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의 그 남자는 어디로??
드라마틱했던 사랑에 빠졌던 과정과는 달리, 연애는 참 심심했다. 그는 보기보다 열정적이지 않았고, 참 말 그대로 'stable' 안정적이었다. 감정 기복도 그리 크지 않고, 일상 생활에 기복도 없었다. 그저 자기의 하루를 기복없이 '해야 할 일들만을 잘 해내는 상태' 로 지내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여름 휴가를 과감하게 유럽 프랑스까지 나를 만나러 날아왔던 남자치고는, 이상하게 현실에서는 맥아리(?) 가 없어 보였다. 사랑에 대한 열정도, 애끓는 구애도 없었고, 그저 그 사람 삶에 나를 더한 것 정도? 그런 느낌으로 나를 옆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들었고, 내가 원했던 화학적 반응이 찌릿찌릿한 연애와도 거리가 멀고, 뭔가 그의 옆에 붙어 있는 악세서리가 된 느낌이 들어서 혼란스러울 때쯤, 그 일이 터졌다.
그의 컴퓨터에서 미처 그가 지우지 못한 하드 디스크 깊숙한 곳에서 그의 옛 여친 사진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컴퓨터 인터넷 맨 마지막 방문 싸이월드 사진에는 그 전 여친이라 추측되는 여자의 얼굴들이 대문짝 만하게 계속 실려 있는 페이지였다. 전 여친 싸이월드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의 싸이월드 홈페이지가 그의 인터넷 마지막 방문 페이지였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물론, 쿨하게 아직 못 지웠을 수도 있는 문제였고, 그저 학교 후배의 싸이월드 홈페이지를 방문했다고 볼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갔던 애견까페에 그녀가 나와 비슷한 포즈로 강아지들을 예뻐하고 있었다.
내가 갔던 그의 집에 나와 비슷한 행동으로 편한포즈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 찍힌 사진이 있었다.
내가 함께 동행했던 그의 친구들과 커플 모임에 , 나만 부품처럼 바뀌어져 있는 것처럼, 그녀가 나 대신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기분이 너무나도 이상해졌다. 그는 나를 만나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의 생활에 '여자친구' 라는 존재만 부품처럼 바뀌었을 뿐, 나와 만나서 정신적인 교류를 통한 변화라든가, 일상생활의 균열이라든가, 그 어떤 파장이나 물결이 일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나는 그의 현재 '여자친구' 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그를 장식하는 악세서리처럼 느껴졌다.
전에도 연애 경험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미묘하게 뭔가 다른 사람을 내가 대체하고 있다는 느낌,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대체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여자친구라는 '자리' 에 내가 앉은 것 뿐인 것 같은 미묘한 공허감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유치하게 고집을 부렸다.
내가 내 인생 후반부를 완벽하게 변경하면서까지 선택한 연애와 사랑의 결과가, 누군가의 악세서리가 되는 것임을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그에게 그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확인하려 들었다.
-왜 싸이월드에 옛 여친 사진이 지워지지 않고 비공개로 남아있는 거지?
-그 여자는 왜 자기 베스트 프렌드 싸이월드에 자기가 제일 예쁘게 나오는 사진으로 도배를 하는 거지? 당신이 보고 있는 줄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 여자와 갔던 곳을 나를 또 데려가는 거지? 그녀와 연애가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거 같은데.
-연애초반인데 왜 열정적이지 않은거지?
-왜 싸이월드나 다른 곳에 새로운 여자친구인 '내 사진' 은 올리지 않는 거지? 그 여자와 그 친구들이 보고 있을텐데?
내가 달달달달 볶아 대자, 그는 정말 미숙하게 대처하다 못해 자기 인생에 최대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나는, 나를 아직 잊지 못한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대놓고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나랑 함께 하는 건 너라고. 당신이 이긴거야. 위너는 당신이라고.
세상에... 어느 여자가 이 말을 듣고 좋아라 할까. 머리속에 마음속에 아뿔사 싶은 마음이 계속 떠다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야. 그 여자랑 아직 끝나지도 않은 거야? 지금 누구 마음이 더 중요한거야? 내 마음이 아프니까 당신에게 지금 징징대는 건데, 누굴 배려하는 거냐고, 당신이 무슨 프롬 퀸이야? 내가 기사야? 뭘 위너야 위너는! 내가 당신을 차지해서 뭐 감지덕지 하라는 거야???
그는 변명을 하면 할 수록 더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 여자한테 연말에 전화가 왔었어도 난 끝까지 안받았어. 내 마음이 그렇다니까? 난 그 여자보다 당신이 더 좋다고.
오 마이 갓. 뭐?? 연말에 전화가 왔다고??? 그 때는 우리 내가 당신 집에 인사도 가고 결혼 얘기가 오간 때인데, 그때도 전화가 왔다고? 이거 심각한 거 아니야? 전화를 왜 안 받아? 받아서 제대로 깔끔하게 정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나 사랑하는 사람 생겼다. 너랑은 끝났다. 왜 자꾸 전화하냐, 잘 살고 앞으로 전화하지 마라, 난 이제 너한테 감정 없다. 확실히 얘기를 하고 끝내야 그 여자도 잊던가 말던가 할 거 아니냐고! 뭔가 뒤끝이 이상했으니까 계속 미련 갖고 전화하는 걸 거 아냐?!
그리고... 그 여자보다 내가 더 좋다고? 그럼 그 여자도 좋단 말이니??? 넌 , 내가 없어도 그냥 다른 여자친구 만나서 잘 살거지? 난 그냥 너한테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 같아.
이런 내 불만에 그는 또 나를 다시 한 번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답변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가 만난지 얼마 안되었는데, 너 없이 못 살겠다거나 니가 전부라거나 하진 않지. 우리는 이제 시작하는 거야. 우리의 방을 가꾸어 나가면서 점점 채워나가는 거라고. 우리의 시간을 채워나가면서 서로에게 점점 중요한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해.
정답이었다. 그러나, 여자라면 원하지 않는 답이었다.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답이었을 것이다. 이제 서로 만나 깊어지는 관계이니, 지금부터 차근 차근 쌓아나가는 관계다. 나는 전 여자친구들보다 니가 더 좋다. 굳이 이미 끝난 관계들 상대 안하면 그만이지, 악랄하게 가슴 찢어놓을 필요까진 있냐.
도덕책처럼 맞는 말로 내 마음을 찢는 남자.
그는, 딱 그런 타입이었다.
맞는 말로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스타일..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미숙해서라고 생각하고 용서하는 동안 매번 내 속은 썩어들어갔다.
#현실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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