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어라, 울지 마 괜찮아

9화 가엾어라, 울지 마 괜찮아

by 태연



고무대야에 뜨거운 물이 차오를 때마다, 나는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희뿌연 김이 부엌 한구석을 메우고, 뺨에 닿은 열기가 천천히 내 안을 적실 때 나는 어느새, 아주 어린 내가 되어 있었다. 작은 손으로 팬티를 움켜쥔 채, 부엌 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그 아이.


몸은 떨렸고, 마음은 더 떨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이었는지, 두려움이었는지,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그날의 나는 그렇게,

물결이 이는 고무대야 속에 나를 담고 있었다.




말할 수 없던 비밀

그날의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바지에 응가를 쌌다는, 너무나 사소하지만 너무나 커다란 비밀.

그 비밀을 들킬까 봐, 혼날까 봐, 들키면 사랑을 잃을까 봐 나는 팬티를 꼭 쥔 채, 울지도 못하고,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그보다 더 무서웠던 건, 엄마 아빠 없이 낯선 집에 남겨졌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시골집에 맡겨졌고, 낯선 화장실, 낯선 어른들, 낯선 공기 속에서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왔다. 어린아이에게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엄마 아빠가 왜 나를 이곳에 두고 갔는지, 언제 다시 데리러 올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다.


하지만 큰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말없이 내 옷을 벗기고, 말없이 따뜻한 물을 퍼부어주셨다. 그 손길은 분명 따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너무 무서웠으니까. 그저, 무서웠다. 그게 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엄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셨을 것이다. 이 꼬맹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저 실용적인 돌봄으로 상황을 해결하려 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였다. "괜찮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무서워하지 마라"는 위로의 말이었다.



감정을 다룰 줄 모르는 아이

나는 아직 감정을 다룰 줄 모르는 아이였다.

그 작은 몸에 겁과 불안이 가득 찬 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멈춰 있는 아이.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도, 도움을 요청할 방법도 모르는 아이.


그때의 감정은, 그때의 두려움은,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내 안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아이는 여전히 그 고무대야 앞에서 떨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때때로 그 아이처럼 행동했다. 실수를 했을 때 과도하게 부끄러워하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어려워하거나,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들. 모두 그때 그 아이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상담 속에서 만난 아이

상담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 떠오른 장면이 바로 그것이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아니었다. 내 안에 늘 있었고, 늘 나를 지켜보던 기억이었다. 다만 나는 그 아이를 어떻게 해줘야 될지 몰랐을 뿐이다.


“어쩌다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그때 그 감정을, 혼자 어떻게 견뎠을까요?”


상담사 선생님의 조용한 물음이, 기억의 문을 열었다. 그때서야 나는 처음으로 그 아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언니와 함께 이유도 모른 채 맡겨졌던 시골집, 무섭고 익숙지 않은 푸세식 화장실, 엄마 아빠가 곁에 없다는 막막함과 불안,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하고 실수해 버린 그 아이.



아이에게 건네는 말

나는 그 아이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날, 아무도 그 아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 게 너무 가슴이 아팠다.

아무도 그 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가엾어라. 울지 마, 괜찮아.
정말 괜찮아.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 말을 하는 순간, 목이 메어왔다. 내가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얼마나 무서웠니. 이젠 괜찮아. 이제는 내가 너를 지켜줄게."참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때 울지 못했던 아이가 지금의 내 품 안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은 말이 되었고, 감정이 되었고, 용서가 되었다.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모두 눈물과 함께 흘러나갔다.


내 안에 갇혀 있던 그 아이는 그 울음 끝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사랑받아도 된다는 것을, 실수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평생 찾고 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 그 아이를 위로하고 품어주는 것, 그것이 나를 치유하는 길이었다.




모든 사람 안의 아이

우리는 누구나, 마음 어딘가에 작고 상처받은 아이를 하나씩 품고 산다.

그 아이는 울음을 참고, 말을 삼키고, 사랑받고 싶어 작은 가슴을 잔뜩 졸이며 살아간다.
그 아이는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무서워한다.


하지만 그 아이는, 이제 당신이 돌봐주어야 할 존재다. 이젠 어른이 된 내가, 그 꼬마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이해다. 질책이 아니라 위로다. 외면이 아니라 포용이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가엾어라. 울지 마. 네 잘못 아니야.”


그 한마디가, 그 오래된 울음을 다정히 품고 흘려보낸다.

그 한마디가 상처를 치유하고, 두려움을 녹이고, 사랑을 되찾게 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달라졌다. 실수를 해도 스스로를 너무 혹독하게 대하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조금씩 편해졌다.

무엇보다 내 안의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비하인드 스토리]

얼마 전, 엄마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와 크게 다투신 후, 아빠가 나와 언니를 시골 할머니집에 맡겼다고 했다.

엄마는 그때 우리를 떠나보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며칠 뒤 우리를 데리러 왔을 때 돌부리에 찍혀 상처투성이가 된 내 발을 보고 눈물을 참지 못하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엄마도 그때 무척 아프셨다는 것을.
나를 놓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그 시간은, 나만 괴로웠던 게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끝내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혹시라도, 엄마의 마음이 다시 아플까 봐.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감정들이 내 안에도, 엄마 안에도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그 기억을 함께 바라볼 수 있게 된 지금,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더 이상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날의 아이는, 더는 외롭지 않다.




내 안의 아이를 만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만남을 통해 나는 진정한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제 그 아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함께 성장하고, 함께 치유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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