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눈은 그치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슬쩍 갖다 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다.'
젊은 날 내게 구원과도 같았던 기타노 다케시의 말은 이제 진부한 화두가 된 지 오래.
어린 날 나의 가족이었던 할머니는 여전히 내 꿈속에서 뒷모습을 보이며 담배를 태우신다. 삼십 대까지도 부모를 잘 몰라 쩔쩔맸고 마흔이 될 때까지 시댁 부모님, 남편의 형, 누나와도 어설픈 열정을 불태우다 나가떨어져 결국 나는 양가에 무뚝뚝하고 인정머리 없는 인간이 되었다. 다행히 이런 타이틀을 달고 난 뒤에 나는, 아주 자유로워졌다.
3년 전, 남편은 할아버님 묘소에 벌초를 하러 부모님 댁에 들렀다가 아버님과 다투었다. 제초기를 유료로 빌리며 준비를 단단히 해간 남편인지라, 아버님과 싸우고 되돌아온다는 전화를 받고 시부모님께 연락을 드렸지만 두 분은 내 연락조차 계속 받지 않으셨다. 그렇게 시부모님과 우리는 2년 정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마음 약한 남편은 슬며시 다시 왕래를 시작했지만 나는 시부모님께 조금 괘씸한(?!) 마음이 남아있었던지라, 반갑게 바로 시댁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 간에 소원한 관계가 너무 편해진 탓에, 조금 더 자유를 만끽하며 여전히 나는 시부모님 생신 때에도 남편과 아이들이 전화를 걸고, 내 생일에도 시부모님은 연락을 하지 않으신다. 명절에도 연휴 끝에 당일치기로 다녀온다.
그러나 아버님 팔순은 다가왔고, 칠순의 악몽이 되살아나며 굳이 와 다시를 반복하다, 결국 다시 홀로 팔순을 짊어져 보기로 했다. 시아버님 칠순 즈음 왜 아버님 칠순에 친자식들이 아닌, 엄연히 남인 내가 나서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아주버님의 아내인 형님이 말했는데, 요즘 그 말이 환청처럼 귓가에 다시 맴돈다. 당시에는 가족이라는 명쾌하고 어리숙한 답을 갖고 있던 나는 이기적인 형님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살면서 형님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내 기분과는 아랑곳없이 아버님 팔순을 맞이하여 '남'인 내가 다시 한번 가족을 위시하여 나서게 되었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가족의 스케일이 조금 작아졌다고나 할까? 이제 시부모님의 대화 속에서만 등장하는 아주버님과 시누이댁으로 인해서 드디어 우리는 팔순 당사자인 남편의 부모님만 챙겨도 되는 연륜이 생긴 것이다.
물론, 생애 첫 베트남 여행을 꿈꿨던 나의 야무진 계획은 초장에 산산이 부서져 우리나라 좋은 나라 고향 같은 제주로 떠나게 되었다. 2월 말 제주는 동백은 다 떨어지고, 바람은 여태 거센데 눈은 다 녹고, 벚나무에 꽃눈 껍질도 벗겨지지 않아, 유채는 꽃망울이 열렸으려나. 시부모님이 상상하는 노랗고 빨갛고 하얀 제주는 아니지만, 제주로 그냥 그저 가는 것이다. 고향에 간다는 명분으로 서부 하루, 동부 하루, 서귀포 하루, 제주시 하루면 되지. 거칠게 일정을 짠다.
엑셀로 일정을 정리해야 마음이 놓이는 섬세한 남편은 여행 전 날까지도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만 하기에 결국 나는 급히 좀 더 촘촘한 일정을 짠다. 황량한 겨울 끄트머리, 돌문화공원과 4.3 기념관 하루, 아버님이 가고 싶다는 우도와 광치기 해변 하루, 순례자의 길인 올레길 12코스 하루, 용머리 해안과 산방산 하루로 느슨하면서도 느린, 야심찬 4박 5일 일정으로 확정했다.
에헤이. 2박 3일이면 될 텐데. 주변에서 무리하지 말라며 모두 말린다. 매 해 제주를 들르며 반 토박이와 다름없다고 스스로 여기는 우리는 4박 5일도 짧아 더 휴가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당시에는.
나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여행이 아닌, 효도 여행이라는 타이틀을 숙지하며 떠나는 전날까지도 잠을 안 자는 유유자매와 싸운 나는 부모와 자녀 간에 소통과 관계회복만을 목표로 이번 대장정은 시작되었다.
드디어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는 전복을 점심으로 먹으며 서로 돈을 내겠다며 훈훈하게 출발했다. 설문대 할망과 오백장군 설화로 꾸며진, 우리 부부가 제일 좋아하는 제주도 숨은 명소인 돌문화 공원에 왔다. 이곳 오솔길과 지름길까지 구석구석 잘 아는 나는 좀 더 멋진 길로 안내하기 위해 먼저 높은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는데, 나를 놓칠세라 급히 따라 오르던 아버님이 넘어져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이들은 이런 곳에 온 게 실화냐며 나를 닦아세우며 돌아가자고 아우성이다. 하필 전화를 받던 남편은 아버님을 놓치고 놀란 나머지, 그냥 쉬운 길을 가면 되는데 뭐 하러 그 길로 가느냐고 나를 타박한다. 나의 욕심 때문이었으므로 이를 악물며 남편 두 눈에 내 눈을 박고는 레이저라도 나오듯 눈에 힘을 준다. 짐짓 물러서는 남편을 밀치며 아버님께 다가갔다.
아버님 두 무릎이 까져 피가 난다. 절뚝거리시며 걷는데, 눈앞이 캄캄해진다. 나는 아버님을 내 오른쪽 옆에 끼고, 걸을 수 있느냐고 연신 여쭤보며, 4박 5일 동안 아버님은 내가 전담마크(?!) 하기로 마음먹는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며 나는 낮고 평탄한 길로 빠진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것인가? 넘어져 수술로 이어졌던 엄마가 떠오르고, 내가 골을 내며 먼저 걸어가다가 바위 아래로 떨어진 할머니 얼굴도 떠오른다. 눈물이 핑 돈다. 아버님은 이대로?!
다행히 아버님은 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나는 첫날부터 의기소침해져 찌그러지게 되었다. 가족 여행을 다녀온 지인의 수많은 조언과 나의 기억 속에서 잊고 있었던 다짐이 떠올랐다.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자. 무색무취로 이 여행에 묻혀 가리라, 다시 결심했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각자의 룸으로 들어간다. 첫날의 하이라이트였으며, 신의 한 수였던 것은 잠자리였다. 이틀이 아니라, 4박 모두 호텔이었더라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며, 아이들에게는 학원 숙제를 하라고 소리를 지르다 스르르 잠이 든다.
갑자기 둘째가 꿀잠 자는 나를 깨우며 애착 인형에 가방이 떨어졌는데, 꿰매 달란다. 잠이 덜 깬 그 찰나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좋은 엄마가 돼서 오리라 육지에서의 결기가 떠올라 반짇고리가 없으니 수원에 가면 해주겠다고 둘째를 살살 달랜다. 그러나 이런 긴박한 순간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남편은 반짇고리를 캐리어에 챙겼고, 눈 밝은 둘째는 그 작고 네모난 반짇고리를 캐리어 뚜껑에서 발견해, 내가 덮고 있는 흰 이불 위로 고이 던져준다. 나는 안경을 머리에 쓰고 침대에 기대어, 짐짓 현모양처에 빙의해 다시는 뜯어질 일 없이 박음질한다. 오랜만에 가족을 위해 한 일 중에 나름 만족스러워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데. 인형을 건네받은 둘째가 눈을 희번덕이며 가방을 팔 아래로 꿰매야지, 가슴 위로 꿰매면 어떡하냔다. 의지만 있고 영혼은 없었던 것일까. 녀석의 입이 댓 발로 나와 뜯을라고 했더니, 엄마가 역시나 싶은지 그냥 들고는 사라진다. 아빠한테 다시 해달라고 하지 않는 걸 보고, 나는 그제야 안도하며 곯아떨어진다.
많은 수식어를 떼내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 굴레 속에 있기를 자처한다. 그러나 공동체 생활을 위한 작은 배려와 인간적인 연민이 우선하기를 바란다. 오늘도 나는 나의 의중을 의심하고 과정에 의문을 가지며 무던히 다짐하면서 나아간다. 뒷걸음질로.
이튿날, 두려움에 떨며 시부모님 룸에 방문했다. 문 뒤로 피로로 퉁퉁 부은 어머님 얼굴이 보인다. 다행히 아버님은 다리에 붓기만 있다며 오늘의 컨디션은 55퍼센트라고 하신다. 45퍼센트가 부족해 우도는 못 가겠다고 하신다. 45퍼센트는 내 몫이라고 생각하며 제가 아버님을 전담마크 할 테니, 우도에 들어가자고 했다. 영 자신이 없으신 부모님을 대신해, 남편에게 차를 배에 싣고 들어가자고 했더니, 큰 차라 좁은 우도에 들어가기가 꺼려진단다. 그럼 내가 운전하겠다고 하니, 다들 뜯어말린다. 다시 쭈글쭈글해진 나는 알아서 하라며 한 발 물러선다. 그랬더니, 물 만난 아이들은 그냥 숙소에 있겠다고 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당도해 자신만만했던 남편과 부모님은 어디로 갈지 모른 채 나만 바라본다. 80살 노인의 55퍼센트의 컨디션으로 어디를 가야 할까.
어머님이 보고 싶다는 동백이 어디 남아있을지 검색하며 어느 누군가가 며칠 전에 블로그에 남긴 동백숲으로 내달린다. 화산석이 많은 길이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나는 쉴 새 없이 아버님을 부르며 내 곁으로 묶는다. 온 지 30분은 됐을까.
우리 집 베란다에 있는 동백은 폈으려나. 그게 낫다. 보이지도 않고 에잇.
동백숲은 큰데, 조금만 걸으셔도 숨이 차는 부모님은 입구만 돌아보고 그만 돌아가잖다. 동백도 뚫어져라 자세히 보면 참 오래 걸릴 텐데, 사진 몇 방 찍고 나서 볼 거 없다고 가자신다.
어머님, 아버님. 요 동백은 진홍색 꽃잎이 7장, 반짝반짝 빛나는 진녹색 이파리가 깜찍하고요. 노란 수술이 암술을 감싸 안고요. 샤넬 백 꽃이 요 동백인 걸 아세요? 추운 겨울에 동박새나 직박구리 눈에 띄라고 이렇게 진한 붉은색을 간직하고 있어요.
수다스러운 정보를 속으로 삼키며 먼 데 있지만 바로 코 앞에 있는 듯 꼭대기에 잔설이 남아 하얀 한라산을 바라본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아이들은 감귤박물관에 가서 피자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남편은 동문 시장에 가서 장 구경을 하고 싶단다. 어머님은 우도는 자신이 없지만, 여미지 식물원에 가서 옛날에 보았던 화려한 꽃밭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신다. 아버님은 요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방어회를 먹어야겠다고 하셨다. 이중에 나만 하고 싶은 게 없다. 4박 5일 동안 나는 마음도 기분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생각은 나를 해친다. 우리는 4박 5일 동안 이 모든 걸 할 것이다. 나는 왜 벌써 이 모든 걸 다 한 것 같지?
숙소로 가는 길, 갑자기 눈이 내린다. 나는 폭설이 내려 온통 흰 한라산에 닿고 싶었던 게 생각이 났다. 이번 주까지만 1400 고지까지 가는 버스가 운행된다. 이 말을 할까 말까 하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은 삼킨다. 라디오에서 마지막 한파라고 한다. 지금 장맛비가 쏟아진다고 해도 전혀 놀라운 상황은 아니지만, 강풍이 불고 쌓이는 눈을 보니 돌아가는 월요일에 비행기가 뜰 지 불안하다. 나는 계속 제주 날씨를 검색한다. 눈이 오고, 돌아가는 날에는 비가 온다. 국내 여행을 4박 5일이라니!
이미 한라산은 멀어져 보이지 않는다. 남편과 성판악 코스로 처음 한라산에 올랐을 때, 오르막길 오른쪽에는 온통 조릿대가 지루하게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산하는 길은 관음사 코스로 내려갔는데, 눈이 녹지 않아 깡깡 언 얼음길을 타고 내려왔던 생각이 났다. 여행 끝에는 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오래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그 힘들고 지루했던 한라산을 또 오르고 싶어 한다. 어느 마을 뒤로, 구름 안으로 숨은 한라산을 상상하며 우리 여섯은 지금 어느 코스, 어느 지점에 각자 머무르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기분이 괜찮으신지, 혹은 기분이 나빠지셨는지 아버님은
필동에서는. 아현동에서는. 남가좌동에서는. 우리 엄마가 말이야.
남편 옆에 앉은 나는 백번은 족히 들었을, 뒤에서 들려오는 아버님의 탄생과 아버님의 엄마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곤히 잠든다.
어머, 햇볕이 나왔어.
아버님의 말씀을 천 번 보다 더 들었을 어머님은 그 지난한 과거를 그만 끊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경쾌한 탄성을 내지르신다. 오른쪽 화살표로 한림읍을 가리키는 도로 팻말이 보인다. 진짜 먹장구름은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이며 햇살 한 줌이 지나간다. 2월은 좀 이른 봄일까. 매운 겨울 끄트머리일까. 여전히 눈은 오락가락하는데, 햇살도 장단을 맞춰 오락가락하는구나. 이제 한라산은 영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아이들은 독채에 옥탑방을 차지했다. 부모님께서는 1층에 자리를 잡으시고, 나는 2층 방 한 칸에 박혀 들었다. 남편은 이 세 군데를 열렬히 오갔다. 잠은 아이들과 자고, 부모님과 TV를 보고, 밥 먹자고 나를 1층으로 데리고 내려왔다.
1층과 2층 그리고 옥탑방을 오가던 나는, 그 순간에 진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같이 여행을 하면서도 나만의 틈을 내는 찰나, 내 방식대로 여행을 즐긴다.
옥탑방으로 가는 길, 귀신 머리채 흔들리듯 야자수 나무가 바람에 격렬히 움직이고 검퍼런 바다에 뜬 비양도가 어둠에 잠기는 때에, 하얀 풍력발전기 여남은 대가 쉴 새 없이 돌며 어둠에 사라지는 그때. 깜빡이는 빛 한 점에 나는 마음이라는 게 생겨나고 눈물이 맺혀, 그러면 지난 시간이 다 괜찮아진다. 아빠가 왜 그렇게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했을까 여태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저런 무시무시한 바다에 한 번 중독되면 영원히 떠날 수 없는 거구나, 잠시 알 것도 같은 마음이 든다. 내가 한 번 오른 한라산을 근처에서 보면서도, 그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잠옷을 입은 채 계단을 통통 뛰어서 1층에 계신 부모님께 내려간다. 그 짧은 순간, 계단을 뛰어가는 즐거움만 있다. 부모님께 아침 안부인사를 건네고 창 곁으로 느릿느릿 나간다. 이 창문 뷰를 보려고 이 독채를 빌렸을 텐데, 밖은 내내 살벌하게 바람이 분다. 오늘 일정도 만만치 않겠는 걸. 숙소에서 쉴까 하는데 부모님은 이미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씻고 외출복으로 다 갈아입고 무료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물론 아이들은 아직 꿈나라일 것이다. 얼마나 추우려나 창 밖으로 나간다. 화단에는 밤새 본 미친 야자수 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백꽃이 진 뒤 시퍼런 동백나무가 있고, 붉은 꽃망울이 터지기 직전인 매화나무가 있다. 어찌 된 일인지 제주 바람에 살아남은 무화과가 잔뜩 달려있는 무화과나무도 한편에 자리한다. 쪼글쪼글해졌지만 진짜 무화과가 맞았다. 부모님 보시라고 한 알 따는데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딴 무화과는 보시지도 않고, 며느리의 해사한 웃음을 보시고는 대뜸 아버님께서 나보고 시를 지어 읊으라 신다. 나의 성향을 배려해 주셔서 장단을 맞춰 주신 것인지, 나를 비꼬시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유유히 사라져 2층 계단을 다시 즐겁게 뛰어 올라가 방에 박혀서는 책을 읽기로 한다. 나는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책 속에서 진정한 인터내셔널 한 여행을 한다고 생각한다.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는데, 책에 붉은 피가 묻는다. 핸드폰을 들어 입술을 보니, 부르터서 갈라진 틈새로 피가 새어 나온다. 아침밥 먹자고 부르러 온 남편은 나를 보더니, 엄마 눈에도 실핏줄이 터졌다고 한다. 좀 전에 나는 무화과는 봤을지언정, 어머님 눈에 터진 붉은 실핏줄은 보지 못했다. 육체적으로 피로하다고 못 느낀 나도 입술이 터지는데, 팔십 다 된 할머니는 얼마나 고단하랴. 아마 아버님 무릎 컨디션도 100퍼센트가 아닐 것 같다. 저 젊은 아이들도 여태 자는데 말이다.
힘을 더 뺀다. 40분을 달려 용머리 해안에 도착한다. 초입에서 형제의 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선다. 산방산을 배경으로 덜 핀 유채꽃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20년 전 기억을 불러와 들른 여미지 식물원에는 꽃의 정원에만 들어갔지만 꽃이 거의 없었고, 올레길 시작점에 서서는 반건조 오징어만 사 먹고 차귀도를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돌아섰다. 뭔가 잔뜩 사 먹고 싶었던 남편은 지옥 주차를 하고 동문 시장으로 들어섰으나, 오메기떡 하나 사 먹고 청년들이 만드는 흑돼지 오겹말이를 눈에만 담고 왔다.
일찍 숙소로 돌아와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간단히 즉석밥과 국을 데워 방어회를 먹는다. 안마의자에 앉으셔서 노곤해진 부모님은 고생했다며 영원히 이렇게 살고 싶다고 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아마 제주 여행이 좋아서가 아니라, 아마도 자식과 손주들과 함께한 가족 여행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말씀해 주신 아버님 덕분에 이번 여행이 뜻깊게 다가왔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 길에, 어머님께서 제주는 탁 트여있던데 서울은 복잡하고, 제주는 바람은 불어도 따스한데 서울은 춥고. 듣기 좋은 제주 이야기를 계속 재잘재잘하신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영원히 이렇게 살고 싶다고 술김에 말씀하신 아버님은, 이제 서울 이니까 제주 이야기는 그만 하라신다. 4박 5일이 좋아질락 말락 하던 찰나에, 입이 방정인 우리 남편의 가족답게 아버님은 이 여행의 갈무리를 깔끔하게 하셨다.
그동안 소원해진 전화 통화가 다시 시작되려고 한다. 아직 나는 가족이 어떤 집단인지 잘 모르겠다. 수많은 감정의 파동을 지나며 이랬다 저랬다, 눈을 만나고 햇살을 쬐며 나아가고 뒷걸음질 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이어가는 인간적인 관계 중에 하나일 뿐.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어머님, 아버님, 딸, 남편, 아내라는 호칭으로만 이루어진 관계면 여전히 버거운 것 같다. 그저 가족이란, 내 앞으로도 펼쳐질 나이가 든 두 어른과 내가 살아냈던 어린 시절을 거치는 자녀들과 서로 맞춰가며 끝없는 여행을 하는 관계가 아닐까.
문득 4년 뒤 어머님 팔순이 되면, 서울을 살아내는 부모님과 수원을 견뎌내는 우리가 각자 잘 살다가, 오늘처럼 다 함께 또 제주에 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질문 앞에서는 가족이라는 어떤 정의나 개념도 무색해짐을 느꼈다. 앞으로는 모든 게 더 쉽지가 않을 것이다. 시간 앞에서 공평한 우리는 오늘이 제일 가볍고 쉬운 날이다. 오늘 다리 컨디션은 몇 퍼센트세요. 돌고 돌아 다시, 매일 아침 안부 전화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