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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Nov 01. 2020

소년이 소녀에게 - 에필로그

빨간 실과 우유에 밥 말아먹는 아이.



에필로그


소녀 -


어느덧 빨개진 두 손끝에 입김을 호호 불어 찬바람의 통증을 녹이는 겨울이 됐다. 매일 아침 나를 기다리고 매일 방과 후 또 나를 기다려 주는 그 녀석과 좁은 골목길을 함께 걷고 있다.


오늘은 어쩐지 빨간색 목도리가 하고 싶어서 아침 댓바람부터 옷장을 다 뒤집어 작년에 사두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목도리를 두르고 나왔다. 빨간색 털실촘촘히 목에 두르니 내 것인지 제 것인지 모를 온기가 따땃했다. 물론 하얀 내 얼굴에 언젠가 빨간색이 잘 어울린다던 복실이 말도 조금은 참고를 했겠다.


찬기운 잔뜩 담은 계절에 걸맞게 태양도 바람 피해 빨리 구름 뒤로, 땅 아래로 그렇게 몸을 가렸다. 학교가 끝나고 조금 시간을 지체하니 벌써 하늘에 어둠이 흩뿌렸다. 복실이와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 문득 복실이가 나를 내려다보며 멈췄다.


 복실이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쫓다 보니 목도리에 한올 비죽 나와있는 실이 보였다. 아까 급하게 의자에서 들어 올린다고 어딘가에 걸려 튀어나왔나 보다. 


-손으로 잡아 뜯을까?
-안돼. 그럼 목도리 다 망가져. 칼 있나 볼게.

가방을 뒤적거리는 복실이가 귀엽다.


-아 맞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나 어렸을 때 너네 동네 살았었다?

맨날 책도 한 권 안 들었는지 납작한 가방에서 필통 하나 덜렁 집어 들고 뜬금없이 꺼낸 얘기다.


-그래? 어디 살았는데? 아파트?
-아니, 우리 주택이었는데, 너네처럼. 내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딱하나 기억나는 게 있어. 옆집 살던 여자애가 엄청 특이했다는 거.

약간의 질투를 담아 뭐가 그렇게 특이했냐 물으니


-걔네 집에 틈만 나면 만화 보러 놀러 갔거든. 엄마는 안 보여주니까. 근데 그 애가 우유에 밥을 말아먹는 거야.
-.....응? ..... 우유에...?
-응. 난 흰 우유 못 먹어서. 너무 신기해서 지금도 기억나.

우유에 밥 말아먹는 아이라..


널 보면 어렴풋 머릿속에 끼었던 안개 같은 무언가가 있었거든. 그게 뭔지 언제나 답답했어 나는. 근데 그게,, 이제 막, 정말 이제 막 선명해지려 한다.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데...?
-그 애 방은 일층이었고 내 방은 건너편 이층 방. 그래서 창문에 붙어서 그 애 로보트 만화 보던 거 지켜보던 장면이 생각나.

너였구나. 그때 그 애가 너였구나.


-근데 그게 어때서?
-응?
-우유에 밥 말아먹는 게 어때서?
-우. 그 비린걸. 웩.

진절머리를 치며 머리를 도리도리 푸르르 푸르르하는데. 이제쯤 알려줘야겠다. 그게 나였다고.


-그거 나야.
-응?
-그거 나라구. 우유에 밥 말아먹는 애....


어느새 칼을 꺼내 내 목도리에 비죽 나온 털실을 붙잡고 자를 준비를 하는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이쪽 끝도 저쪽 끝도 길게 내보이는 그 좁다란 골목의 한중간에서, 그 애가 나의 빨간실을 붙들고 나를 바라보는데, 이게 그냥 어른들이 말하던 운명이라는 건가 싶었다. 그 애와 함께 있을 땐 바람도 차갑지 않다.


우리 집에 틈만 나면 놀러 오던, 로보트 만화 좋아하는 그 실없는 남자애가 바로 너였네.


나의 빨간 실.  


허리를 고꾸리며, 머리를 나풀거리며 웃는 네 눈에 내가 담겨있는 게, 하늘이 담겨있는 게 참 좋다. 오래도록..내 옆에 있을 거지? 빨간 실 한 올 한 올 길게 풀어 그 실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내 옆에 있어라.







소년 -


내가 6살 때, 우리 옆집엔 특이한 여자애가 하나 살았다. 여자 앤 데도 로보트 만화를 즐겨보고, 내가 오거나 가거나 신경도 안 쓰고 우유에 밥을 말아먹던 아이. 그 비릿한 흰 우유에 밥을 말아 옹골차게 그 쪼끄마한 입으로 한입 쑥 넣어 물고는, 오만상을 다 찌푸려 바라보는 내게 권한다.


- 엄청 고소한데 한입 먹어봐라. 히이


나는 안 먹어, 도리도리 하고는 그렇게 그 애와 그 애의 오빠 사이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았다. 허리 굽는다고 맨날 타박하는 엄마 얘기 떠올려 허리는 꼿꼿이 세우고 형과 나는 로보트의 세계로 몰두했다. 우유에 밥 말아먹는 그 아이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마나 맛있는데 안 먹냐 중얼중얼한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애가 입을 비죽이며 중얼댄다.

-야,, 한 번만 먹어봐. 진짜 얼마나 맛있는데.


운명이나 인연이라고 말하는 것 따위 애들이나 소설책 보고 믿는 거라고 주철이랑 콧방귀나 뿡뿡 뀌어댔던 나인데, 이건 운명이 보기 좋게 내게 한방 날린 주먹이었다.


그 애의 비져 나온 빨간 실을 자르려다가 그만두었다. 자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실 벌어진 틈 사이로 어떻게든 욱여넣고 목도리를 여며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좁은 골목길을 어깨 포개어 걷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하늘의 구름도, 노을도 함께고 바람도 발맞추어 걸어준다. 아마도 아주 오래도록 이 애와 이렇게 걷겠지 싶다. 오늘도 2번 버스는 푸드덕 대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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