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게소, 다시 태어남을 위하여

홀로 낯선 곳에 서다

by 파랑새의숲


15년 전, 서른 살이었다.

사무실 창밖으로 시원하게 뻥 뚫린 고층 한강 뷰,

맑은 하늘 아래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런데, 그 멋드러진 풍경 앞에서

이상하게도 숨이 턱 막혀왔다.
그것도 지금 당장 질식할 것처럼.


화려한 경력도, 안정된 월급도,
남부럽지 않은 회사도,
그 통창 너머의 멋진 한강뷰도
더 이상 내 삶을 생기 있게 지탱해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출퇴근으로 오가던 길.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는데

눈물이 왈칵 터져 멈추지를 않았다.
놀라운 건,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는 거다.


눈물은 나의 감정과 다르게 흘러내려,

내 몸과 마음이 어떻게 단절되어 있는지를

단번에 알아차리도록 나를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무서웠다. 어딘가 고장이 단단히 났다는 느낌에

흐르는 눈물과 슬프지 않은 가슴의 모순을 느끼며

나즈막이 중얼거렸다.


도저히, 이대로는 더이상 못 살겠다


왜 그렇게 죽을 것 같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죽기 전에 나를 살리고 싶었다.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계속 흘러요.


이상한 말을 하며, 급히 찾은 상담실.
나는 무척 두렵지만, 상담 선생님과 함께 천천히

마음속 깊은 판도라 상자를 열어 자세히 들여다 보기로 했다.


고구마 줄기가 이렇게 얽혔을까?
지하의 개미왕국이 이보다 복잡할까?


가족, 연애, 회사. 나의 삶.
나도 모르게 깊이 묻어둔 온갖 감정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이것들을 그동안 어찌 모른척 해 왔을까.

어쩌자고 그리 깊은 곳에 나도 모르게 파묻었을까.


강둑이 무너져 물난리가 났다.
남 보기 좋게 예쁘게 가꿔놓은 내 ‘페르소나의 도시’에
홍수와 쓰나미가 덮쳤다.


이젠 바꿔야 한다.
아니, 지금의 나를 한 번 죽여야 한다.


왜냐하면, 살고 싶으니까.


그래서 결심했다.
퇴사, 그리고 낯선 곳에서 홀로 하는 여행.



저 회사 그만둘게요. 유럽에 다녀오려고요.


팀장은 내 말에 의아해했다.


“뭐? 서른에? 이렇게 갑자기? 잘 다니다가 왜?

유럽 별 거 없어.
돌아오면 요즘 재취업 힘든 거 알지?”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재취업은 무슨.

죽기 전에, 보고 싶은 거 보러 갈 겁니다.


왜 그랬는지 그때는 내가 벼랑 끝에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미래의 나까지 돌볼 여력이 전혀 없었다.


뭐? 회사 관두고 혼자서 어딜 간다고?


부모님은 예상대로 난리가 나셨다.
엄마는 내가 죽으러 가는 것처럼 매일 울며불며 드러누웠고,
아빠는 마치 내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화를 내셨다.


그때, 나는 20여 년 전을 떠올렸다.
친오빠가 세상을 떠난 날 이후,
매일이 풍비박산이었던 우리 집을.


갑작스러운 장남의 죽음 이후,
나는 외동딸이자 장남이 되어,
동시에 철없는 막내이기도 했고

부모의 기둥도 될 것을 요구받으며 살아온 날들.


그 많은 페르소나 중, 정작 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 날 가라앉았다는 아틀란티스의 전설처럼.


이번 여행은,
그때 사라져 버린 나를 찾는 여정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야만 했다.


유럽 지도를 펴고
가장 이국적이고 낯선 곳을 찍었다.


여기다!


아무도 현재의 나를 모르는 가장 낯선 곳.
기독교와 이슬람의 역사가 교차하는 도시.
성당이었다가 모스크,
다시 성당, 또다시 모스크가 된
기구한 운명의 건축물, 아야 소피아.



마치, 막내였다가 장녀,
외동딸이었다가 부모의 부모가 되어야 했던
역설적인 나의 삶을 닮은

아시아와 유럽을 둘 다 품은, 경계의 도시

이스탄불.


거기서 나는 다시 태어나기로 했다.


모두의 만류와 훼방을 뒤로하고
오픈티켓을 끊었다.
돌아오는 날짜는 정하지 않았다.


숙소도, 중간 비행기표도, 기차도
아무것도 예약하지 않았다.
대략 유럽 지도만 머릿속에 넣었을 뿐,
모든 것은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열려 있는
낯선 곳에서의 진정한 유랑 계획이었다.


이 낯선 길에서 나는 아기로 다시 태어나고,
길 위의 이방인에 의해 성장해 자라날 것이다.


아이폰이 없던 시절,
2G 휴대폰은 집에 꺼둔 채,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론리 플래닛 한 권과 옷 몇 벌을

30리터 배낭에 넣고

나는 어느 날, 그렇게 홀연히 떠났다.


돌아오는 날짜도, 경로도 정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 출발 도시만 있었다.


이. 스. 탄. 불.


그곳에서 나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흘러다닌 120간의 유랑.


터키 -> 그리스 -> 이탈리아 -> 스위스 -> 독일 -> 프랑스 -> 그리고 한 달간의 산티아고 순례길.


그 길은 관광 여행지의 목록이 아니었다.
각각의 장소들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고향이었고,

여행동안 만난 이방인들은 모두 나를 길러낸 스승이었다.


이스탄불이라는 낯선 곳에서 다시 아기가 되어,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청소년처럼 부딪히며 방황했고,
파리에서 한 사람을 만나 사랑하며 여성이 되었다.


산티아고의 순례 길을 한달 내내 걸으며,

나는 처음으로 나의 짐을 내 등에 온전히 매고,

내 두 발로 우뚝 서서 인생을 걷는 걸음마를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그렇게, 나는 그제야 엄마와의 정신적 탯줄을 끊고,

진정한 독립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태어남을위하여

#쉼표챕터

#심리적독립

#홀로서기

#낯선곳에서다

#훈련소

#모녀갈등전야

#여행과심리

#내마음회복

#브런치북

#감정회복

#인생전환점

#자기발견

#경계세우기


keyword
이전 05화가족사이 : 사랑이라 믿었던 것의 속살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