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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가족

mbti 한 자도 안 겹치는 우리는

by 이애리 Mar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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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장 문을 열었다. 봄에 어울릴 운동화를 찾다가 결국, 판도라의 상자에 손을 대고 말았다. 현관에 여태 나와있지만 신지 않는 둘째 털신을 넣는다. 내년에도 신으려면 발이 그만 커야 할 텐데. 첫째 딸 신으라고 샀다가 발이 커버려 택도 안 뜯은 운동화를 꺼낸다. 둘째 치수도 지나버렸다. 지금 당장 뭔가 할 수 없으니 우선은 그것을 다시 집어넣는다. 결혼식 때 신은 꽃신과 남편 군화는 영원히 간직할 양으로 더 깊숙이 집어넣는다.

 그러다 우후죽순 구겨 넣어진 여자 셋 신발들 아래에는 어김없이 남편의 신발이 깔려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완벽주의자인 남편은 아무리 치우고 정리해도 원상복귀(?!)되는 신발장 포함한 집을 이제는 어느 정도 내려놓은 듯하다. 거실에 놓인 가로 2m, 세로 78cm 책상 위에 물건을 한가득 올려놓고 무질서 속에 질서를 찾아 쓰길 좋아하는 나와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남편은 20년 가까이 나와 살고 있다. 게다가 책상 양 옆으책탑을 쌓아 올리고 비좁은 그 사이에서 문제집을 푸는 첫째 딸과 책상에 빈틈없이 슬라임 재료로 가득한 둘째 딸 속에서 남편은 점차 정리 강박을 버리게 되었다.

 남편이 정리한답시고 모든 게 흐트러지면 제자리에(?!) 있던 질서가 사라지므로 우리는 굉장히 불쾌해진다. 다른 예로, 한 여름에 아이스커피를 마시려고 냉동실 문을 열었는데 이미 물을 꽉꽉 얼려서 통에 부어 한아름 쌓아둔 얼음을 보면 나는 남편의 지나친  그닥 달갑지가 않다. 핸드폰 무선 키보드를 쓰기만 하고 잘 충전하지 않는 를 타박하며 편은 매일 밤에 그것을 전하고 출근하시기 전에 내 가방에 넣어두기까지 한다.

 예전에는 남편의 다정한 친절이 나를 사랑하는 척도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시키지도 않은,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하는 이런 남편의 세심함이 대체로 불편하다. 왜 핸드폰과 키보드를 매일 충전하지 않는지, 왜 연필은 연필꽂이에 꽂지 않는지, 왜 현관에 신발이 종류별로 나와있는지 남편이 나를 탓하는 기분이 들어서 남편이 짐작으로 해둔 일에 나는 반감이 먼저 든다.

 물론 아내에 대한 배려로 볼 수도 있지만, 20년 가까이 살아본 아내의 의견으로, 대부분은 본인의 깔끔하고 준비돼 있어야 하는 완벽주의자 성향일 뿐. 아내를 극진히 아껴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입장에서는 불편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텐데 굳이 누군가-남편이라 할지라도 대신해주길 원치 않는다.

 를 통해 남편을 아는 지인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느냐는 둥 자칭 전생에 자기가 나한테 굉장히 잘못한 것 같다는 둥. 젖꼭지가 너처럼 생기면 남편 복이 좋다더니 넌 좋겠다며 에둘러 말씀하시는 시어머님께 이제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이미 18년 동안 내 입장을 설명하면 할수록, 기승전 내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남편과 너무나 다른 나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타인의 호감을 얻는데 가장 기본은 상대가 하는 것만 해줘도 반은 간다는 것이다. 나를 극진히 사랑한다면, 내 생일에 내가 원하는 무용한 것들-편지, 반지, 가방-을 해주면 되는데 비싸거나 시간이 없어서  혹은 진짜인 줄 몰랐다며 잊어버리기 일쑤다. 왜 본인의 기준으로 매번 실용성이 있는 시계만 해주는지. 무용한 것을 원하는 나의 취향은 꼭 잘못된 것 같다.

  남편은 마트에서 조차 내가 호불호가 없고, 취향이 없는 여자라 뭘 사다 줘야 할지 모르겠단다. 그래서 남편이 마트에서 쇼핑하기 쉽게 내 취향을 정해서 말해주어야 한다. 남편에 의하면 과자나 아이스크림 취향도 어릴 때부터 고정돼 있어야 한다. 취향이란 매일 변할 수는 없는 것인가.

 가령, 나는 오늘은 바나나킥이 먹고 싶은데, 내일은 닭다리가 먹고 싶고 어느 날은 보름달 빵에 빠졌다가, 요즘은 반달 빵이 제일 좋을 수도 있지 않나. 아이스크림도 초코 범벅인 엔쵸에 빠졌다가 어느 날은 쫀득하고 폭신한 붕어싸만코가 좋은걸.  

 생각에는 다 사 오면 중간은 갈 것이고, 언젠가는 먹을 텐데, 내 기분에 따라 오늘 취향이 달라진 것을 남편은 취향이 없는 여자라며 지정하고 폄하한다. 왜 자기 기준으로 내 취향은 평가 하향 조정되고, 내 변덕스러운 취향은 취향 없음으로 변질돼 비난받는 상황이 되는지.

그리고 취향이 없을 수도 있지.

 완벽주의자라면서 왜 매번 나의 취향은 잊어버리는지 혹은 잃어버리는 것인지. 대체 완벽이라는 기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오늘 아침 둘째가 피아노로 치는 소나티네를 들으며 남편은 첫째 딸이 아직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있냐고 묻는다. 지금 중2학년인 첫째 정이는 중학생이 되면서 피아노를 그만두고 집에서 기타를 친 지 1년이 넘었다. 순간,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나 여러 생각이 들고난다. 우리 남편, 병원부터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완벽주의자 기준으로 유용하거나 완벽하지 않은 것은 기억에서 삭제해 버리는 건가?

 관점에서 완벽주의자처럼 바보 같은 사람은 없어 보인다. 남편도 내 완벽의 기준에 있어서 기준 미달인 데다, 허술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누가 대체 완벽한 사람일까?  

 완벽이라는 실체도 없이, 완벽이라는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그를 완벽주의자에서 해방시켜주고 싶다. 완벽한 아내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해방시켜야 하는 것일까.

 

 며칠 전이다. 오랜만에 네 식구 다 모여 단란하게 저녁밥을 먹는가 했는데, 남편은 다이어트 중이라며 자리를 뜬다. 그래도 함께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 좋으련만, 갑자기 막힌 수대 하수구에 뚫어펑을 들이대고 팡팡 뚫으며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생산적인 일을 한다. 서운하지만 밥을 차려주었기에 잠자코 밥만 먹는다.

 언젠가는 혼자 저녁밥을 허겁지겁 먹는데, 남편은  먼지가 너무 많다며 청소기를 돌린다. 이 행동으로 나는 두 가지 감정에 사로잡힌다. 하나는 남편이 왜 집이 더럽냐고 나를 면박하는 듯하고, 다른 하나는 잠시라도 가만히 못 있는 남편으로 인해 나는 불안해진다. 물론, 밥맛도 뚝 떨어졌다.

 요즘에 남편은 귓구멍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설거지를 하시는데, 나를 힐끗 한 번 쳐다보며 뭔가를 물어본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나는 답할 기운이 없지만 남편을 향해 개를 외틀어 공손히 대답한다. 그새 남편은 설거지에 집중하는지, 라디오를 듣는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있다. 내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천장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외치면, 자기가 설거지 하는데 어떻게 듣냐며 웅얼대지 말고 크게 말하란다.

 지금도 잠시 영감의 신내림왔을 혼신의 힘을 발휘하며 글을 쓰는 앞에서 남편은 온통 쓰레기라며 중얼대며 청소기를 돌린다. 나는 나만을 위한 글을 쓰는데, 남편은 공동체의 안위와 질서를 위해서 청소를 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은 다정하고 정당한 것이 될까?

 자, 여러 상황에서 남이 우리를 보면, 들누워서 대답하는 나는 이기적인 아내가 되고, 설거지하며 듣지도 못할 질문을 매번 하는 남편은 좋은 남편이 된다. 물론 나는 이기적인 아내일 수 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누가 설거지 하랬냐고!

가 된다. 내가 기운이 있을 때(?!) 설거지할 테니 쉬라고 하지만, 남편은 성격상 설거지가 쌓인 꼴을 못 본다. 먼지가 쌓이고 책이 쌓인 공간을 못 본다. 그래놓고 쉬지도 못하고 혼자 일은  한 자기 없으면 어떡하냐며 공치사를 늘어놓는다. 어떻게든 다 돌아가며 살아간다고 나도 지지 않고 응수할 뿐이다. 남편이 하지 않으면 나나 아이들이 때가 되면 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그러나 나의 응수와 항변은 설거지로 헹궈지는 물과 함께 하수구로 들어갈 뿐이다.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하려고 하지만, 나도 밀린 일과 약속으로 집을 비울 때가 있다. 물론, 출장이 없는 자영업자의 비애로 평일에도 주말에도 시도 때도 없이 나는 가족과 함께하는 기분이 들어 주말에라도 가족과 잠시 떨어지면 안 될까 생각이 들지만, 남편은 내가 없는 주말에는 부녀지간에 서열이 사라지고 질서도 없어 너무 힘들단다. 지난 주말에도 남편은 아이들이 하도 버릇이 없어 혼냈단다.

 아이들도 꽤 억울하다는 듯이, 아빠가 혼자 청소하다가 갑자기 왜 맨날 나만 일 하느냐고 화를 냈단다. 그러면 같이 청소를 하자고 하든지, 묻지도 않고 아빠 혼자 청소하면서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면 어쩌냐며 내게 하소연을 한다.

 솔직히 그 자리에 없었던 나는 크게 할 말이 없다. 아이들이 얼마나 말을 안 듣고 얄미웠으면 남편이 저랬을까 싶고, 아이들도 늘 만만한 아빠가 불현듯 왜 저러는지 마른 하늘에 웬 날벼락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두 입장이 모두 이해되었지만, 특히 아이들에 격하게 공감했다. 드디어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여자들이 생겼다!

 그러나 나의 감정과는 별개로 남편이 이제라도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하면(절대 그러지도 못하겠지만), 내가 가장 불편할 것이다. 남편을 살살 구슬릴 수밖에. 아홉 개 잘하다 하나 못 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늘 하는 말이지만 권위가 있어야 한다, 먼저 청소를 하자고 공표한 후에 청소를 함께 하라고 일일이 가이드해준다. 알아들었지 모르겠다. 나의 조언을 매번 듣고 싶어 하기에 들려는 주지만, 그가 잘 지키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나는 남편이 나와 두 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하는 일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그것은 완벽하지도 않고, 사랑도 아니며, 그저 그의 성격이다. 그도 안 하면 못 배기는 자신을 위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남편은 우리가 알아서 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려줄 만큼 여유롭지가 못해서 먼저 해치우고 마는 것이다.

  나는 남편이 '너를 위해'가 아닌 '나는'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그가 하는 일이란 게 대체로 너를 너무 사랑하는 ' 나를 위해 하는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지했으면 좋겠다.

 내게 있어 '너를 위해' 하는 일은 강요당하는 기분이 들어 별로다. 그래서 나는 '도와준다'는 말도 함께 꺼림칙하다. 차라리 '돕는다'를 좋아한다. 차이지만 미묘하게 기분과 태도가 달라진다.

 다만, 누군가 모두에게 이로운 일을 할 때에는 당연히 받아들이기보다는 인지상정으로 함께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반성한다. 사실은 이 지점이 충분히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게 이로운 일을 하고도 화가 나는 이유일 것이다. 먼저 행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기운을 내게 하는 일 또한 번거롭지만 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나서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알아보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 장점을 남편에게 잘 쓰면 좋으련만.

 그 좋은 능력을 늘 싸울 때 써서 문제다. 나는 남의 기분과 상황이나 분위기를 잘 살피고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피곤할 때는 타인의 인정이나 시선에 예민하고, 피해의식에 마음이 일렁인다. 그래서 남편이 늘 나를 혼내는 듯한 피해의식에 시달렸고 자존감이 점점 낮아지게 되었다. 우리가 싸울 때면 나는 어김없이 내 권리, 도리, 의무, 감정 이런 단어를 입에 올리며 지쳐했다. 결국 싸움의 끝에는 나를 알아달라는 나의 외침만 남았다. 그것은 남편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 가장 크게 싸웠을 때가 내가 가게를 차렸을 때다. 공정에 따라 신속하고 오차 없이 순서대로 차근차근 일을 처리하는 남편과 혼자 멍하니 있다가 후다닥 한꺼번에 일을 처리하는 나는 그때 가장 많이 싸웠고, 신혼 때나 했던 이혼하자는 소리를 이 때도 한 번 더 했더랬다.

 너랑 나랑은 다른 거야.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고.

 나는 이 말을 되풀이하면서 여러 번 무너졌었다. 그때 난 피해의식에 가득 절여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편도 그때는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내가 울든 말든 나를 밀어붙이며 끊임없이 탓했다. 가게 오픈 날짜는 다가오는데, 책상 하나, 책 한 권이 없으니 그랬을 것이다. 나는 가게 말고도 당시에 하는 일이 많아 일을 순서대로 쳐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일은 벌여놓고 그 압박감에 잠을 잘 수가 없었던 날들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몰아붙이고, 남편보고는 못된 사람이라고 싸우며 나의 바닥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고, 너무나 다른 우리 부부를 대면하게 되었다. 서로를 탓하고 욕하기에만 바빴던 3년 전만 해도, 우린 체력이 좋았다.

   

 아이들이 한창 어릴 때부터 우리 부부는 집안일과 육아에 분업을 했다. 가정일에 있어 돕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랑과 함께 서로 같이 해결할 일이다.

 세상 일이 처우나 환경이 다 다르듯이, 집안일이나 육아에 있어서도 시간은 많고, 전문성과 이력이 없는 내가 더 희생을 하고 보상을 덜 받는 게 당연하다고 냉정하게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규정과 한계가 없는 일의 강도와 시간으로 나는 점점 지치게 되었다. 남편 기상시간과 퇴근 시간을 대비했을 때 나의 가정일과 육아 시간이 너무 많이 할애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일에 시간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것이 코로나19가 닥친 상황에서도 크게 작용을 했다. 이전에는 집안일 시간을 분배했다면, 이후에는 집안일을 많이 나누게 되었다. 서로 잘하는 일에 집중해서 분업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현모양처라는 세팅한 이미지를 버리고(사실 나는 이걸 버리는 데 오래 걸렸다, 믿을 수 없겠지만) 저녁 밥상을 과감히 남편에게 인계했다. 직접 멸치를 넣고 육수를 우린 된장찌개에 토마토를 꼭 넣어야 만족하는 나는 영양학적으로 뛰어난 요리를 할 수는 있을지언정, 엄청난 스트레스로 점철된 밥상이 되었고, 과연 내가 차린 밥상이 영양가가 좋은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전 육수를 넣고 맛 위주로 순식간에 밥상을 차리는 남편의 요리는 영양가는 모르겠지만, 사랑이 느껴지는 또 먹고 싶은 (시키고 싶은) 맛이었다.           

 남편이 저녁 밥상을 차리는 동안, 나는 아이들의 숙제와 공부를 담당한다. 물론, 이 마저도 나와 썩 잘 맞는 일은 아니다. 아이들을 쪼으고 혼내며 달래는 정신적인 피로도가 커서, 남편에게 바꿔서 하자고 했지만 남편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정신적인 일보다는 단순한 집안일을 하며 명상을 하고, 요리를 통해 본인의 창의성을 나날이 발전시키며, 맛을 상상하는 세계를 펼치게 된 자아 발전의 시간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아이들을 돌보며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이제 사춘기 절정에 다른 첫째 딸과 사춘기 시작이라 날뛰는 둘째 딸의 사이에서 아이들을 향한 나의 집착-공부, 밥, 잠을 점점 내려놓으며 나와 남편을 포함해 인간을 더 애틋이 여기며 부모님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눈물 없이는 돌아볼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이 뜻대로 착착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좋은 체력으로 지치지 않고 가열차게 싸웠다.   

 이제 우리는 웬만큼은 살았으므로 집안일이나 상대의 행동에 일일이 지적하거나 대꾸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기력과 혹은 정신력이 없고, 체력은 떨어져 덜 완벽해지고(!), 체념이 늘어 표면상으로는 화목하다. 이제 서로의 질문에 대답도 잘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어폰을 꽂은 귀로는 내 대답이 안 들리기 때문이다. 남편도 내 대답을 재차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참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싸우기 싫기 때문이다. 아직 질문은 하는 사이이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듣고 싶어 하는 대답도 들려준다. 묵묵히 듣고 참을 줄도 안다.

그러려니 한다.


 남편은 회사를 자주 옮기지는 않지만, 회사 내에서 부서 이동이 많은 편이다. 부서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거나 부서에서 발령을 내거나 하는 식인데 지금 돌아보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웠던 탓에 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철저한 원칙주의자인 섬세한 남편은 공정이 있는 회사일과 집안일에서는 돋보이지만 화합이나 사교와 관련된 일에서는 융통성이 떨어지는 등 치명적인 단점(치명적일 것 까지야.)으로 이어진다.

 회사에서 자기 혼자 일을 다 한단다. 다른 사람은 9시만 되면 사라져 화장실에서 죽치고 앉아 주식을 하거나, 자리에 앉아 주식 창만 들여다본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남편의 회사는 남편이 다 먹여 살리는 거다. 집에서처럼 회사에서도 일이란 일은 혼자 다 하는데 정작 인센티브며 승진은 정치 공작에 능하고 라인 잘 타는 이들이 다 차지한다며 자신은 미생》에서 늘 떳떳하게 일하고 아부할 줄 모르는 김대리 강대리만 보면 눈물이 난단다. (의외로 여태 순수하기까지 하다.)

 예전에는 사원, 대리, 과장, 차장, 팀장, 실장이었던 남편의 회사 직급이 대리 이하는 매니저, 차장까지 책임매니저로 불린다. 남편은 평소에 사람을 적당히 맞춰줄 줄도 몰라 늘 사이드에서 일만 하더니, 최근에 새로 온 팀장의 눈에 띄어 책임에서 그룹 파트장이 되었는데, 월급은 안 오른다기에 그러면 왜 하느냐고 물으니, 팀장이 되는 수순이란다. 팀장 되면 월급이 오르냐니까 그렇단다. 그러면 적극 하라고 했다.

 오랫동안 <<미생>> 에서 대리들에게 집착하더니 최근에는 오성식에 빙의해 열혈 파트장이 되어 한동안 신나게 설치고(?!) 다니더니, 얼마 전부터 충주 전동화 공장에 직원이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몇 달 전에는 멕시코 주재원으로 나가자 하고, 그전에는 중국으로 가자고 하더니, 또 옮기고 싶은 병이 도졌나 싶다. 나도 아이들 어릴 때마냥 그런가 보다 하고 남편만 따라다닐 나이는 아니기에, 대꾸할 힘도 없어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런데도 남편이 계속 나를 떠보는 말을 하기에, 자꾸 힘든 일을 해내며 반짝 돋보이다가 때만 되면(약발 떨어지면) 옮기자고 하는 것은 마약 같은 습관이라고 말해주었다. 어차피 3년이 되면,  옮기자고 할 게 뻔하다. 피하는 것이다. 한 자리에서 10년, 20년 버티는 게 진짜 베테랑이라고  벼린 칼처럼 뾰족하게 얘기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알아들었는지 당분간 부서를 옮기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알 듯 모를 듯 교묘하게 나를 설득하려고 한다. 이전에는 주어진 자기 일만 잘하면 되었는데, 관리자가 되니 남들까지 잘하게 하려니 너무 힘들다며  감성을 파고드는 백을 한다. 자기는 그냥 자기 일만 하는 적성에 맞는 같다며 분석한다. 자기야, 나이 오십이나 돼서 적성이 어딨어. 닥치는 대로 하는 거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랬구나. 이제는 혼자 떠나.

 일갈했다.

 결혼 초반에는 회사 동료들이 다 나쁜 놈인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타인에 대한 남편의 잣대가 각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저 사람은 (물론 나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실상은 오더만 내리는 자기 실장 같은 사람이라고 한동안 나를 '이실장 같은 사람'으로 불렀다. 이실장에 빙의한 나도, 일 한 번 시키려면 남편을 구슬려야 하는 상사의 노고가 절절하게 이해가 되었다. 아부는 기본, 기분도 안 맞춰 줘, 시키면 고분고분 "네" 하지도 않고, 한 마디 하면 백 마디 해, 자기가 한 일에 생색은 엄청 내는 남편을 부리는 상사가 얼마나 고달팠을지 안 봐도 눈에 훤하다.       

 지난겨울 남편이 감성적이고 예민한 우리 집 여자들에게 대거 뭇매를 맞은 이유가 본인의 기준으로 우리를 별명을 만들어 부르기를 즐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래위로 브라운 내복을 입고 있는 첫째 딸에게 티라미수라고 부르고, 방귀를 잘 뀌면 가스정, 블랙 내복을 입고 있는 둘째 딸에게는 블랙 요원, 엉큰이라고 부르는 가하면, 가장 심한 건 나였다. 아래위로 베이지색 실내복을 입은 나에게 황소 같다고 해서 나는 결국 다이어트를 감행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런 식으로 사사건건 별명을 갖다 붙여서 우리 여자 셋은 각각 별명이 수십 개에 이른다. 나는 황소가 가장 수치스러웠다. 남편의 말에 점점 진저리 치게 된 나도 남편에게 근사한 한 방을 멕여주고 싶은 내적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온갖 말을 해도 타격감 1도 없는 남편. 내 목만 아프다. 곧 우리 여자 셋 중에서도 첫째가 그 비아냥대는 계보를 이어갈 낌새가 보이니, 남편과 막상막하 일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매일 신발을 바꿔 신는 남편을 생각해 꺼내기 쉽게 신발장에 165,170 사이즈의 남편의 신발부터 차근차근 한 칸씩 넣는다. 나의 본성과 어긋나는 이 일은 그를 위한 것일까? 나를 위한 것일까? 잠시 생각한다. 칸에 신발 켤레 씩은 들어가지 않는다. 남편의 신발 옆에 나의 작은 구두를 놓으니 금상첨화다. 아무래도 칭찬받을 각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여야 제때 신을 수 있기 때문에 봄에만 신는 20년 넘은 짙은 민트색 힐을 꺼내고 앞 트이고 뒤 트인 봄 신발들을 꺼내어 현관에 죽 늘어놓는다. 봄신발 들은 버릴 신발들과 함께 현관을 가득 채운다. 치워야 하지만 집에 더 있다가는 신발장에서 끝나지 않고 밤새도록 온 집안을 헤집을 것 같아(믿는 구석이 있어서는 아니다), 대충 하고 그만 걸으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리된 신발장에서 운동화 몇 켤레를 꺼내 신어보고는 결국 매번 신던 운동화를 구겨 신고는 급히 나선다. 남은 신발 정리는 내일 하기로.

 현관문에 가지런히 놓여진 봄 신발들을 신을 생각에 이미 마음은 봄, 푸근해지는 나는 벌써 남편의 잔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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