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 잘 봐야지! 어른이 몇 명인데 아를 제대로 못 보노"
오늘도 아버님께 꾸지람을 들었다. 유별난 손주 사랑, 내가 엄마인데 엄마인 내가 내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까
아버님은 내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 자꾸 입을 대신다. 처음 첫 째 아이를 키울 때에는 정말 힘들었다. 내가 부모인데 내 방식대로 키우고, 아무리 아이여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지, 둘째를 키우고, 조카가 하나 둘 더 생기고, 나의 결혼 생활이 길어지면서 아버님의 잔소리가 이제는 사랑의 소리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 아버님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외삼촌 손에서 자라셨다. 그때 그 시절 힘들지 않게 살지 않은 사람 어디 있겠냐만은 아버님은 손주가 울면 어쩔 줄 몰라하시며, 아이를 울리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그렇게 우는 아이를 보면 어린 시절 자신이 떠오른다 하시면서 지나칠 정도로 손주를 예뻐하신다. 그리고 아버님의 모습을 보면 나이가 많이 드셨어도 사랑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있으시다. 새 옷을 사 입으시면 자랑하시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선물로 드리면 좋아서 얼굴 그대로 좋아함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 더 많이 사랑해 드려야지 하는 마음이 든다.
오늘은 아버님 생신이었다. 아버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곰탕을 먹으러 온 가족이 칠성시장으로 갔다. 손주 손녀, 아들 며느리 대동하고 가시니 참 좋으신 가 보다. 아버님은 내가 교사인 것을 자랑스러워하신다. 두 아들, 두 며느리가 공무원이라고 자랑하시는 것이 참 좋으신가 보다. 신랑을 처음 만나 시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소박했던 집밥이 너무 좋았고, 온화하신 부모님이 참 좋았다. 나를 보고 너무나 좋아하시던 아버님을 보고, 신랑은 자기가 살면서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결혼하고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자기 마음대로 가족의 모든 일을 하시는 분, 함께 어디를 가도 혼자 저만치 앞장서서 가시는 분, 자신의 말씀만 하시고 다른 사람의 말은 전혀 듣지 않았던 아버님, 그런 아버님의 모습에 가족들은 어쩔 수 없다 힘들어하며 우리 아버지는 안 바뀐다 하며 그렇게 생각하더라. 시아버지 사랑 며느리라고 처음 시집와서 아버님 모시고 이곳저곳 다니기도 많이 하고, 여행도 같이 다니며,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세월이 지나니 아버님도 참 많이 바뀌셨구나 생각이 든다.
우리 아버님은 첫째 며느리에 대한 사랑은 정말 크시다. 처음에는 너무 과분하여 버겁기도 했지만 나를 그리 사랑해주시고 지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신랑을 만나고 결혼을 이야기할 때 아버님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우리는 결혼할 때 집을 해 줄 수가 없다."라고 제일 먼저 말씀하셨다. 앞서 쓴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나의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은 바닥을 쳐 본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기에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그때 "이렇게 잘 키워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무슨 집을 말씀하십니까? 집은 저희가 살면서 사면됩니다."라고 말씀드릴 때 시부모님의 두 분의 안도의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신랑이 나 만나기 전에 은행 아가씨를 만났었는데 그 아가씨는 결혼할 때 집을 사 올 수 없다고 하니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시간이 한 참 지난 후에 알 수 있었다. 우리 아버님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며느리가 주면 정말 좋아하신다. 정말 선물을 해 드릴 맛이 난다. 아버님은 체형이 아주 작으셔서 나와 몸집이 비슷하시다. 며칠 전 아버님 친구분이 돌아가셨단다. 그 친구분은 아버님의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시던 분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으니 아버님의 얼마나 슬프실까 생각이 들며, 그 허전한 마음을 무엇으로도 달랠 수는 없겠지만 백화점에 달려가 옷 한 벌 사다 드렸다. 남자 사이즈 제일 작은 것을 골라, 내가 입어보았다. 그렇게 사다 드린 옷이니 입어 보니 사이즈가 딱 맞다며 정말 좋아라 하시는 아버님을 보고, 내가 무언 가를 해드릴 수 있음에 참 감사했다.
나는 친정에서는 둘째 딸, 그것도 밑에 아들의 낀 중간 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인정에 참 목말라했던 것 같다. 내가 예민한 성격이어서 일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사랑의 크기가 너무 커서였을까? 아직도 친정 엄마와 친정 식구들 생각만 하면 울음이 턱밑까지 올라온다. 내가 우리 신랑과 결혼한다고 하였을 때 우리 친정의 분위기는 어떻게 하면 이 결혼 뜯어말릴까를 고민했었다. 하지만 나는 완고했다. 그 완고함 안에는 확신이 있었다. 신랑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 시부모님의 인정 역시 정말 큰 역할을 하였다. 한 번 씩 아직 시부모님의 인정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 인정이 나를 한 없이 앞으로 가도록 하는 추진력이 되어준다.
아직도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참 많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그런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시부모님의 지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버님은 오늘도 약주 한 잔 하시면서 건배사는 "며느리 하는 일 잘돼라" 나를 이렇게 지지해 주는 사람 또 있을까? 하늘에 있는 우리 아빠가 아버님을 보내주신 것은 아닐까? 오늘도 가족 식사 자리에서 다른 가족들에게 하는 잔소리로 분위기 좋지 않기도 했지만 나는 이제 그 잔소리가 사랑의 소리로 들리는데, 다른 가족들은 아닌 가보다. 잔소리를 사랑의 소리로 통역하는 통역관의 역할을 한 동안 해야 할 것 같지만 아버님 건강히 오래오래 사셔서, 그 통역관의 역할을 오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요. 큰 며느리가 호강시켜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