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양 Dec 19. 2024

일더위


가만히 눈을 감으면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저 멀리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진다. 열기가 파고들며 온몸을 감싸고, 세상의 모든 흔적들은 모두 흩어진다. 일더위가 그렇게 찾아오면 사람들은 일상을 버리고, 숨을 쉴 틈도 없이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조금은 무력하고,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때 나는 깊은 숨을 고른다. 내가 그 더위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그저 그 열기와 나란히 있는 것이다. 마치 뜨겁게 달군 철을 손에 쥐고, 그 순간을 그대로 느껴야만 하는 것처럼.


대개 그 날씨가 사람을 태운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때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태양이 세상 끝에서 내려오듯 짙어진 고요와 함께, 모든 것이 멈추는 듯한 시간이 펼쳐진다. 그 순간, 시간은 더 이상 시계를 쫓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것은 순간의 열기뿐, 그 외의 모든 것은 그냥 흘러가듯 잊혀진다. 나는 그저 흐르는 시간 속에 몸을 맡기고, 그늘 속에서 세상의 소리들을 멀리서 듣는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마음 속에서 폭풍처럼 일어난다. 다가올 모든 일들이 이제는 조금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그 고요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난다. 내 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고 있다. 그 말은 언제나 일더위처럼 뜨겁고, 그러나 부드럽게 내게 다가온다.


여름의 끝자락, 더위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비치는 작은 기억들이 있다. 오래된 냄새, 고요한 풍경, 그리고 한여름의 잔상처럼 떠오르는 얼굴들. 그 얼굴들은 이제 다시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은 어떤 빛을 품고 있었을까. 그 눈빛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찾으려 했고, 그 찾은 것들은 다가올 다른 계절을 기다리게 했다. 그 사람들과의 대화, 손끝에 닿은 순간의 떨림, 한여름의 어지러운 기운 속에서 나는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 속에서 피어오르던 감정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모든 것이, 너무 뜨겁고, 너무 간절해서, 결국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것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시절의 나와 그 사람들은 그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갔고, 나는 그 자리에 남아, 그때의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일더위는 마치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상처처럼 남는다. 그 더위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아무리 달래도 지워지지 않는 여운이다. 더위가 물러가면, 바람은 잠시 상쾌하게 불어오지만, 그 자리에 남은 건 그 잔상이 전해주는 뜨거운 감각뿐이다. 결국 우리는 그 여운 속에서 또 다른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지나간 날들의 흔적을 쥔 채 나아가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더위 속에서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일더위는 그 자체로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지나간 시간이 만든 길 위에 남아있고, 우리는 그 길을 다시 걸어가야만 한다. 그 길은 내가 이미 지나왔지만, 또 다시 내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 여름의 끝자락에서, 나는 그리운 것들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나는 그 순간들이 지나온 흔적을 따라가며, 다시 한 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묻게 된다. 지나간 것들이 결국 나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일더위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일더위 속에서 살아가는 일상도 다시 평범해져 간다. 결국,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그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과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의 얼굴, 그들의 눈빛, 그들이 나에게 남긴 말들이 다시 떠오를 때마다, 나는 그 여름의 더위를 다시 한번 느낀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 여름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