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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가족

철든 아빠가 어색하다.

by 이애리

아침 8시, 아빠 생신이라는 알람이 떴다.


2년 전, 돌숲을 열자마자 아빠 생신이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처음으로 아빠 생신을 잊었다. 그때 친정 부모님은 내가 가게를 여는데 큰 보탬이 되질 않아 미안해하고 있던 찰나에, 아빠 생신 때 연락조차 없으니 두 분이서 단단히 삐지신 적이 있었다. 나는 가게 일로, 남편은 회사 일로 바빴던 우리는 이모를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엄마와 오해를 풀었었다. 그 뒤로, 나는 가족의 모든 대소사를 핸드폰에 알람을 해두었다. 그런데 다른 가족의 생일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이미 연락을 하고 생일 축하를 하지만, 유독 아빠 생신만 잊고 있다가 겨우 때맞춰 상황을 수습하는 일이 곧잘 생겼다.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빠를 거부하는 내 무의식적 발로거나, 아빠를 잘 본 적이 없어서가 아닐까로 압축하게 되었다.

내게 전화를 걸어서 이모가, 고모가, 이웃집이, 새언니가로 권위 있는 가까운 사람들 말로 이야기의 서두를 시작할 때가 많은 엄마가 어쩌면, 아빠가로 시작하는 말도 엄마가 나한테 서운한 걸 아빠로 빙의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인들 아닌 들 무슨 상관일까. 엄마가 아빠인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집에 아빠는 잘 없었다. 엄마가 아빠였고, 오빠가 아빠였다. 몇 달에 한 번씩 들어오는 삼천포로 들어오는 배에 선원이었던 아빠는 바다에서건, 육지로 들어오건, 늘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곤 했다. 어릴 때 엄마가 애리야 하고 부르면 무얼 하든 간에, 가슴이 쿵 떨어졌다. 지금도 나는 핸드폰 액정에 엄마가 뜨면, 바로 전화를 받지 못한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어느 날은 폭격기처럼 쏟아내고, 어느 날은 선을 그으며 남처럼 대한다. 어떤 일이든 괜찮아. 먹었을 때라야, 나는 집으로 전화를 다시 걸 수 있다. 그 사이 엄마의 화는 전화를 바로 받지 않은 나로 인해 더 부풀어 있었다.

아빠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번, 우리가 결혼할 때 즈음 한 번씩 정신을 차리셨다. 그러나 아빠가 완전히 정신을 차린 건 오빠가 결혼한 이후였던 것 같다. 늘그막에 가족에게 돌아오기 위해 그제야 바다를 버리고, 배를 외면하고, 자갈치를 떠나며 아빠는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나 나는 죄가 많은 아빠가 고통받고 산 우리한테 평생 사죄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당당히 기를 펴고 일부러 더 큰소리치며 사는 아빠와 말을 잘 섞지 않았다. 집안에 어떤 일이든 나는 엄마와 상의했다.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평소 무뚝뚝한 오빠가 부모에게는 더 싹싹한 자식이었을 것이다. 나는 당연히 아빠가 나한테 한 소리를 한다는 게 상상이 잘 되지 않았고, 용납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처음 엄마로부터 아빠가 삐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 대략 '감히 아빠가 내게?' 이런 감정이 들었다. 물론, 아빠가 무슨 일로 삐졌는지는 기억에 없다.

어느 날 엄마는, 아빠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내가 그동안 왜 막살았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리더라고 전했다. 그때 잠시 언젠가는 터질 듯 말 듯하던 용 솟던 원망이 잠시나마 누그러지고는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집에서는 말이 없고 내성적인 편이다. 남편이 한 말을 빌리자면, 내가 가부장적인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막대한 자본을 지닌 자선사업가나, 달변가 혹은 개그맨으로 안 사람이라면 믿을 수가 없겠지만 말이다. 이제 부모로서 어느 정도 짬밥이 된 어느 날, 웬만한 집안일에는 감정의 동요가 잘 없다고 방심한 사이, 내 40년간 쌓인 소중한 울분이 드디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굉장히 평범하고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데서 말이다.

주방 한 켠에 놓인 식탁에 쪼르르 앉아 아이들 키우는 게 힘들다고 나보다 한 살 어린 올케언니한테 아는 척하며 징징댔던가. 아빠가 사고를 치면, 시골로 보내졌던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원망이 그런 식으로 묻어 나왔을까. 내 이야기를 유독 진지하게 듣던 아빠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애 열 키우는 여자도 있는데, 둘 키우는 너가 뭐가 부족해서 징징대냐.

순간, 눈에서 눈물이 폭발하면서 울음 섞인 괴성이 꾸역꾸역 쏟아나 왔다. 아빠가 뭘 아느냐고, 아픈 나를 업고 응급실 한 번을 간 적이 있느냐고, 아빠는 나한테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고. 바락바락 소리쳤다. 아이들 셋이 떠들썩하던 거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오빠가 애들에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고함치는 게 곧바로 들렸다. 엄마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정작 아빠는 어둠이 내린 베란다로 가더니 쪼그리고 담배만 뻐끔뻐끔 피운다. 그때까지도 있는지도 잊어버렸던 올케 언니가 조용히 휴지를 건네주는데, 그때서야 주룩주룩 쏟아지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런 일이 한 번 더 있었다. 그때는 엄마한테 그랬다. 엄마가 뭘 아느냐고 그랬나. 속이 후련했을지언정,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그랬던 나 자신이 두고두고 환멸스러웠다. 미쳤나 봐. 미쳤나 봐. 친정에 자주 가면 안 되겠다고 다짐을 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부모님이나 우리나 얼마나 더 자주 보며 살까 싶어 자주 뵈어야겠다는 마음과 상충하며 어버이날과 생신날, 명절 때만은 꼭 보자고 내적 타협을 맺었다.

그런데 오늘, 아빠 생신! 인 것이다. 아침 8시에 알람이 울린다. 오늘 저녁 일정이 다행히 (?) 없고, 최서방도 때마침 출장에서 돌아왔다. 출근을 한 남편에게 아빠 생신이니 전화를 드리라고 SNS에 먼저 남겼다. 천안에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혼자 잠정적으로 합의한 후, 이제 아빠께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늦어지면 전화를 안 하게 될까 봐, 9시에 처리할 일로 알람을 다시 맞췄다. 9시 알람이 울리자, 애들에게 외할버지 생신 축하 전화를 드리라고 했다. 큰 딸이 전화를 먼저 걸고, 둘째를 바꾼다. 둘째가 통화 후에 금방 내게 핸드폰을 건넨다. 심호흡을 한 후, 핸드폰을 건네받은 나는 아빠 반갑게 부른다. 요새 어떠냐고 묻는 아빠한테, 나는 또 사는 게 너무 힘들다며 미주알고주알 투덜대려는 찰나, 당신은 이미 출근했다며 사는 게 치열하다고 하신다. 너희도, 오빠도 다들 치열하게 사는데, 아빠도 그래야지,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한다. 아빠가 그동안 밀린 닭살 돋는 멘트를 할라치면, 나는 어쩔 줄 몰라 전화를 홀라당 빨리 끊는다. 조금 일찍 철들어서 할머니한테 효도하고, 사춘기 온 오빠랑 나한테 옆에 있어주기라도 하지. 왜 이제야 철이 들어서는, 딸로서 한 소리 하려니 가책에 시달리게 하는지. 정작 생신 축하한다고, 밤에 가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엄마한테 전화를 다시 건다. 엄마는 곧 설이니 오늘은 오지 말고 용돈만 부치라고 한다. 래도 오랜만에 마음을 먹은 딸로서 주말에라도 가겠다고 하니, 엄마는 다 내려놓은 듯한 목소리로 아빠가 낚시하러 지방에 간다고 말한다. 아빠가 가서 또 사고라도 치면 어쩌려고 엄마는 그것을 허락했는지 대단하다. 아빠 없는 아빠 생신이 한두 번이랴, 그래도 가겠다고 하니 엄마가 한사코 말린다.

신기하게도 내가 마음을 먹으면, 엄마는 반대로 한다. 5월 어느 날, 나는 무슨 콧바람이 들었는지, 엄마 아빠랑 공주에 있는 마곡사에 가서 예불드리고, 그 앞에 찻집이나 갈까 싶어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너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애들이랑 최서방 없이 무슨 재미로 가느냐고, 나보고 오지 말라고 한다. 순식간에 김이 팍 샌 나는, 그 뒤로 혼자 친정에 가겠다고 한 적이 없다.

아마 부모도 다 큰 딸 하나만 오롯이 대하기가 만만치는 않는 거구나 짐작만 했다. 엄마 아빠의 전화가 두려운 것처럼, 부모도 내 방문이 두려웠던 것일까.

부들부들 떨며 50만 원 용돈을 보내드렸다. 아빠가 다시 전화가 온다. 무슨 돈을 이렇게도 많이 보내냐며 안 줘도 된다고 버럭 하신다. 나는 내가 번 돈이니 쓰시라고 이를 앙 다물고 말했다. 아빠가 부끄러운 듯 막 웃는다. 예전에 아빠가 엄마 몰래 모아둔 돈 있냐고 묻던 시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때는 아빠가 참 만만했는데, 요새 자꾸만 아빠가 철이 들어 내 마음이 굉장히 불편하다. 아빠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요즘 엄마의 전화도 참 담백하다. 세상에 만만한 사람이 자꾸만 줄어든다. 왠지 쓸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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