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탁 진 Jun 10. 2023

무지개 너머  행복을 찾아가는 시간

꿈을 이루는 마음

                               무지개 너머 행복을 찾아가는 시간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를 한 지도 거의 한 달이 되어간다. 아내는 낡고 오래된 것, 쓰지도 않고 여기저기에 처박혀 있는 것들을 버리고, 중고로 팔고 하느라 이사 가는 날까지 온 집안 구석구석을 쑤시고 다녔다. 


      하나, 둘 정리하고 처분하던 가운데 오래된 피아노가 아내의 눈에 딱 걸리고 말았다. 우리 식구들 중에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딸과 나뿐이었다. 하지만, 딸은 직장을 찾아 서울로 독립해서 떠난 지 오래다. 아직 제 피아노를 가져갈 만큼 큰 집에 살지도 않고,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가져갈 거라며 팔지 말라고 했다. 


  나도 피아노 건반을 열어보지 않은지도 오래되었다. 그러고 보니 한 5, 6년은 된 거 같다. 그렇게 우리 집 피아노는 작은 방 한 구석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내내 먼지만 덮어쓰고 있었으니... 아내의 눈에 낡고 오래된 피아노는 그저 보기 좋지 않고, 이삿짐 비용만 늘이는 물건처럼 보일 수밖에... 


  여기저기 흠집도 나고, 색도 바래고, 또 오래 썼으니 처분하고  나중에 시집갈 때 새 피아노를 사면 안 되겠느냐고 아내는 여러 번 말했지만, 딸은 그 피아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사실 말을 안 했지만, 나도 피아노를 처분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아주 가끔 한 번씩 쳐 보는 것이지만, 있으면서 자주 안 치는 것하고 없어서 못 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뭐 피아노를 잘 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많이 아쉬울 거 같아서... 결국, 우리 피아노는 딸의 반대와 겉으로 말하지 못하는 나의 아쉬움 덕에 살아남아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내가 처음 피아노를 배운 게 내 나이 마흔아홉 살 때였다. 이미 다 늙은 나이에 무슨 피아노냐 싶겠지만, 그것은 가슴 한 구석에 처박혀서 오랜 세월 잠자던 또 하나의 다가갈 수 없는 무지개였다. 


  요즘 어린아이들은 웬만하면 초딩 빼, 빠르면 유치원 다닐 때부터 피아노학원을 다닌다. 우리 아이들도 역시나 그랬다.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중고 피아노를 사서 거실 한편에 턱 하니 놓아두고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걸 보며 가슴 뿌듯하게 바라보곤 했다. 


  내 어린 시절에는 피아노가 부의 상징이었다.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를 할 때면, 

  “집에 전축이 있는 사람 손 들어 보세요...”

  “집에 텔레비전 있는 사람?” 

  “자가용 있는 사람?” 

  “피아노 있는 사람?”

  선생님은 우리에게 손을 들게 했다. 전축이나 텔레비전 까지는 그래도 몇몇의 손이 올라갔지만, 자가용이나 피아노에서는 70여 명의 아이들 중에서 겨우 한 두 사람의 손만 올라갔다. 


  아이들은 누가 손을 드는지 궁금한 눈으로, 한편으로는 부러운 눈길로 두리번거리며 손을 든 아이를 쳐다보았다. 나도 역시 손을 든 아이를 바라보는 아이들 중의 하나였다. 


  우리 집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자라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럭저럭 먹고 살 형편이 되긴 했지만, 피아노가 들어오기에는 여러 가지로 분위기가 맞지 않은 것 같았다. 


  거실에 있는 전축에서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 흘러나오고, 김희갑의 불효자는 웁니다 같은 소위 뽕짝 음악들이 스피커를 울려대었다. 내가 철이 좀 들었을 때는 팝송이나 클래식 음반을 사다가 틀곤 했다. 


  피아노란 건 역시 여학생에게나 어울리는지, 누나는 피아노를 배운다며 까만 콩나물이 가득 그려진, 얇고 커다란 교본을 들고 다니며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는 것 같았다. <바이엘 교본>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그다지 오래 다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우리 집에 피아노가 없었으니... 연습을 제대로 못 했을 테니... 실력이 나아지지도 않았을 건 분명했다. 


  어차피 피아노 없이 피아노를 배운다는 건 무리였고, 힘들 게 뻔하니 나는 그저 피아노는 부잣집 여학생들이나 어릴 때부터 배울 수 있는 특별한 분야라고 생각했다. 대신에 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협주곡 <송어>의 음반을 사서 들으며 아쉬운 위로를 삼고, 피아노란 저 멀리 무지개 너머에 있어  다가가지 못하는 꿈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고 현실과 부딪치며 살다 보니 그런 건 까맣게 잊고 살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살다 보니, 우리 아이들에게도 피아노를 가르쳐야 했다. 음대에 가서 음악가나 연주자가 될 생각도 없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마치 통과의례처럼 피아노학원을 다녔다. 태권도도 배우러 가고, 미술학원에도 다니고... 학교 공부도 잘해야 하니 공부학원도 다녀야 했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불쌍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피아노를 배우는 걸 보면 부럽기도 했다. 


  나는 가끔씩 아무도 없을 때 피아노 앞에 앉아 가만히 건반을 눌러보았다. 한 때는 통기타를 열심히 쳤던 대학시절이 있던 터라 내 머릿속에는 포크가요의 멜로디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손가락 하나하나 움직여보았다. 


  도파솔 라솔파솔...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단지 한 손가락씩만 치는 멜로디긴 해도 뭔가 치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저 

정말 내게는 그림의 떡이 되어버린 피아노가 한 번씩 곁을 스칠 때마다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심심해. 나랑 놀아 줘... 노래를 부르고 싶어...”

  나는 그저 피아노 앞에 서서 가만히 어루만질 뿐 아무런 음악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아이들이 자라서 피아노가 재미 없어지고, 그것 보다 학교공부가 더 중요해지니 자연스레 우리 집 피아노는 서서히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쳐야 할 아이들이 손을 대지 않으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벙어리 피아노가 되어 갔다. 이사를 갈 때마다 피아노는 제법 큰 이삿짐이 되어 특별대우를 받아 이사비용만 부풀렸다. 가뭄에 콩 나듯이 치는 딸과 그저 멜로디만 뚱땅거리는 나는 피아노를 처분하자는 아내의 말에 힘없는 반대파일 수밖에 없었으니... 그래도 딸내미가 저 시집갈 때 가져갈 거라는 말에 피아노는 여전히 우리 집에 살아있게 되었다.


  오랜 시간 피아노는 살금살금 먼지가 내려앉았다.  점점 말도 없어져 갔다. 그러던 중, 다시 내 가슴 한편에 묻어두어야 했던, 피아노에 대한 미련의 불쏘시개에 불씨를 붙여준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꿈일지라도 가슴에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지인의 권유로 가곡교실에 가게 되었는데, 쉬는 시간에 차 한 잔을 마시며 옆 사람과 이야기 중에, 우연히 오래전 피아노를 배워보려 했다가 피아노학원 원장만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 소리에 사람들이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데 갑자기 맑고 젊은 아가씨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그녀는 가곡교실의 피아노 반주 선생님이었다. 나는 스스럼없이 피아노를 가르쳐줄 수 있다는 말에 아주 잠깐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우리는 잠시 자리를 비켜나서 대화를 나누고 레슨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저 나는 피아노에 대한 미련과 열망을 생각만이 아니라 직접 한번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었기에 그리 잘 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될지 안 될지는 일단 해보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나의 말에 피아노 선생님은 방글방글 웃으며 자신 있게 나를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나이가 쉰을 눈앞에 둔 늙은 제자를 말이다...


  다음날부터 일주일에 두 번, 나는 선생님의 집에 가서 한 시간 정도 레슨을 받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왕왕 짖어대던 강아지가 있었는데, 이름이 ‘헤헤’라고 했다. 하얀 털이 북실북실한 그놈은 처음에는 내가 마치 저희 집에 뭘 훔치러 온 도둑취급을 하더니 몇 번 보고 나니 나를 보면 정신없이 달려들어 내 손에 침을 묻혀가며 아는 척을 했다. 놈은 내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때면 언제 왔는지 내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의 서투른 연주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렇게 그놈은 나의 유일한 청중이 되어주었다.  


  피아노는 오른손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왼 손도 같이 반주를 해야 하는 것이기에 나는 미리부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쩔쩔매었다. 


  오른 손가락부터 하나, 하나 올라가고 내려가고... 손가락마다 정해진 자리가 있고... 왼 손도 역시, 양손을 같이 또 따로 움직여야 했으니, 내 하나의 머리를 열 개의 머리로 나누어 열 개의 손가락 끝에 각각 배분을 해야 했다. 뭐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손가락들은 저마다 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였다. 아, 손가락이 마비되는 거 같기도 하고...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하지만, 어찌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있을까. 그저 열심히 선생님 말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일 뿐이었다. 


  정신없이 건반을 누르다 보니 한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갔다. 그래도 예전에 통기타를 친 적이 있었기에 화음이나 코드 등과 같은 음악이론은 알아듣기가 조금은 수월했다.


  앞으로 어떻게 레슨을 할 것인지 이야기했다. 어차피 내가 피아노를 배워 음대를 가거나 소위 피아니스트란 사람이 될 것도 아니고, 그냥 취미로 혼자 즐기는 것에 만족할 것이니까 우리가 잘 아는 노래나 연주곡을 선정해서 하나씩 배워나가기로 했다. 


손가락의 기본기를 익히고 난 뒤에 처음으로 시작한 곡이 <에델바이스>였다. 오른손 멜로디부터 익히고, 나의 손가락들이 다 외우고 나면 왼손 반주를 연습했다. 하루에 몇 소절씩 더디게 진도가 나갔다. 


  피아노를 치면서부터 팍팍했던 내 삶에 스멀스멀 아지랑이 피어나듯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연둣빛 새싹이 돋아났다. 산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은 힘들었지만, 내 손을 잡아주며 도와주는 선생님이 있어 나는 한 걸음, 한 글음 포기하지 않고 걸음을 떼어놓았다. 


  피아노 건반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산새가 되어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고,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이 되기도 했다. 가다가 힘이 들면 조그만 바위에 걸터앉아서 쉬기도 하고, 함께 따뜻한 커피도 마시고, 불어오는 봄바람에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히기도 했다. 길 가에 피어나는 봄꽃들도 함께 걸어가는 우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딸이 집에 없는 시간을 틈타 연습을 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틀리지 않고 쳐야 다음 악보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래도 내 손가락들은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한 소절, 두 소절 진도가 나가고, 한 달쯤 되었을 때 알프스 산의 <에델바이스>는 드디어 내 게로 와서 꽃이 되어주었다. 비록 어설픈 남자의 서투른 손가락에서 피어나는 꽃이긴 해도 아름다운 향기를 솔솔 풍기는 듯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강아지 헤헤도 나의 완성된 연주를 들으며 축하라도 하는 듯이 헥헥거리며 내 손을 핥아주었다.


  처음에는 내가 과연 한 곡이라도 제대로 마스터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고 막막했었는데, 어쨌든 노력하고, 반복하고, 힘들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니 내 손에 한 송이 예쁜 에델바이스가 피어났다. 비록 졸졸 흐르다 바위에 부딪쳐 순간 멈추었다 가기도 하지만 골짜기 시냇물은 끝까지 흘러갔다. 연주를 다 마친 순간, 내 얼굴에 피어나는 감동적이고 가슴 벅찬 미소를 어찌 감출 수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시작된 나의 봄은 계절이 바뀌어 더운 여름이 되었을 때는 시원한 여름날의 소야곡을 배웠지만, 제목 그대로 나의 손가락들이  그다지 시원스럽게는 움직여주지 않았다. 무더위에 덜덜거리는 선풍기 바람처럼 내 음악은 땀을 줄줄 흘렸다.


  가을 거리에 낙엽이 뒹구는 날이면  G선 상의 아리아를 연주했다. 아니, 배웠다. 시간이 지나가고, 계절이 지나가면서 나는 한 곡, 두 곡 진도를 나아갔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제는 기억력이 떨어져 가는 나이인지라 새로운 곡을 배우면 전에 배운 것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손가락의 기억력과 움직임이 가물거리곤 했다. 그래, 현재에 충실하자...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이런 마음으로 그저 피아노 치는 시간이 좋았다.   


  찬바람 불며 간간히 하얀 눈발 날리는 날에는 비발디의 겨울 2악장의 멜로디가 나풀나풀 눈송이를 춤추게 했다. 춤추는 눈송이들은 아마 내 더듬거리는 연주에 박자를 맞추느라 고생 꽤나 했을 거다....  


  할 수 있을까 하던 나의 피아노는 시간이 흐르면서 높고 아름다운 산봉우리를 하나 둘 정복해 나갔다. 아, 목동의 피리소리도 들리고, 헝가리 무곡의 신나는 춤도 추고, 놀라운 하이든의 교향곡도 울려 퍼졌다. 어쩌면 금세 끝이 날 것 같았던 나의 피아노교습은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계속되었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더니, 어느새 5년 동안 이어졌다.


  그 사이에 아가씨였던 선생님은 멋진 남자를 만나 교회에서 행복한 결혼식을 했다. 두 사람이 함께 무지개를 찾아 나가려는 밝은 모습을 보니 영화 <사랑과 영혼>의 주제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스메타나와 이사도라, 노사연의 만남 등등 그동안 모두 16곡이나 배웠다. 


  내가 마지막으로 배운 것이 <오버 더 레인보우>였다. 거의 틀리지 않게 연주할 때쯤 선생님은 동영상을 찍자고 했다. 동영상 사이트인 YOU-TUBE 자기의 채널에 올릴 거라고 했다. 막상 영상을 찍는다고 하니 잘하다가도 중간에 멈칫 틀리기도 하고, 갑자기 손가락이 저 혼자 멈춰버려 서너 번의 시도 끝에 어설픈 연주 동영상을 완성했다. 강아지 헤헤도 출연한다며 왔다 갔다 소음을 보태었다. 역시 카메라증후군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제일 마지막에 배웠던 곡이라 그런지 아직까지 이 악보는 내 손가락들이 기억하고 있어서 피아노 선생님과 인연이 다한 지금도 한 번씩 홀로 연주를 해보곤 한다. 희망의 무지개를 찾아 나서는 아이처럼 가슴 설레고, 어둡고 험난한 미지의 세계로 향하던 나의 발길에 평화롭고 따뜻한 길잡이가 되어 준 피아노와 선생님이 있었기에 나에게는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씩 레슨을 받으며 즐거웠던 시간들이 이제는 추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혼자서 가끔씩 쳐보기는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시들해져 갔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피아노 건반에서 점점 손과 마음이 멀어져 갔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우리 집 피아노는 음악이라는 제 모습을 잃어버리고 그저 묵직한 클래식 가구로만 남아있다가, 하마터면 고별 행진곡을 끝으로 우리 곁을 떠날 뻔했다.


  이사 온 새로운 집에서 나는 다시 피아노 건반을 열고 오래전에 배웠던 음악을 더듬거리며 연주해보려고 한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뚱땅거리는 소리가 혹여 이웃집에 소음으로 들리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조심스럽게 건반을 두드려본다.


  하얀색과 검정 색의 조화, 오른손과 왼 손의 화합, 높은 음과 낮은 음이 서로 도와주고 끌어주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하모니가 음악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열 개의 손가락과 오른 발의 페달까지 각자의 순서와 역할에 충실할 때 가슴을 울리는 음악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듯이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작게, 필요할 때는 빠르고도 크게 악상에 맞춰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에 리듬과 멜로디를 주어야 삶이 더 풍요롭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 순간만큼은 복잡하고 머리 아픈 현실세계를 떠나 자연 속에서 홀로 조용히 산책길을 걷는 듯하다. 피아노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물러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피아노는 또 하나의 소중한 인연으로 남아있다.


  오늘도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어설픈 연주를 하느라 나의 손가락들를 힘들게 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로 생긴 가족,  곶감도 아니고 홍시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