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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엽시계 Jul 29. 2022

또라이가 세상을 바꾼다.

바르게 살자

정말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한 사람이 있다.

얼마나 자기 주관이 뚜렷한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요지부동이다.

원리원칙만을 내세우며 어떠한 변칙도 허용하지 않는다.

차라리 벽을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주위에 그러한 친구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융통성이라고는 일도 찾아볼 수 없는 친구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해줘도 그 친구는 정을 맞는 일이 있어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높으신 분을 알고 있다면 “이 녀석 좀 경찰로 특별 채용해주세요.”라고 청탁을 하고 싶을 정도다.


분명 나와 같은 편인데 내 편을 들지 않고 나를 나무라기도 한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자기 할 말을 거침없이 하기도 한다.     

다른 친구들도 그가 옳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의 솔직함은 의도치 않게 다른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도 한다.

그래서인가 몇 명 있지도 않은 친구들조차 하나둘 그의 곁에서 멀어진다.

세상은 둥글게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 또한 알지만, 그에게 세상을 둥글게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법을 충실히 지킨다.

대충 넘어가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없는데 대충 넘기지 않는다.

절대 봐주지 않는 그의 올곧은 성격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을 지적당하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말한다.

“아니! 뭐 저런 또라이 같은 녀석이 다 있어?”


다른 이와 타협하지 못하고 원리원칙만 고집하고 자신의 행동을 초일관 지키는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또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런 사람이 많아야 좋은 세상이 온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편법, 불법, 부모 찬스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반칙을 일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반칙을 일삼는 자들을 욕하면서도 내 주위에 원칙을 지키며 어떠한 부당한 관행도 거부하는 사람을 또라이라고 부르다니 어찌 보면 해괴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불법적 행위에 원칙대로 행동하는 것은 정의의 용사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조그만 실수에 융통성 없이 대하는 것은 답답한 사람이다.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는데 냉정하게 자르는 그의 행동에 서운함이 든다.     

“내가 너하고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게 바로 그가 또라이가 된 이유다.     




지금은 대세 배우 중 한 명인 “정재영”배우가 주연한 영화 “바르게 살자”


지방의 한 마을 원리원칙만을 따지고 융통성이라고는 1도 없는 순경 “정도만”

새로이 부임한 자신의 최고 상관인 신임 경찰서장한테도 가차 없이 교통단속 딱지를 발부해 미움을 산다.

서장은 세간의 이목을 받고자 생방송으로 방송할 모의 은행 강도 훈련을 하고 정도만에게 강도 배역을 맡긴다.


적당히 방송의 관심을 끌다 체포되라고 했지만 정도만은 끝까지 강도 역을 충실히 해나간다. 결국 그는 은행을 터는 을 성공하고 서장은 비록 곤경에 빠지지만 그의 진심을 알게 된다.


서장은 정도만이 강력계 근무 시 현직 도지사의 비리를 파헤치다 미운털이 박혀 교통계로 전출된 사실을 알게 되고 훈련이 끝난 후 그를 강력계로 복귀시킨다.     


주인공 정도만은 영화 속에서 원칙만을 고수하고 상관도 잘 못하면 절대 봐주지 않는 또라이 경찰이다.

하지만 그 또라이 경찰의 원칙을 지키는 행동은 출세를 위해 현실을 택해왔던 서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꾼 이들은 대개가 또라이였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민주화를 외치던 대학생들을 욕하곤 했다.

최루가스를 맡아가며 구호를 외치던 그들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또라이로 보였다.

“학생들이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웬 데모질이야?”

“먹고살기도 바쁜데 뭐 저런 정신 나간 놈들이 있어”라는 소리는 덤이었다.     


그 정신 나간 놈들, 그 시대의 또라이들의 희생과 죽음은 셀 수도 없이 많은 대중을 동지로 만들었다.

그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는 성취되었고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국가가 된 계기가 되었다.     


80년대뿐 아니라 과거를 회상해보아도 역사를 바꾼 건 늘 또라이들이었다.

그냥 시대에 편승하고 제 한 몸 편하게 보전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에게 시대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융통성 없이 정의를 지키려 한 시대의 또라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원리원칙을 고수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이들이 세상에 많아지기를 고대하면서도 정작 그런 이들을 또라이로 부르는 것은 나의 잘못을 봐주지 않고 나한테 조차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는 그에게 서운해 그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 내가 또라이라고 놀리고 불렀던 사람들은 조금 답답한 사고를 가졌지만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하기사 나쁜 짓 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원리원칙을 지킬리는 없겠지.       

        

나에게도 융통성 없이 대해 그에게 서운함을 느낀다고 해도 그런 정의로운 또라이들이 넘쳐 났으면 좋겠다.    


정의로운 또라이들이 넘치는 세상이 천재적인 사기꾼들이 판치는 세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지 않은가.     


내가 그를 또라이라고 불렀던 것은 어찌 보면 내가 정의롭지 못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 살아와서 그럴 수도 있다.


내가 알고 있던 아니면 지금 나의 주위에 나를 서운하게 했을 정의로운 또라이를 찾아가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며 말해주고 싶다.

“언제나 나의 곁에 정의로운 또라이로 남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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