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이 복면에게_복면은 무수한 복면을 만나
얼마 전에 폭탄을 터트렸다. 잘 참는다 싶었는데, 일은 급작스레 터진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내게,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물론 애당초 오래 참아온 사안이어서인지, 언젠가 일어날 일이 드디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 사건에 대해서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을 더 의식하고 감당해야 하는 내 몫이 남았다. 심간이 복잡하다. 이 사람은 왜 그럴까, 저 사람은 왜 저러지 하다가 얘도 싫고 쟤도 미워진다. 그러다 욕실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본다. 기미가 얼굴 반은 타고 내려와 거무죽죽해진 얼굴에 퀭한 동태 눈깔 같은 눈으로, 한 아줌마가 나를 멀거니 쳐다본다.
니가 제일 마음에 든다, 얘.
나도 모르게 방언처럼 말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 어쨌거나 자책의 시간을 지나 내가 지금 제일 마음에 드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_<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35쪽
다이소에서 3천 원에 득템 한 르까프 복면을 쓰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선글라스까지 썼더니 둘째가 너무 무섭단다. 밀폐된 공간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선글라스를 벗고 모자로 최대한 가린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처음에는 복면 쓴 아줌마를 보고 놀라더니, 이제는 모자와 복면 사이에 눈만 보고도 안녕하세요! 외친다. 인사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건 오히려 나다.
방학 직전이면 학원 대이동의 계절이다. 엄마들과 만나면 돌숲 상담이 아니라, 학원 상담이 이어진다. 말 많은 나는 쉽게 끊지 못하고 훈수를 두며 트랙을 반복적으로 돌다 1시간이 지난다. 가다가 좁은 틈으로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남의 아침 시간까지 다 쓰게 만드는 나를 경계해야 한다.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 이제는 복면 때문에 나를 알아본다고 하니 입이 쓰다. 내가 유명인사는 아니지만, 두 아이 유치원, 초, 중 보내며, 단지 내에 장사까지 하며 10여 년 휘젓고 산 사람이면, 누구나 나처럼 된다. 이 아파트 단지 내에 사는 초등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다는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어리둥절했으나, 살아보니 그렇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되면 지난밤 사이에 산책 나온 개가 싸놓은 개똥을 피하느라 나는 꽤 오두방정이다. 이미 여럿이 밟아 뭉개진 똥도 보인다.
똥을 피하는 사이, 복면은 또 다른 복면을 알아본다. 아이 등굣길을 함께하려고 안경을 빼고 모자와 복면을 쓴 다른 엄마를 만난 것이다. 두 쌍의 작은 눈은 불꽃이 튄다. 서로를 피한 건 아니지만, 잠시 아무도 모르게 나오고 싶었을 뿐인데. 불특정 다수를 피하려다 베프를 만난다. 만난 김에 트랙을 함께 돈다. 이곳이 이렇다. 집에서 트랙까지 1분, 집에서 학교까지 2분. 짧은 거리에도 누군가를 반드시 만나고야 만다. 동일한 패턴이다. 기말고사 직후라, 만나는 사람마다 촉촉한 눈 맞춤을 하고 한숨을 내뿜든가, 어깨를 찰싹이며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며 아이 흉을 보는 것이다. 그러다 학원 정보를 나누며 여름 방학부터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의기투합한다. 사실, 학원은 엄마 입맛에 따라 다르다. 나는 곧잘 초월한 눈빛으로 말한다. 어차피 다 이 아파트 단지 내 학원을 돌고 돌게 돼 있으니 좋은 학원에 대해 불안할 필요가 없다고. 내 자식이 다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건너편 정자동까지 가본 후에야 결국 아이에게 맞는 학원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만, 돌다가 커피를 마시고 아점을 먹고 커피를 다시 마시며 헤어진다. 이제 나도 곧 고등 엄마에 합류하며 또 반복될 일이다. 좀 덜 호들갑스러우려나 모르겠다.
아파트에 나서면 아는 사람 있나 없나, 죄인처럼 살피며 걷는다는 한 친구가 요새 자주 생각이 난다. 그 친구를 봤다는 또 다른 친구는 요리조리 살피며 뒷걸음질하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다고 말한다. 요새 나는 자꾸 그 친구가 떠오른다.
나도 쥐걸음을 하며 복면 틈으로 눈알을 쉴 새 없이 굴리며 아파트 트랙을 벗어나 성대로 방향을 튼다. 이른 아침 문 닫힌 음식 가게 앞에는 죄다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나와 있어서 악취가 진동을 한다. 조용한 틈을 타 새들이 내려와 음식물을 쪼아 먹는다. 차마 계속 쳐다볼 용기가 안 난다. 작년까지 흐드러지게 핀 미국자리공이 있던 자리에 올해, 아무것도 없다. 뿌리째 뽑혔는지 근처에 잎사귀 하나 보이지 않는다. 작년 여름에 이 꽃을 보는 낙으로 성대를 오르락내리락했는데, 그 자리는 녹슨 철제물로 덮여있다. 커피만 사서 성대를 끼고 돌아오는 길, 내일은 어디로 갈까 고민한다.
다음 날, 나는 메가에서 커피 한 잔을 사서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성대 안으로 들어간다. 성대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와 꽃이 있어서 어느 계절, 어느 때에 들어가도 쉽사리 다음 스텝으로 발을 옮기기가 힘들다. 5분 이내의 집 앞이지만 5시간도 부족하다. 떨떠름하게 발을 들인다. 여름방학 전 마지막 호사려니, 이렇게 두려운 마음으로 들어갈 것인가. 지금 성대 안에는 능소화 기둥이 군데군데 볼 만할 것이다. 그러나 능소화 기둥 근처에 가지도 못한다. 1년 넘게 공사 중이라 어수선한 데다, 아는 길로만 가려고 하니 이내 막히고 만다. 출근할 시간이 아직 남아, 길이 난 데로 무작정 걷는다. 모르는 길이 계속 이어지지만, 이 길 끝에 무엇은 있겠지, 어떻게든 집에는 가겠지, 걸어간다. 끝은 머지않았다. 출입금지 울타리가 쳐져 있어 올렸던 텐션을 내리며 싱겁게 돌아서야 한다.
돌아서자마자 큰 나무를 맞닥뜨린다. 내가 지나쳐 온 길에 쪽동백 열매가 흐드러지게 달려 흔들거린다. 어찌 처음에는 안 보였을까. 앞만 보고 가다가 뒤돌아 섰을 때라야 벽돌 건물을 배경으로 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쪽동백나무가 눈에 띄는 것이다. 다음에 이 나무를 본다면 지금을 떠올릴까. 어디에 있든 여기 이 쪽동백나무만큼 근사하진 않을 것 같다. 지금 여기, 벽돌 건물 앞 쪽동백 나무라야 의미가 있다. 왠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 금세 서글퍼진다. 문득 그 이상한 친구와 봄밤에 흐드러진 목련 아래 걷던 날이 떠오른다. 내년에도 우리 또 오자! 그랬었지. 아름다운 목련나무를 볼 때마다 그 밤 그 나무를 생각하고, 친구는 왜 그랬을까 하다가 여전히 나를 생각할까로 바뀌어, 오늘처럼 궁금한 날이 있다.
천천히 모퉁이를 도는데, 벌레 먹은 갈색 이파리가 춤을 추는 모과나무가 나를 반긴다. 어쩜, 모과가 이렇게 많이 달렸을까.
모과모과모과모과모과모과모과모과모과
모과가 내게 인사한다. 나도 나의 언어로 화답한다.
안녕안녕안녕안녕.
왠지 이곳이 낯설지 않다. 활짝 피었다 접힌 꽃봉오리째로 떨어진 무궁화가 나무 아래 윤슬처럼 반짝인다. 수년간 깨지고 썩어가는 메타세콰이어 열매도 곁에 사방으로 깔려있다. 주먹만 한 총천연색 일본목련 열매를 주워든다. 수그렸던 고개를 들면 나뭇가지 틈으로 볕뉘를 마주한다. 대각선에는 늘 내가 알던 빨간 공중전화박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오랜만에 다른 길로 와서는, 여기가 늘 오는 곳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마 나는 같은 길로 되돌아가거나 같은 길로 다시 찾아올 수 없을 것이다. 어쩌다 이곳에 오면 모를까. 학생들이 무궁화나무 아래서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피우며 핸드폰을 본다. 내 발아래 가득한 담배 연기는 날 천상으로 이끄는 듯하다. 데자뷔. 나는 무의식적으로 와야 할 곳에 왔다.
시계를 보는데, 벌써 출근할 시간이다. 이래서 성대 안에 들어오기가 싫다. 헐레벌떡 뛰기 시작한다.
첫째 기말고사 전 날, O언니가 애들 시험이 빨리 끝나야지, 언니가 죽을 것 같다고 말한다. 최근에 나는 돌숲에 자잘한 일들이 많아 내 한 몸 겨우 건사하는 중이었으므로 언니가 말하는 요지를 잘 못 알아들었다. 무슨 일 있냐고 물으니, 언니는 애들 내일 시험인 거 아냐고 되묻는다. 나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더니, 바쁜 것도 괜찮은 방법이네 하고 말한다. 그렇다고 언니가 안 바쁜 것은 아니다. 그러다 O언니가 밤에 잠시 보자고 한다. 요즘에 나는 언니와 아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다, 소파에서 일어설 컨디션이 아니라서 만날 수 없다고 솔직하지만 구구절절한 메시지를 보냈다.
한참 뒤에 언니는 내게 두 장의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왔다. 작년에 여름밤마다 버찌 연못에 해오라기가 쉬러 오는데, 올해도 오는 모양이다. 바위 위에 해오라기 사진 한 장과 나머지 한 장은 흰뺨검둥오리다. 일월 저수지에서 두 마리가 건너왔나 보다. 밤마다 마실 오는 해오라기를 미행해서 온 건지. 다른 데를 멀뚱히 쳐다보는 모습이 재밌다. 반가운 마음에 언니에게 돌숲 단톡방에 공유해도 되냐고 묻는다. 언니가 당연스럽게 안 된다고 말한다. 평소에 탐조를 즐기는 O 언니는 매번 아파트에서 발견한 새와 매미 사진을 공유하는 것을 즐기며 늘 오케이를 하는 사람이라 잠시 멈칫했다. 나의 거절에 감정이 상했나, 무슨 심정의 변화가 있나 별안간 생각이 들다가, 바로 알아차린다. 여기 쉬러 오는 그들을 공유했다가는, 어린 자녀가 많은 이 아파트에서 아이들은 밤마다 이 앞에 진을 칠지도 모른다. 새들의 아지트를 방해하면 안 된다. 언니는 사진만 보내고, 긴 말 없이 아니라고 말하기만 한다. 단 두 글자 거절을 나는 겨우 헤아려서야 O언니의 투박한 배려를 느낀다. 갑자기 담백한 언니가 좋다.
한 번씩 나는 다정한 굴레를 혼자 뒤집어쓰고, 이 세상 근심은 혼자 다 감당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내가 모르는 운과 공덕을 무시하거나 잊곤 한다. 어느 때에는 부정도 한다. 사람을 조금 물리고, 사람을 피해 걸으며, 소파에 널브러지는 날이 계속 이어지는 어느 날 불현듯 나는, O언니의 문자에 마음이 움직인다. 언니는 무더운 이 여름밤마다 얘내를 보러 나온단다. 내가 아침마다 커피를 핑계로 복면을 쓰고 걷는 것처럼, 퇴근한 밤에 언니는 집집마다 밝히는 불빛 아래에서 울타리에 기대어 해오라기와 흰뺨 검둥오리들을 계속 보고 있었을 것이다. 혼자 아파트 트랙을 돌고, 2차 번식기에 접어든 새의 인공 둥지를 살피며 중학생 아들을 둔 엄마의 고뇌를 홀로 삭히고 있지 않았을까.
돌숲에 불이 켜져 있다고 아직 돌숲이냐고 전화가 온다. O언니는 계속 만나고 싶은 내색인데, 아직 소파에서 뒹굴거리는 나는 좀처럼 사람을 대면할 기운이 없다. 대신 우리는 목소리로 만난다. 언니는 아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 데에 있어,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은 것 같다. 내가 잘난 아이들을 둔 게 아닌데도 내게 전화를 한 것을 보면, 언니는 뭔가 특별한 응원이 필요한 게 아닐지. 내가 그동안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 그 말을 건넨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언니.
누가 괜찮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리지 말자. 어슴푸레한 빛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우리의 인간성을 보여주자. 그게 당신이 할 일이다.
_<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53쪽
한동안 잊었던 흰뺨이랑 뿔논이랑 해오라기를 보러 일월 저수지로 향하는데 둥글고 레몬빛 도사리가 발에 걸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연둣빛이 빠지고 노란빛이 드러나는 은행잎이 바람결에 흔들린다. 은행나무에 은행이 대롱대롱 한가득 달려있다. 어디선가 왁다그르르 아이들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겨울에 가지만 드러내놓고 위용을 부리던 나무가 바로 은행나무였다는 것을 떨어진 도사리를 보고 알아차린다. 나는 이제 여름을 걷는데, 나무는 이미 가을일까.
웃음이 난다. 은행을 만지며 이 안에 든 시간을 생각한다. 나는 사계절 속에서 늘 눈앞에 당도한 한 계절만 안다. 우리는 한 계절 안에서 이미 다음 계절을 관통하고 있는 것인데도. 아니, 은행처럼 우리는 한 계절 안에서 이미 모든 계절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이 이면이 있고 다면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어떤 상황 앞에서 우리는 늘 제대로 보기란 힘들고, 알아차리기도 힘들며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그 점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앞에 보이는 일면을 믿어야 한다. 사물 면면이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믿는다는, 나의 주체적 행위가 더 중요하다 . 물론, 일면을 믿지만 우리는 한 번씩 이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어떤 극과 극이,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되고 끌어당겨 상황이 작용하고 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서로의 어떤 상황끼리 맞아떨어져 서로 충돌이 일어나야 방향이 움직인다.
그때 그랬어야만, 살아진다. 겪을 일을 겪은 뒤라야 지금에 당도한다. 체체하고 끌끌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내 이럴 줄 알았지. 오해를 하고 수정을 한다. 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선물 받은 모자를 쓰고 홀로 아파트 트랙 위에 다시 선다. 어둡고 둥근 캡 안으로 좁아진 세상만 밝다. 내 발만 보고 걷는데, 발 앞으로 은행이 다시 왁다그르르 굴러온다. 모감주나무 꽃이 틱 하고 떨어진다. 땅 위로 노란 별빛이 그득 쌓여있다. 문득 하늘을 올려본다. 푸른 하늘에 노오란 별이 계속 춤을 춘다. 멀리 파도가 들썩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둥근 세상이 너무 좁아 고개를 드는데,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셔 주춤한다. 그 사이 누군가 아는 체를 한다. 함께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오랜만에 만 보가 넘는다. 우리는 오늘을 함께 걸으며 어제를, 내일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감당한 시간을 짐작한다. 아침 9시인데도 해가 중천을 가리키는 양 우리는 헉헉대며 걷는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을 다 가리는 검은 썬캡을 쓴 울트라 우먼이 양산까지 쓰고 걷는 모습을 본다. 아무래도 조만간 저 썬캡을 사러 다이소에 같이 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영화<<와일드>>를 보고서 걷는다. 하루키의 달리기 책을 보고 걷는다. <계속 쓰기> 책을 보며 걷는다. <인간 본성의 법칙>을 보다가 걷는다. 아이들은 여름 방학을 기다리며 학교에 간다.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읽고 인증을 한다. 내게 어떠냐고 묻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근처에 미국자리공도 새롭게 발견했다.
연일 바람 한 점 눅눅한 폭염이 이어지다 오늘은 바람이 인다. 같은 길 위에서 어제와 다른 오늘을 감각한다. 모자를 벗고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두 어 달 두문불출한 친구가 썬글라스를 쓰고 모자를 쓴 채 지나간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지나간다. 앞만 보고 걷는 그녀를 미미짱! 부르니, 호들갑스레 썬글을 벗고 반가워하는 그녀를 보고 나도 웃으며 일어선다. 어디선가 구수한 은행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오는 듯하다.
삶은 대개 바로 거기 있지만, 지나친 자기확신에 사로잡힌 우리를 때려눕히는 것이 삶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이런 교훈을 오랫동안 배우고 겪어왔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견딜 수 있다. 우리는 더 낫게 실패한다. 우리는 자세를 바로잡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시작한다
_<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