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사이 : 엄마 사랑, 왜 전 숨이 막힐까요?

탑 위의 라푼젤, 그것은 진짜 모성애였을까?

by 파랑새의숲


넌 아직 뭘 몰라.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엄마 곁이 제일 안전해.
모든 걸 다 잘 아는 이 엄마가, 지켜줄게
내 곁에 머무르렴.

그 말은 분명 사랑이었다.
그래서 더 의심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사랑받기 위해 탑 안에 머물렀고,

세상의 위협에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
탑을 더 높이 쌓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건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의 모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라푼젤> 은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민담 설화를 정리해 만든 독일의 고전이다.

그 높은 탑 머리긴 소녀와 마녀의 이야기는

시공간을 초월해 아직까지 반복되고 있는,

엄마와 딸 사이의 감정적 유착, 모성애의 두 얼굴이라는 깊은 심리학적 구조를 담고 있다.


라푼젤은 탑에 갇혀 자라며 세상을 동경한다.
하지만 그녀를 훔쳐다 가둔 마녀는 스스로를 ‘엄마’라고 부르며 보호자처럼 행동한다.
자신의 젊음을 위해 딸이 필요한 그 마녀는

딸의 자유를 향한 갈망에

다정한 말투로, 마치 걱정 많은 엄마처럼 말한다.


-넌 아직 세상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됐어.

-넌 너무 세상 물정을 몰라
-엄마는 네가 너무 걱정돼서 그래.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많은 딸들이 어머니로부터 들어온 말이기도 하다.


걱정이라는 이름의 감금,

모성이라는 이름의 통제


자신의 작은 소망이 생긴 딸이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하자,

엄마는 세상은 너무 위험하다며

라푼젤을 자신의 곁에 붙들어두고자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설득을 한다.


“엄마가 제일 잘 안다 (Mother knows best)”라는

이 노래의 제목은,

한국 사회에서도 마치 속담처럼 굳어져 있다.
‘하늘은 속여도 엄마는 못 속인다’다거나,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등,
엄마는 모든 것을 잘 알고

그런 엄마의 말은 곧 진리’라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도 깊이 박혀 있다.


하지만 라푼젤의 ‘가짜 엄마, 그 마녀‘는 정말 그녀를 위해

그 높은 탑에 가둔 것일까?
그 사랑은 정말 보호였을까?

아니면, 딸의 자율성을 두려워한 통제였을까?


딸이 자유로워질수록, 엄마는 불안해졌다.
딸이 자기 삶을 향해 한 발 내딛어

엄마인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려 할 때마다,
다정하지만 완고한 말투로 다시 탑의 문을 닫는다.


-그건 너랑 안 어울릴 것 같아
-아직 너는 세상을 몰라
-네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서 그러지


그 말들은 사랑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딸의 욕망과 판단을 불신하고 유보시키는 말이다.


심리학자 캐럴 길리건은 말했다.

“사랑이 관계로만 존재할 때,

한 쪽은 자율성을 내려놓는다." 라고.

여성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옳고 그름보다 ‘관계의 균형’을 지키는 것에 두는 경향이 있으며,

그 안에서 불균형이 생기면 자신의 욕망보다 타인의 감정을 먼저 고려하게 된다.

— Carol Gilligan, In a Different Voice (1982)


하지만 사랑은 때때로, 거리를 허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진정한 관계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도,

연결될 수 있는 자유로운 것이다.



사랑받기 위해 나를 접은 아이


우리 사회는 여성을 ‘어머니’라는 정체성 안에 가두는 데 익숙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이제 한 여자로서의 욕망을 버리고,

가족을 위한 희생을 최우선으로 택하고,

아이를 위한 ‘올바름’을 수행하는

어떤 수퍼우먼 같은 숭고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를 낳는 순간, 위대한 모성애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자


이게 바로 여성에게 강요된 모성 신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아를 억압하게 만든,

가장 은밀하고 결정적인 가스라이팅.


심리학자 도날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은
아이가 진짜 자아로 살아가기 위해

‘거짓 자아’를 발달시켜야 하는 상황을 깊이 우려했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다

자기 욕망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아이는,
결국 내면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아이뿐 아니라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사회라는 큰 틀의 부모의 비위를 맞추려

여성들은 자신을 부여받은 역할에 끼워맞춘다.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억누른 채 ‘엄마 역할’만 수행하는 삶은
결국 그 억눌린 여성으로서의 욕망들을

무의식적으로 딸에게 투사하게 만든다.


딸이 너무 자유로워지면,

엄마는 왠지 모르게 불편해진다.
엄마가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딸이 누리는 걸 지켜보는 일이
기쁨보다는 무의식적 불안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


라푼젤의 머리카락은 마녀와 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이자, 통제의 수단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힘을 가진

라푼젤의 긴 머리카락.

그녀는 그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낸 후에서야,

마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어머니의 젊음을 담보하는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단순히 영험한 머리카락이나 못된 마녀와의 단절이 아니다.
자기 삶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는 상징적 행위이며,
어머니의 불안과 그릇된 욕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가는 독립의 선언이다.


많은 어머니와 딸들이 이 단절을 두려워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머니가

또는 엄마인 자신이

그 마녀처럼 영영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엄마를 실망시키면 어쩌지

엄마가 서운해하면 어떡하지라는 감정은
탑보다 더 높은 벽이 되어 자유를 가로막는다.


하지만 진짜 사랑이라면,
그 벽을 넘어도 사랑은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서로의 삶에서 영향력을 잃더라도,

우리는 계속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다행이게도

어머니와 딸은 분리의 과정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후에 진짜 어머니와 재연결되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오히려 더욱 더 건강한 모습으로.


라푼젤이 머리를 자른 후,

가짜 엄마 행세를 하던 마녀와 헤어지고

진짜 엄마인 착한 왕비를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그 마녀와 왕비는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어머니' 의 속성인 모성애의 여러 측면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 놓아주는 사랑, 다시 만나는 엄마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학자였던 에리히 프롬은

모성애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했다.


“사랑하는 어머니인가 아닌가를 가려내는 시금석은
분리를 견뎌낼 수 있는가,
분리된 다음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에서


라푼젤이 마녀로부터 벗어난 후 만나는 ‘진짜 엄마’는
더 이상 탑을 짓지 않고, 머리카락도 붙잡지 않는다.
그저, 다시 만난 딸을 조용히 껴안아줄 뿐이다.


통제로서의 모성이 끝나야,
연결로서의 사랑이 시작된다.


엄마도 한 명의 여성이고,
딸도 하나의 완전한 존재일 때,
비로소 서로를 억압하지 않는 사랑이 가능해진다.


서로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을 때,
숨이 막히지 않는 사랑,
그 자유로운 관계가 열린다.


그리고 그 관계를 위해서,
때때로 서로의 삶엔 거리가 필요하다.

사랑은,
서로를 도망가지 못하게 꼭 붙잡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면서도 계속 곁에 머물 수 있는 용기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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