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된 이야기
소년 -
그 애는 그 뒤로 며칠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걱정이 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전화도 받지 않았고, 담임 선생님도 부모님을 통해서만 얘기할 수 있었다고 했다. 방과 후 친구들을 모두 보내고 혼자서 처음 그 애를 바라봤던 플라타너스를 걸었다. 이 길을 걷고 있으면 언젠가 신발에 톡톡 발을 끼워 넣던, 눈을 감고 바람 냄새를 맡던 그 애가 환영처럼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좁다란 골목길을 돌아 버스 정류장으로 갈 때까지 그렇게 그 애는.
보고 싶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같은 반 남자애랑 주먹다짐도 조금 했으니 일주일은 지났겠다. 하필 이제 막 문에 발을 하나 내려놓는데 그 애를 두고 정신병자니 뭐니 하는 소리 같은 게 들려와서 나도 모르게 그냥 주먹부터 날렸다. 그다음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두가 몰려와 나를 붙들고 그 새끼를 붙들고 그 새끼의 코에서, 내 입술에서 뜨겁고 검붉은 무언가가 뚝뚝 흘러내렸다는 것 밖에는.
그날부터는 틈만 나면 병원 앞으로 갔다. 언제 그 애가 올지 모르니까. 그러고 보니 집이 어딘지도 모르네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바로 병원 앞으로 달려가서 그렇게 앉아서 그 애를 기다렸다. 햇빛이 짙은 파랑이 되고, 짙은 파랑이 어둠이 되면, 창문을 통해 어둠을 가르는 불빛이 샌다.
그리고 또 다른 어둠이 드리우던 어느 날, 병원 앞에 쪼그려 앉아 핸드폰이나 톡톡이던 어느 날 그 애를 볼 수 있었다. 며칠 사이 수척해진 얼굴에 그만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 끝까지 들어차 잠시 그렇게 묵묵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니가 왜.
니가 생각했던 그대로였어서.
-나랑 같이 있는 거 누가 보면 곤란한 거 아냐? 괜찮으니까 돌아가.
-미안해.
한참을 그렇게 우두커니 서있다가 그 애가 다시 걸어가길래 그냥 말없이 그 애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걸어 걸어 한참을 지나오다 보니 그 애의 발걸음 닿는 곳은 다시 학교다.
운동장을 바라보고 앉은 내게 그 애가 물었다.
-입술은 왜 그래?
-그냥 좀 싸웠어.
-싸움도 해? 왜?
니가 보고 싶어서. 속으로만 삭히고 말았다.
-그러게. 나 진짜 못된 애네. 쌈박질이나 하고.
이제서야 풋 하고 웃는다. 말갛고 말간 얼굴엔 역시 웃는 게 어울려.
-내일부터는 학교 나올 거지?
그 애가 입을 떼지 않던 몇 초 되지도 않는 그 순간이 왜 이렇게도 길게 느껴지는지.
-나 학교 가면 뭐해줄 건데.
-글쎄.
난 아직 16살이라 뭐 엄청 대단한 선물은 못해줄 것 같아서 미안하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뭐라도 할게.
니 마음이 딱딱한 돌멩이라면 내가 그 틈을 조금씩 깨 볼게. 니 마음이 굳게 잠긴 문이라면 열쇠를 찾아볼게. 니 마음이 수천개로 조각난 퍼즐이라면 내가 작은 조각 다 모아 맞춰볼게.
오늘 아침은 좀 서둘렀다. 그 애가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30분 일찍 도착해서 그 애가 오기 전에 책상을 옮겼다. 오랫동안 혼자였던 그 애 옆으로. 애들은 역시 귓속말이나 하고 주철이는 너 왜 그러냐며 제 검지 손가락으로 귀 주변을 뱅뱅 돌린다. 선생님께는 말하지 않았다. 뭐라고 하면 그때 말하지 뭐. 뒷말이나 주절대던, 옆에 앉던 여자애는 혼자 앉든지 말든지.
그렇게 책상 정리를 마치고 초조한 마음 꾹꾹 눌러앉았는데 그 애가 교실 앞문에 서 있다. 좁은 골목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순간처럼 예쁘게 놀란 눈을 하고. 다만 다른 것은 등 돌려 달아나지 않았다는 것, 작은 미소를 얼굴에 올리고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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