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갑자기 비구름이 걷혔다.
잠결에 남편이 하루아침에 시원해지네,라고 혼잣말인지 내 자는 귀에 대고 한 소리인지 얼핏 듣고 깼다. 눈뜨자마자 하루 만에 그럴 리가 싶어 거실로 나가니, 정말 텁텁한 물기가 빠진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린다. 어제 베란다에서 바라본 전경은 분명 난운이 아파트들 위로 낮게 가득 내려와 완벽한 우기라고 생각했는데. 더운 날도, 비 오는 날도, 물도 좋아하는 나는 여름이 이대로 물러나는 게 아쉬워, 아이들을 얼른 등교시키고 바로 옷을 갈아입는다.
걷는다. 낚시꾼에게 낚시 포인트가 있듯이 나도 걸을 때면 꼭 찍는 경유 포인트가 있다. 대부분 남의 집 마당이나 가게 앞에 소소하게 가꾸는 살피꽃밭이나 올림꽃밭인데, 아파트 서문에서 나와 메가 커피숍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오가는 길이 꽤 볼 만하다. 부지런함을 기준으로 손에 꼽히는 살피꽃밭은 언제나 교회와 유치원 그리고 부동산이었다. 간혹 미용실이나 떡집, 식당도 구색을 갖춘 꽃밭이 있긴 하다. 어린이집은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유아들을 위해 화단에 옹기종기 알록달록한 모종들로 꽃밭을 시작하지만, 지속적으로 돌보는 게 어려운 것 같다. 봄에 딸기를 심은 표지를 보긴 하는데, 하얀 꽃이 핀 이후로 딸기가 달리는 경우가 잘 없었다.
다른 동네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우리 동네만의 특별한 살피꽃밭이 있는데, 육교 옆에 노천 술집을 표방한 치킨 가게다. 어떤 가게가 들어와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자리였는데, 이 치킨 집이 들어선 이후로 한여름, 한겨울만 빼면 나무 데크에 놓인 테이블은 늘 만석이다. 그렇게 바쁜 데도 봄이면 앞에 놓인 화분에서는 파스텔색 봄꽃들이 피고 지고, 난간에는 작고 연약한 행잉 식물이 즐비하다. 안 보이는 손이 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옆 라인에 사는 J는 느지막이 막내아들 등교 시키고 출근 전에 문 닫힌 치킨 가게 앞에서 작약을 보거나 특별한 수종의 장미꽃을 보러 간단다. 나도 올 3월부터 꼭 그 치킨 집을 찍고 모퉁이를 돌아 일월 도서관을 가거나 육교를 건너 다녔다. 치킨 집 장미가 다 진 뒤로는 육교 건너 LG 아파트 정원을 탐색하거나, 주택 단지에 마당이나 꽃밭을 탐색했다. 그러면 어느 지점에서 꼭 J와 그녀 아빠의 반려견 조이를 만나 서로가 탐색한 남의 집 살피꽃밭을 데려가 또 함께 한다.
주택 단지에 인상적인 주택이 두어 군데 있었는데, 한 곳은 소유 음식점 근처에 목련나무와 감나무가 있는 겨자색 단층집과 똑같은 구조로 지어진 감나무집과 또 한 곳은 그 옆에 옆에 자리한 정갈한 마당이 있는 빌라다. 그 동네에도 교회 마당에는 역시나 볼거리가 많았다. 비 내리는 날 물기 머금고 오므린 분홍 작약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 번은 교회 목사님인지는 모르지만 한 남성 분이 내게 고양이 화분에 담긴 다육이를 준 적이 있다. 다육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우선은 받아 들고, 이 동네를 계속 산책하다가 이 정갈한 마당 한편에 두고 왔더랬다. 이곳 주인장께서 잘 길러주시겠지 하는 흑심이 있었는데, 쓸고 닦은 정갈한 살피꽃밭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단정한 장독에 반들반들 윤이 나는 장독 뚜껑 위에 식물을 볼 때마다 내 마음마저 단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쉼이 오래 이어지지 않았는데, 어느 날 그 집 앞에 주차된 경찰차를 보고는 근처로 가기가 꺼려졌다. 경찰이 쉬는 시간이라면 방해하기가 싫었고, 혹시나 마당에 둔 화분을 보고 불쾌하거나 두려워한 집주인이 신고해 순찰을 요청했을 수도 있으므로 찔렸다. 아쉬웠지만, 경찰과 집주인을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그쪽으로는 걷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치킨 가게를 기준으로 육교 쪽 말고, 반대 방향인 성대 길로 올라가게 되었다. 평지를 좋아하는 나는 오르막길로 잘 가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접어든 오르막길에는 금귤 나무와 복숭아나무 등 다채로운 수목과 화초를 키우는 아름다운 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3월에 고목나무 같은 포도나무에서 싹이 나오고 5월 푸른 하늘 바탕에 연둣빛 별꽃이 피더라니. 그곳에 매일 들러 포도나무를 보는 게 낙이었다. 교회가 있나 보다 하고 다녔던 길은 교회 오른쪽 길에 회랑이 자리해 그 위로 포도나무 가지와 잎이 뒤덮고 있었다. 회랑 끝과 끝에서도 보고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지겹지 않은 정경이었다. 밤에도 생각이 나 아침에도 보고, 한밤에도 봤다. 건너편 유치원에서 바라본 교회 건물은 흰 십자가와 회랑을 감싼 포도나무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회랑의 도시 볼로냐가 부럽지 않았다. 정말, 포도나무 덕분에 찬란한 6월, 7월을 보냈다. 포도나무 한 그루가 나의 어느 한 계절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제 내 입 안에서 동글동글 시었던 포도가 가지에 매달린 채 삭고 있다. 찬연하게 부풀었던 마음이 그런가 보다, 그런가 보다, 끄덕이며 흙빛으로 쪼그라드는 포도알 아래를 지난다. 청아한 옥빛 산수국 꽃도 꺾일 듯이 가지가 치렁치렁하더니, 어느새 갈빛을 띤다. 산수국을 지나 초록 열매가 달린 금귤 나무와 붉은 열매가 달린 남천을 지나 회랑 사이를 걷는다.
대봉과 단감나무가 심어진 붉은 벽돌 담벼락 집을 지난다. 얼마 전부터 아스팔트 빈 틈에 닭볏 닮은 황금빛이 도는 맨드라미 꽃이 한 가지 올라와 존재감을 발한다. 이 집 앞에는 검은색 차 한 대가 늘 주차돼 있는데, 꼭 요 꽃 앞에 정확하게 주차한 데서 왠지 차주의 맨드라미를 향한 가만히 볼 줄 아는 마음 씀씀이가 재치 있게 느껴진다. 아스팔트 길을 뚫고 나온 맨드라미 요요한 자태도 눈길이 가지만, 그 맨드라미를 여름 내내 지키는 다정한 시선까지 상상되는 재미있는 길이다. 매번 있나 하고 가는데 여태 꼿꼿한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한동안 쨍하고 탄탄한 맨드라미 꽃이 이제 부석부석해 보인다. 가늘고 긴 연두색 이파리도 누래져 쳐진다. 이제 맨드라미도 씨를 퍼트려야 하니까. 작은 것일수록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나 보다.
한참 쪼그렸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 다시 걷는다. 진분홍 분꽃이 흐드러지게 열렸으나 꽃봉오리가 하나같이 돌돌 말려 쉽사리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어느 살피꽃밭에 닿는다. 이제나 저제나 나팔꽃 같은 얼굴을 보려나 했는데, 이제는 꽃봉오리가 후드득 떨어져 쥐똥같은 까만 열매까지 꽃받침 안에 수줍게 폭 싸여 있다. 돌숲 아이들에게 보여 주려고 까맣고 쪼글한 씨앗을 따고 있는데, 갑자기 한 아줌마가 내 시야로 불쑥 들어온다. 같이 딴다. 여기 주인인가 싶어 갑자기 소심해지는 마음에, 계속 따야 하나 손길이 느려진다. 그런데 무심히 분꽃 씨앗도 따고, 메리골드 씨앗도 따던 아줌마는 그걸 다 나한테 준다. 이렇게까지 필요는 없지만 떨떠름하게 받아 든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골목길을 걷는다. 알고 보니, 아줌마는 내가 존경하는 살피꽃밭을 둔 부동산 주인이었고 매번 이 길로 출근을 한단다.
이 부동산을 말할 것 같으면, 포도 교회 옆 모퉁이에 자리해 포도나무가 저절로 자라고 수박도 저절로 달리는 수확의 명당이다. 가게 앞에 깔린 아스팔트 도로 위에 노란 줄 경계에서 진분홍과 진노랑 채송화도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다. 어느 손 하나 그 채송화를 해치지 않아 노랗고 분홍 한 꽃이 여름 내내 뜨겁고 시커먼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흔들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부동산 살피꽃밭에는 화분마다 가지 지지대가 놓여 있는데, 그 꼭대기 끝에는 꼭 야쿠르트 병이 꽂혀 있다. 이게 뭘까 J와 궁금해하다, 아파트 베란다에 자신만의 살피꽃밭을 가꾸는 그녀가 먼저 맞혔다. 자신도 가지 지지대를 꽂으면 화분을 돌보다 가끔 얼굴에 찔릴 때가 있는데, 아무래도 다치지 말라고 꽂은 것 같단다. 듣자마자 무릎 팍, 감이 온다. 보이지 않는 손은 해치지 않아 다정하고 알고 보면 정겹고 지극한 마음 같은 것이었다.
부동산 사장님은 연필심 가루 같은 채송화 씨를 잔뜩 채종해 부동산 서류를 넣는 봉투에 넣어 내게 건넨다. 봉투에는 오늘 날짜와 씨앗이라고 쓰여 있다. 섬세하고 정확한 사람이다. 둘이 쪼그려 앉아 옹기종기 모여있는 화분을 쳐다본다. 최근에 풍선 같이 특이한 꽃봉오리가 열린 선인장이 하나 생긴 걸 알고 있었는데, 이름을 물으니 모른단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겠다고 하니, 어차피 돌아서면 잊는다고 하지 말란다. 그 사이 네이버는 이 선인장 이름이 '공작선인장'이라고 알려준다. 그저 웃기만 하는 사장님 보고 이 풍선이 터지면 공작새 꼬리 같나 봐요. 외우기 쉽겠는데요,라고 했으나 글을 쓰는 지금 막상 그 선인장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사진첩을 다시 뒤져야 했다. 그녀의 말이 맞네.
내처 나보고 안으로 들어오라는데 남은 아침 시간이 짧은 데다, 뭐라도 계약하고 와야 할 것 같아 선뜻 들어가지 못한다. 그랬더니 내 옆으로 와서 마주한 그 모습은 허연 밀가루 반죽 같은 둥근 얼굴에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데다가, 뽀글뽀글한 헤어 스타일, 외까풀인 두 눈은 사라지고, 붉은 입꼬리를 올리는데, 흡사 부처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갑자기 사장님 뒤로 후광이 비치며 부처님이 평안하고 자애롭게 웃으신다.
뭘 하냐기에 책방을 한다고 했더니, 나를 안쓰럽게 쳐다본다. 책 팔아서 돈이 되냐고 음료수라도 마시고 가란다. 그래도 좋은 일 하네요. 나도 애들 어릴 때 책 중고로 많이 사서 읽혔는데. 남 읽게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래요. 먹고살만하면 그냥 하는 거지요, 나도 잘 안 돼요.
또 와요, 집 사세요. 부처님이 사라진 눈으로 내게 미소 짓는다. 우리는 아쉬운 듯 몇 번이나 뒤돌아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그 뒤로 이 부동산 앞을 지날 때 신문이 며칠 꽂혀 있으면 걱정이 든다. 부처님도 가끔 내 생각하시겠지?
바람이 분다. 2년 만에 '산책' 콘서트로 돌아오는 김동률의 앨범을 무한 반복해서 들으며 성대로 걷는다. 노래를 따라 휘파람을 불며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한다. 올여름 내내 내 걷기 동료는 낮게 드리운 먹구름과 숨 막힐 듯한 습기와 찐득찐득한 땀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바람이 너무 좋아, 아침이고 밤이고 걷지 않고는 못 배기는, 너무나 아까운 바람 안에서 바라본 지난 여름의 걷기 동료는 다름 아닌 남이 돌보는 살피꽃밭 안에 시시때때로 피고 지는 꽃이었고, 꿈틀꿈틀 자라고 있는 생명이었고, 보이지 않는 손들이었다.
걷다가 어느 낮에(밤에도) 캔맥주를 땄던 벤치에 앉아 바람을 느낀다. 청빛 백합이 지고, 분홍빛 루드베키아가 진 누군가의 살피꽃밭에는 지지대를 따라 오르는 나팔꽃이 미풍에 나부낀다. 그 너머 저어기 즈음 자리할 모과나무를 짐작하며 문득 볕이 따사롭다고 생각하는데, 내 발아래로 모자를 쓴 아직 푸른 도토리가 잔뜩 떨어져 뒹군다. 그 위로 목줄을 한 강아지가 산책한다.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뒤따른다.
한 발짝 성큼 들어온 가을 안에서 나의 걷기 동료는 과연 어떤 살피꽃밭일까. 음악도 있고, 달도 있고, 바람도 있는, 아니 느낄 수 있는 그런 세계였으면. 휘영청 보름달 뜬 오늘 밤, 걷고 뛰는 모든 사람이 멈추고 둥근달을 보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나도 달을 보며 말한다. 내가 나에게, 지나간 시간을 두고 그만 아까워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