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1년 뒤, 퇴사하다
직장생활 11년을 ‘과도한 열정’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정의할 수 있다.
나는 인정욕에 목말라했다.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는 것처럼 직장생활을 했다. 대표에게는 좋은 직원이었을지 모르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꽤나 피곤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한 직장을 진득하니 오래 다는 건 아니었다. 뜨겁게 4-5년 사랑하고 헤어지는 연인처럼 그렇게 직장생활을 했다. 성장에 침체기를 느낄 때 즈음 좋은 조건으로 제안이 왔고, 나는 서슴지 않게 이직 준비를 해 떠나지 않을 것처럼 일하던 공간을 떠났다. 용병처럼.
직장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타인의 질투와 오해였다. 동료, 선배보다 늘 앞서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주말에도 회사에서 일했다. 적당히 눈치를 보고 행동하지 않았다. 몰라서는 아니었다. 알기에 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은 하고, 하고 싶은 말은 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얼마나 형편없는 직장생활을 했나 싶다.
그러나 이런 직장생활보다 더 최악의 태도는 ‘교만’이었다.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일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타이틀이 있다. 그 타이틀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운 좋게 얻은 것인데 마치 내가 만들어온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꼰대스럽지만, 내가 모셔야 할 상사의 수는 적어지고 나에게 관리를 받는 직원들이 늘어났다. 기능적으로 일을 잘하면서도, 관리자로서의 역량도 키워야 하는 시간이 온다. 나는 K 장녀와 16년 학교에서 리더 역할을 수행했던 자답게 회사에서 관리자 역할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의 불만과 어려움을 잘 들어주고, 도움을 주는 관리자가 되는 것이다. 제일 좋은 리더는 똑똑하지만 게으른 사람이다. 내가 나서지 않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회사가 원하는 방향에 맞게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보상받게 하면 되는 것이라는 개똥철학마저 갖게 되었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던 중, 전례 없이 대표와의 마찰을 경험하게 된다. 회사 생활에서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고, 위치가 다르기에 ‘오해’를 하기 마련이다. 오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최악의 오해는 ‘의도’를 오해하는 것이다.
모두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의 방식과 결과에 아쉬움과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의도가 아닌 방식과 결과에 대해 오해하고 이를 풀어가는 것이 직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트러블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도’를 의심받기 시작하고 이를 해명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상황은 더 꼬이게 된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리게 된다. 단순 오해를 푸는 과정이 아닌,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받는 되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마지막 회사는 ‘나의 의도’가 왜곡되고, 그 오해를 풀 수 없어 회사를 나왔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을 다해 회사의 성장을 위해 밤낮 노력했지? 하는 허탈함과 공허함이 일순간 몰려왔다. 마지막에는 합류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은 인사팀 팀장의 무례한 요구에 소송까지 생각했다.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녹음된 파일을 가지고 있다. 녹음하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허무했다.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1년 직장생활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타인의 탓을 했다. 그러나 짧지 않은 시간 끝에 결론은, 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에서 '비밀유지 서약서'에 서명을 하라고 이야기한다면, 절대 쉽게 서명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받은 비밀유지 서약서에는 동종업계에서 3년 간 일하지 않는 것과 회사에서 만난 인연들과 만나거나 교류하지 않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물론, 이 서약서가 적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공동대표이거나 회사의 중책으로 기밀사항을 아는 경우다. 나는 퇴사 직전에 중책에서 직원으로 위치가 강등된 상태였고, 서약서를 작성하는 사람에게는 회사 지분 %에 따라 돈을 받고 그 서약을 하는 것이다.
일반 직원에게 비밀유지 서약서의 서명은 강제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다. 회사 퇴직 후 1~2년 안에 동종 업계 이직하면 안 된다거나, 비밀유지 서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을 때 불이익을 행사받는다 등 취직, 이직 등 대한민국 헌법 15조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해당된다.
만약 이 부분을 모르고 비밀유지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직이나 동종업계 취직 후 전 회사에 피해를 끼친 것이 없다면, 서약서는 원칙적으로 무효다. 어떠한 계약도 헌법에 우선하지 않는다. (해당 내용은 부모님이 아는 변호사와 노무사와 만나 들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