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40 중반이 되어가는 데다,
남들과는 좀 다른 가치관을 고수하다 보니
요즘은 사람을 만나는 일에 소홀히 하고 있다.
내 나이 또래 그런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다를 수 있는 점이라면,
나는 나의 부모님과도 그리 자주 연락을 하지 않고,
시댁과는 내게 직접 하는 연락들을 차단 중이다.
모든 연락들은 아들을 통해서 하시도록 유도 중이다.
사랑했던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일,
‘이건 아닌데’ 싶은 마음을 안고 돌아서는 일,
그건 외면이 아니라 깊은 사랑 끝에 내린 결단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삶을 통제하려 하고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너무 귀찮게 한 까닭이다.
내 인생 40 넘게 그것을 ‘허용’ 해왔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경계를 내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랑이라 생각해서 허용했던 상대들은
내가 ‘여기까지입니다. 그만하세요.‘
라고 아무리 부드럽게 얘기해도 잘 통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더 많은 인내와 침범을 허락하기를 강요해 왔다.
사회적 역할을 ’ 도리‘라는 명목으로
나를 가스라이팅하려 시도할 때,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내 삶을 찾아 나섰다.
아무리 욕해도 상관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해도
나는 이것이 ‘사적인 민주주의’라 믿는다.
요즘 편하다.
그리고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던 변화가,
내가 정원일과 텃밭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20대 시절 차도녀로 유명했다. 생긴 것도, 마음도.
그러나, 삶의 반전은 언제나 일어나는 법.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가까운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많은 사람들을 보살펴야 했던 내게,
사람보다는 흙과 식물이 더 편해지는 시기가 오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식물은,
나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
말없이 자라고,
서두르지 않고,
내가 얼마나 주었는지 계산하지 않는다.
그래서 식물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고요한 평온함을 느끼는 것 같다.
정원일이 좋아졌다는 건,
내 안의 생명성이 다시 움트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내가 힘들었던 자리에서 한 뼘씩 회복하고,
조용히 자기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
그리고 그런 회복은 화려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저 매일 조금씩 손에 흙이 묻고,
새순이 눈에 들어오고,
이름도 몰랐던 잡초 하나가 익숙해지는 것만으로도
삶은 다시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내가 텃밭을 가꾸고,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고,
식물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나의 삶의 큰 반전이다.
한 번도 꿈꾸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것들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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