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베트남
올해 팔순을 맞이한 시아버님과 네 살 어린 시어머님은 학교에서 공공근로를 하신다. 올 겨울에 눈이 잦아 밖에 잘 못 나가시는 시부모님께는 두 달간의 겨울방학이 유난히 길다. 둘째 밤이 생일선물로 새를 사러 동대문에 가면서, 집에만 계실 시부모님께 함께 가자고 청하였다. 대학 동창회에 가신 아버님은 동대문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우리 가족은 어머님과 함께 차로 이동하였다.
여전히 맑고 고운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어머님 이야기에, 내가 "그래요?" "정말요?"만 해도 어머님께서는 신이 나셔서 이야기가 길어진다. 시어머님을 많이 닮은 둘째 밤의 목청이 왕방울 소리라면, 어머님은 꾀꼬리시다. 귀를 쫑긋하며 듣던 나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애리야, 너 그런 얘기 들어봤니? 아빠가 머리가 자꾸 벗겨지니까 머리 많이 나라고 탈모샴푸로 하루에 수십 번 머리를 감는단다. 그 얘기가 진짜 맞어?"
"네에?!"
저번에 뵈었을 때, 전립선 염증으로 약을 지어먹었더니 머리카락이 많이 난다며 엄청 흐뭇해하셨던 아버님 웃는 얼굴이 스친다. 그때는 전립선 쪽이라 내가 큰 대꾸를 못하고 "앗! 그래요?"만 하고 왔더랬다. 집에 돌아와서야 인터넷으로 사실 여부를 서치 한 적이 있는데(전립선 비대증 약의 부작용으로 사실이었다.), 오늘은 또 반대의 말씀을 하신다.
남편의 이야기 속에 아버님은 무섭고 불같은 분이시다. 그러나 내게 아버님은 여러 면으로 조금 화가 많은 데다, 엉뚱하고 웃기셔서 내 작품 속에 캐릭터로 등장할 때가 많았다. 런닝 셔츠 하나만 입고, 오토바이로 배달을 가시던 모습이나, 가족이 다 있는 좁은 방 안에서 런닝 셔츠에 칠부 지지미 잠옷을 입으시고 맨손 체조를 하시던 모습은 아직도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재산 문제로 고모님들과 싸우다가 경찰까지 부른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하실 땐, 내가 습작하는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막장 드라마를 연상케 해서 좌절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타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버님과 내가 보는 아버님은 코믹스러운 데가 있긴 한데, 실상 대화를 나누면 사람을 약 오르게 하는 약간의 재주가 있으셨다. 궁시렁 궁시렁 쫑알대며 말이 많았던 어느 날이었던가. "애리, 많이 컸구나" 하셔서 내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만드셨다. 집에 와서는 '애 둘 낳고 사는데, 그럼 여전히 20대 막내며느리인 줄 아셨어요?'라고 말 못 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시댁에 가면 남편도 어머님도 나를 아버님 앞에 앉혀 놓고는, 다른 집안일을 하지 못하게 하신다. 덕분에 워낙 아버님과 격의 없이 지내다 보니, 내가 가면 아버님도 온갖 말씀을 다 하시고 나도 기다 아니다 참견하며 아버님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아마 그럴 때, 아버님께서 퉁치신 말씀이셨을 것이다.
그러나 또 어느 날에는 형님과 비교를 하시며 형님은 금전적으로 많이 도와주어야 한단다. 그래서 나는 "그럼 저는요?"라고까지 받아쳤더니, "너를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어. 봉사를 많이 하다 보면, 다 너한테 덕이 있을 거야"라고 말씀하셔서 또 내 입을 막으셨다.
남편과 나 사이에는 <톰과 제리>를 연상케 할 일이 많은데,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어서 그렇다. 그런데 우리 시아버님과 나 사이도 그렇다. 어머님과는 한 때 소울메이트였다면, 아버님과는 애증의 관계랄까. 서로 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아버님을 가장 많이 이해하는 사람도 물론, 나다. 왜냐하면 내가 우리 시아버님 성격을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시아버님과 나는) 늘 아웅다웅이다. 아직 아버님을 대적하기엔 덜 살았지만, 나도 아버님과 쌍벽을 이룰 날을 꿈꾸며 18년째 수련 중이다.
언젠가 아버님 생신 선물로 무얼 해드릴지 여쭸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말씀이 없으시다가, 나중에 어머님을 통해 아버님이 갖고 싶은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전동 킥보드'였다. "네에?!" 전동 스쿠터도 아닌, 전동 킥보드라니?!
아버님께 여쭤보니, 수줍게 맞다고 하신다. 남편과 나는 말을 맞춘 듯, 심각한 얼굴로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웃어넘기며 농담이시냐고 묻기엔 너무나 진지한 모습인 데다, 몰래 갑자기 사셔서 타고 다니실까 봐 더럭 겁이 났던 것이다. 아들 내외가 너무 격하게 반응을 했던 탓일까. 아버님 어깻죽지가 갑자기 내려간다. 몸무게 62킬로를 유지하려고 격하게 운동하시다 탈장까지 한 탓에, 아버님의 마른 옆모습이 더 측은해 보였다.
왜 그게 갑자기 타고 싶으셨을까. 아버님은 당뇨를 오래 앓으셨다. 자기 관리가 철저해서 그나마 약으로 오랫동안 별 탈 없이 유지를 할 수 있었는데, 대신 망막의 중심부인 황반이 변성돼 빛을 보는 기능이 소실되는 황반변성을 얻었다. 그래도 워낙 서울에서 오래 사신 분이라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공공근로를 가시고, 약속을 잡아 서울 온 거리를 별 어려움 없이 잘 다니셨다. 비록 점점 눈이 안 보이셔서 작은 방에 제일 큰 티브이를 놓게 되고, 버스를 탈 때 행인에게 버스 번호를 확인하고, 어머님을 대동해 모래내에서 원당까지 버스와 전철을 타고 할아버님 산소에 벌초를 가시기는 했지만.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아버님은 동네에서 한 대뿐인 차를 운전해서 동대문에 원단 장사를 하러 다니셨단다. 그 장사가 망하고 아현시장에서 경동시장을 다니며 공판장 물건을 사고팔며 스쿠터로 배달하는 일을 하셨단다. 더 이상 이웃 점포상과 싸울 여력이 없자, 장사를 접으시고는 아직 쓸만한 두 다리로 700번대 버스와 마포 06 마을버스 높은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다니셨더랬다.
그런데 이제는 버스 탈 일이 점점 줄어들고 매일 홍제천을 걷는 게 일이신데, 그곳에 힙하고 어린 친구들이 타는 전동 킥보드를 보신 것이다. 저 킥보드라면, 큰 무리 없이 어디든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셨단다. 홍제천 강바람을 맞으며 매일 안산을 오르는 일을 상상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아내의 눈과 입을 더 이상 빌리지 않아도 되고, 치사하게 아들들의 차에 기대지 않아도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상이, 저 전동 킥보드 한 대라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뒤로 난 무슨 선물이 갖고 싶으신지 더 이상 여쭤보지 않는다. 대신, 나는 해드리고 싶은 것을 혼자서 상상하고는 한다. 다시 성당에 나가고 싶다시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성당을 다니는 일, 매일 안부 전화를 드려 아버님의 블랙유머와 사소하고 소중한 어머님의 하소연을 듣는 일, 더 눈이 멀기 전에 베트남에 여행 가는 일 같은.
올해 아버님 팔순 선물은 이중에 가장 쉬운 일인 베트남 가족 여행으로 낙점했다.
동대문 청평화 건물 옆에 온갖 종들을 파는 가게 앞에서, 동창생들과 남산 둘레길까지 걷고 오신다는 아버님을 기다렸다. 벌써 둘째는 알록달록한 파인애플 코뉴어를 고르고, 어머님도 얼마 전에 죽은 십자매 짝꿍으로 앙증맞은 십자매 암컷을 골라놓으셨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돼 흥미를 잃고 멀찌감치 서있던 나는, 멀리서 걸어오시는 아버님을 발견하였다. 계속 바라보며 기다리는데, 아버님은 도통 가까워지지 않는다. 오가는 사람들 속에 파묻힌 아버님을 찾으러 나는 아버님 쪽으로 빠르게 걸어간다. 아래위로 검정 색 옷을 입고, 흰 머리카락도 몇 가닥 없는 머리에 검은 모자를 걸쳐 쓴 아버님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 보면 좁은 보폭으로 열심히 걸어오신다. 나는 빠르게 뛰어가 아버님 앞에 섰다. 그러나 막상 아버님은 날 보지 못하고 우리가 있을 즈음인 허공을 주시하며, 계속 전진하신다.
"아버님!"
나는 아버님 왼팔에 팔짱을 끼며 부러 반갑게 부른다. 오오. 아버님도 어색하게 웃으시며 내게 팔 한쪽을 맡기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내가 오늘 2만 5 천보나 걸었어. 아버님 그렇게 무리하시면 안 돼요. 하면서 아버님을 살짝 앞으로 끌었다. 해거름이 다 되어, 그렇게 우리는 가까운 식당까지 걸어간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식당을 찾으려고 모두 우리를 앞질러 걷는다. 보통 걸음으로는 가까운 데였을 지언정, 그날 그 가게는 참 멀게 느껴졌다.
아버님과 함께 걷던 중에 첫째가 갑자기 삐져서는 사라졌다. 자꾸 숨는 아이를 찾느라 아버님을 잠시 벗어났던 나는, 아버님이 보도블록 턱에서 내려오다 거꾸러질 뻔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큰 아이를 데려오기를 접고 아버님 뒤를 밟는데 여러 생각이 든다. 아버님은 초집중해서 겨우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큰 아이만큼 위태로워 보인다. 갑자기 이런 콩가루 집안과 베트남에 가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든다. 아들의 보폭에 맞추어 부지런히 걷던 어머님도 둘째와 회전 초밥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뒤처진 우리는 언제 가게로 들어갈 수 있을까 우울해진다. 비행기는 탈 수 있을까. 그래도 남산을 걸으셨는데. 아버님은 어찌 걸으셨을까. 떨쳐지지 않는 상념이 어둠 속에 잠긴다. 제주도나 갈까. 베트남에 가고 싶은데. 왼발오른발왼발오른발. 뒤에서 아버님 두 다리를 눈으로 좇으며 저벅저벅 걷는다.
희끗한 보도블록 위를 걷는데 불현듯, 노란 길이 튀어 오른다. 저 노란 블록이라면!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아버님 옆에 선다.
" 아버님, 저 노란 길 보이시죠. 저 노란색만 보고 걸으세요. 저 노란 블록이 잘 안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거래요. 노란 블록은 높은 턱까지 안 이어지고, 길바닥으로 이어져요. "
노란 블록 위로 올라서시는 아버님을 옆에서 보조하며 함께, 천천히 걷는다. 갑자기 약자를 위한 정책의 소중함을 느끼며 무사히 회전초밥 가게로 들어왔다. 큰 아이는 여전히 어디에 있는지 오리무중이지만.
내 옆에 계신 아버님은 초밥 접시를 내리다 계속 떨어뜨리신다. 밥 위에 회도 다 떨어뜨리며 초밥에 밥만 드신다. 나는 보라색 제일 비싼 접시에 담긴 장어 초밥, 연어 초밥, 어느 뱃살이 올라간 초밥을 가까이 가져다 드린다. 쑥스러워하며 잘 드시던 아버님이 갑자기 겨울철인데 방어 초밥도 안 나오고 별로라고 말씀하시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저 홍홍홍 웃으신다. 여전히 들어오지 않는 큰 아이를 보고도 요새 청소년은 건드리면 안 된다며, 내가 고생이 많다고 하신다. 그렇게 싸고돌더니 잘한다, 라떼는 하고 한 방 날려주실 줄 알았는데 그저 밥과 함께 속으로 삼키시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본격적으로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님은 나의 걱정과 달리, 베트남도 제주도도 아닌, 일본에 가고 싶다고 하신다. 아니, 일본에 가면 계속 걸어야 하고 관광을 해야 하는데 잘 안 보이시고 잘 못 걷는 아버님은 베트남도 안 될 것 같은데 웬 일본?! 우리 둘째의 말을 빌리자면, 나 빼고 다 가 본 베트남에 가면 좋을 텐데. 가서 팡팡 먹고 펑펑 쓰며 쉬다 오면 피로가 딱 풀리실 텐데. 나는 베트남으로 우기고, 어머님은 눈치만 살피시고, 남편과 아버님과 아이들은 짠 듯이 일본으로 가고 싶단다. 이런, 아버님 팔순을 핑계로 사심 한 번 채울랬더니. 아무래도 수적으로 밀리니 할 수 없다.
"그러면 다섯 분이서 일본 가시고. 전 중국에 가면 좋을 것 같은데."
별생각 없이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어머님이 제주도로 가자고 하시더니, 남편도 덩달아 제주가 차라리 낫단다. 뭐가 도대체 나은지 모르겠지만 생각지 못한 제주로 다시 몰린다. 아버님도 나 없는 일본은 접고 억지로 제주도로 가시겠단다. 대신, 항공권은 대한항공으로.
그렇게 삼천포로 빠진 팔순 여행은 베트남 아니고 제주로 확정되었다. 나이가 들면 움직일 수 있는 선택지가 점점 줄어든다. 돈, 시간, 건강이 한 번에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가까스로 뜻이 모였을 때, 노란 길을 찾으며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한다. 비록 전동 킥보드 대신 두 다리에 의지해야 하지만. 때때로 자식의 기대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베트남 대신 일본도 아닌, 예기치 않은 제주로 향하지만. 대신에 우리는 대한항공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