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라는 플랫폼, 잠시 떠납니다.
엄마는 늘 그렇게 말했다.
고된 삶을 견디게 한 유일한 힘이 나라고 했다.
그 말은 어릴 적 내게 깊은 사랑의 증거처럼 들렸다.
그래서 엄마의 권유가 강요처럼 느껴질 때도,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을 믿었다.
그게 진짜 사랑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참 이상했다.
엄마의 “사랑해”라는 고백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숨이 턱 막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올라오던 그 숨막힘은
이내 곧 죄책감으로 이어졌다.
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주는 엄마가 숨 막히다니.
내가 너무 나쁜 딸인 걸까.
그 감정은 오랫동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금기였다.
엄마는 무척 외로운 사람이었다.
가정에는 무관심한 남편, 너무 버거웠던 삶,
자기 욕구는 눌러야 했던 수퍼우먼같은 인생.
기댈 사람 하나 없이 감정을 눌러담고 인내 했던 시간들.
그 모든 결핍을 채워준 존재가, 나였다.
엄마의 가장 가까운 말벗이자,
분노와 원망을 받아내는 감정 쓰레기통,
기대와 한숨을 품어주는 조용한 청중,
감정을 대신 살아주는 삶의 대리인.
그 모든 역할을 나는 ‘사랑’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그 숨막힘의 근원을 찾아 공부하게 된 심리학은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난 엄마의 사랑을 받은 게 아니라,
감정의 대체물이었다고.
서로 건강하게 사랑한 게 아니라,
그저 엄마 자아의 일부분이었다고.
'자기 심리학'의 창시자인 하인츠 코헛(Heinz Kohut )은 부모가 자녀를 독립된 존재로 보지 않고
자신의 결핍을 메우는 수단으로 삼는 관계를 ‘자기대상(Selfobject)’이라 설명한다.
“The selfobject is not experienced as a separate and independent object, but as an aspect of the self.” (자기대상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일부로 경험된다.)
— Heinz Kohut, The Restoration of the Self (1977)
엄마의 감정에 눈치 보며
엄마의 슬픔과 입장을 해석하느라
나는 내 감정을 자주 미뤄야 했다.
엄마가 슬퍼할텐데,
엄마 마음이 찢어질 텐데,
그렇게 엄마를 생각하며, 나는 자꾸 나를 보류했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연장선이 되었고,
'나' 라는 인간을 만들고 찾을 새도 없이
점점 나 자신의 중심에서 멀어져갔다.
발달심리학의 선구자였던 소아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 마거릿 말러는, 이런 어머니의 딸과 유착 관계를 ‘분리-개별화의 실패’라고 설명한다. 자기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이 과정이 방해받으면 , 자녀는 부모의 감정에 휘둘리며 ‘부모의 심리적 연장선’처럼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는 전혀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When the separation–individuation process is disrupted, the child may remain fused with the mother, unable to form a distinct self.” (분리–개별화 과정이 방해받을 경우, 아이는 어머니와 심리적으로 융합된 상태에 머물며 독립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할 수 있다.)
— Margaret S. Mahler et al., The Psychological Birth of the Human Infant (1975)
그러다 어느 날, 깨달았다.
엄마와의 이 ‘자웅동체적인 사랑’은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라,
나를 사라지게 만든 원인이었다는 것을.
아니, 애초부터 나라는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던
소유적 잉태적 사랑이었다는 것을.
나는 뱃속의 탯줄은 끊었을지언정,
정신적 탯줄은 아직 두려움에 끊지 못한,
아직 엄마의 머리와 가슴 속에 있는 아기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사실
이제껏 제대로 태어나 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래서 턱밑까지 숨이 차오르던
내 삶의 벼랑 끝에서야 드디어 결심했다.
나는 더 이상
엄마의 감정에 자동 응답하는 호출 앱도,
감정적으로 무장해제된 채 24시간 대기하는
‘딸 알림 시스템’도 아니다.
엄마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원망해서도 아니다.
엄마를 이제 영원히 떠나겠다는 말이 아니라,
내 자리에서 비로소 엄마를 마주보겠다는 선언이다.
그러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뿐이다.
사랑은 서로를 하나로 묶는 끈이 아니라,
서로 숨 쉴 수 있는 거리에서 피어난다.
붙어 있어야만 사랑이 아니고,
떨어진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자신의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존재가 있을까?
모든 원망, 미움, 아쉬움의 감정들은
사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질식당하지 않고 살아있어야 했다.
내가 또 다른 몸을 가진 엄마의 분신이 아닌
‘나’로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만 했다.
그래서 한동안의 거리두기가 꼭 필요했다.
엄마의 것들이 아닌, 나의 것들을 찾기 위해.
그런데 엄마와의 거리두기를 말하려는 순간,
딸의 마음에 비수를 꽃는 사회적 시선들이 있다.
사람들은 요즘 종종 말한다.
“요즘은 딸 가진 엄마가 최고야.”
“아들보다 훨씬 낫다니까.”
“딸이랑 여행 다니고, 엄마 챙기고, 딸이 젤 친한 친구야.”
이 말들은 언뜻 훈훈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 안엔 보이지 않는 은밀한 역할 강요가 숨어 있다.
-딸은 늘 엄마 편이어야 한다.
-딸은 엄마와 친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딸은 결혼해서도 엄마를 챙겨야 한다.
사회는 언제부턴가
아들의 든든한 경제적 부양 대신
딸에게 친밀한 정서적 부양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자식은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예전 자식을 쓸모로 평가하는 프레임은
아들에서 딸로 대상만 옮겨갔을 뿐,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딸은 망설인다.
엄마에게 거리두기를 말하면
“차가운 딸”, “무정한 자식” "싸가지 없는 젊은이"
이런 무거운 낙인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 죄책감이 딸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세운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기로 했다.
내 감정을 지키고,
내 욕구를 정당하게 돌보고,
내 삶의 방향을 내가 선택하기 위해
이 구조에서 과감히 내려서기로 했다.
나는, 더 이상
엄마의 감정을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을 보상하는 대체물이 아니다.
나는 누군가의 '유용한 도구' 가 더이상 되지 않기로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당연하다 생각되는 사회적 명제에 반문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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