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엽시계 Aug 19. 2022

상상에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베끼셨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TV 예능프로그램을 시청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아련하다.

과거에는 재미있고 풍자가 넘치는 프로그램들이 많았지만 지금의 예능은 말초적인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해서 잘 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예능프로를 잘 안 보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모든 예능 프로그램들의 내용이 똑같다는 것이다.

한 방송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 다른 방송국에서 비슷한 내용의 프로그램이 방송된다.

비슷한 정도가 아니다. 완전 Ctrl+C , Ctrl+V다.

눈을 씻고 봐도 다른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몇 해전 한 종합편성 채널에서 트로트 가수 선발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해당 프로그램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이후 거의 모든 방송국에서 트로트 가수 선발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너도나도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송하니 해당 프로그램이 어느 방송국 것인지, 어떤 프로그램이 원조인지 알 수  정도다.


그렇게 똑같이 베껴서 제작하면 양심이 찔리지도 않는가?

남의 것을 베껴서 제작했지만 그건 자신이 창안한 2차 창작물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인가?

원조 프로그램 방송국에서 왜 우리 것을 베꼈냐고 따지면 기껏 한다는 변명이 “겉으로 보면 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있다”라고 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너네도 예전에 우리 것을 베끼지 않았냐”라고 되려 따지기도 한다.     


모든 방송국에는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시사 프로그램 있다.

시사프로그램에서 자주 고발되는 사건 중에 대표적인 이 “표절”이다.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의 논문 표절은 이제 일상이다.

가수들의 노래 중에 외국 것을 베낀 표절곡도 상당수다.


기자들은 그들에게 왜 남의 것을 베꼈냐고 마이크를 들이댄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그들, 베낀 것도 아니고 표절도 아니라고 우겨댄다.

베낀 것이 아니라 참고한 것이라고 한다.

똑같은 내용의 다른 창작물이 존재하는 걸 몰랐다고 하기도 한다.

그럼 알았으면 안 베끼려고 했어? 뻥 치시네!


시사프로그램은 그들의 거짓을 고발하고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그런 행태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정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고 계시네.


당신들이 남의 방송 베끼는 것은 순수하고 사람들이 남의 것을 베끼는 건 심판받아야 한다고?

당신들이 고발한 기준 그대로 당신이 제작한 프로그램에 대한 고발은 왜 못하시는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정치인들의 “내로남불”을 신봉이라도 하시는가?

제발 성공한 다른 프로그램 베껴서 근근이 연명할 생각 말고 창의성 좀 발휘하시라.      




서로 베끼고 표절을 일삼는 사람들을 보면 생각나는 영화가 하나 있다.

소설가 안정효의 동명 소설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헐리우드 영화 마니아인 고등학생 친구 사이인 병석과 명길.

병석과 명길은 항상 헐리우드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각자가 느낀 영화가 주는 의미를 토론하며 장차 영화 제작자가 될 꿈을 꾼다.

헐리우드의 모든 영화를 섭렵한 것 같은 해박한 영화 지식을 가진 병석은 명길에게 부러움을 넘어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면서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둘은 헤어지고 병석은 미국으로 영화 공부를 떠나게 된다.     


세월이 흘러 명길은 영화감독이 되고 병석의 소식을 알게 되어 그를 찾아간다.

명길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병석으로부터 영화 시나리오를 받는다

제목은 “가면고 (假面考)” 참신한 시나리오에 반한 명길은 영화를 제작하고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둬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명길은 병석의 대본이 헐리우드의 여러 명화를 교묘하게 짜깁기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고 병석에게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묻는다.

병석은 베끼기인정하 명길에게 말한다.

“난 널 속인 게 아니야!
나도 내 자신한테 속은 거야.
모든 게 내 장착인 줄 알았어”

그리고 병석은 자신의 영화 시나리오 마지막 내용과 똑같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남의 것을 표절한 것을 넘어 베끼기 한 것이지만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 살아온 병석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이 바로 영화 자체였기 때문에 자신의 창작물이라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병석은 자신의 모든 것이 가짜임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병석의 작품 가면고 (假面考), 글자 풀이를 하면 “거짓에 관한 생각”..

병석은 자신의 작품 속 내용이 어쩌면 가짜일 수 있다는 것을  제목을 통해 고백한 것은 아닐?    

 

세상에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것이 진짜라고 떠들어 대는 수많은 병석이 있다.

남의 것을 표절하고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너무 많다.

타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베껴 놓고도 당당하다.

자신의 표절을 고백하고 반성하는 사람들은 양반이다.

오히려 상대가 내 것을 베낀 것이라고 항변을 하는 뻔뻔한 이들도 있다.      




내가 창작한 작품이 다른 사람이 이미 만들어 놓은 작품과 비슷하거나 똑같아 보일 수는 있다.

지구상에 인구가 수 십억 명인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밖에 없을라고?

어떠한 사안에 대해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누가 봐도 똑같은 작품을 각자 만들어 내기도 한다.

분명 내가 먼저 발명해냈는데 특허가 늦어 내 발명품이 아류가 돼버리는 경우도 많다.     


기존에 없던 작품이어야 진정한 창작물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의 것과 비슷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해당 작품은 누군가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고 고백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병석은 자신이 영화에 속았지만 적어도 의도적으로 남을 속이지도 않았고 표절을 인정했다.

아직도 표절을 고백하지 않는 당신은 지금 속으로 대중한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난 널 속인 게 아니야!
네가 나한테 속은 거야.
모두가 내 장착물로 알 줄 알았어”


이전 03화 분노조절 장애 현상에 대한 보고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