, 육아나 돌봄 노동 유무에 따라 받아야 하는 돈이 계속 불어난다고 했다. 의기양양하기보다는 갑갑했다. 돈으로 치환해놓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건가, 하고.

 "이 가격이면 치킨이 몇 마리냐", "그 돈이면 국밥이 몇 그릇이냐"는 흔한 농담도 마주칠 때마다 아주 곤란하다. 나는 치킨을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국밥도 마찬가지다. 치킨보다 피자가 좋아서가 아니다. 비교는 세상을 이해하는 여러 논리적 도구의 하나일 뿐이고 나는 그날그날의 기분과 날씨와 사람과 분위기를 고루고루 고려해서 메뉴를 결정하고 싶다.


 전교 1등 하던 친구가 교대에 진학해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대학 진학도, 취업도 쉬지 않고 이뤄나갔고, 결혼도 빨리 할 생각인 듯했다. 머리도 좋고 재주도 많은 친구가 뭐하러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안주하고 마는 걸까 의아하게 여겼다가, 여가시간에 여행도 다니고 뭐 많은 걸 하려나보다, 하고 지레짐작한 적이 있다. 

 동아리 언니가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곳에 취직해서 수년 사귄 애인과 결혼한 뒤, 요즘은 뭐하고 지내나 했더니 두 번째 육아휴직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전해 준 동아리 동기는 근데 좀 아쉽다고, 아기를 낳고 나니 아무래도 엄마로서 가정에 좀 더 메일 수밖에 없고, 예전처럼 통통 튀는 반짝거림은 좀 덜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언니만 행복하면 된 거 아닐까,라고 했더니 그래도 좀 아쉽기는 아쉽다고 털어놨다.

 어설픈 재능과 그보다 더 어설픈 성실함으로 버티는 나의 삶도 누군가에게는 의아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쉬움의 대상이다. 어떨 땐 내 모습이 한심하고 답답하다가도, 또 어떨 땐 부러움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우쭐해하다가, 창피함에 허겁지겁 쥐구멍을 찾는다. 남들이 뭐라 하던 나만의 길을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청력과 시력, 문맥을 파악할 인지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탓에 오롯이 나만 품고 살기가 쉽지 않다. 

 요즘엔 조금 더 난이도를 높여서 행복마저도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으려고 한다. 만땅으로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면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날그날의 기분과 날씨와 사람과 분위기를 고루고루 고려해서 하루하루씩 살아내는 데에 집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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