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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Dec 05. 2021

[동화]  시간을 팝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간을 팝니다.


  경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학원에 갈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게임은 끝이 나지 않았지만 호랑이 같은 원장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라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을 보고 있을 때는 그렇게나  더디게 가는 시간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을 때는 왜 그리 빨리 가는지    항상  불만이었다. 


  경호는 오늘도 속으로 투덜대며 게임방을 나와 학원을 향해 걸어갔다. 횡당보도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길 건너편 상가 유리창에 붙어있는 광고문을 보았다. 거기에는 <시간을 팝니다>라고 써져 있었다. 경호는 길을 건너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눈을 똑똑히  뜨고 다시 보았지만 분명히 거기에는 시계를 파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판다고 써져 있었다. 


  경호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광고문이 붙은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조그만 가게 안에는 작은 책상과 소파가 놓여 있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가 라면을 먹고 있었다. 혹시나 시계를 파는 가게가 아닐까 하여 안을 훑어보았지만 안에는 벽시계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다.


  경호의 눈이 막 라면 그릇을 들고 국물을 마시던 아저씨의 눈과 마주쳤다. 며칠 동안 수염을 깎지 않았는지 아저씨의 얼굴은 삼국지 게임에 나오는 장비 같았다. 경호를 발견한 아저씨는 씨익 웃고는 손을 까닥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경호는 그냥 가려다 궁금증이 일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너, 무슨 일로 왔니?"

  "저어, 바깥에 붙여 놓은 거 말인데요, 혹시 잘못 적힌 거 아닌가요? 시간을 판다고 해 놓았던데요."

  아저씨는 경호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시커멓게 자라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음, 그건 잘못된 게 아니란다. 나는 분명히 시간을 판다고 써 붙였다. 왜? 너도 시간이 필요하니?"


  경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간을 판다는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시간을 판다는 것일까? 시간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데. 또 시간은 상자에 가두어둘 수도 없는데 어떻게 시간을 판다고 하는 걸까? 경호는 점점 호기심이 생겨났다.

  "내가 보니 너도 시간이 필요하구나. 놀고 싶어도 시간이 없고, 매일같이 학교에 가고, 학원에도 가야 하고, 피아노니 컴퓨터니 너희 엄마가 너를 놀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구나. 그렇지?"


  경호는 아저씨가 하는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사실 경호는 마음 놓고 놀 시간이 없다. 경호가 제일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도 실컷 해 볼 수가 없다. 매일 꽉 짜인 시간표대로 이 학원 저 학원 철새처럼 옮겨 다녀야 했다. 


  경호는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 아니라  쉰 시간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컴퓨터 게임도 하고, 아이들과 축구도 마음대로 하고, 텔레비전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경호가 원하는 시간을 판다고 하니 학원에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그런데 어떻게 시간을 살 수 있나요?"

  아저씨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네가 시간을 살 테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시간을 팔지.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니?"

  경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우물쭈물거렸다.

  "저어, 아저씨, 돈이, 없는데요."

  아저씨는 씨익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돈? 돈은 필요 없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시간을 사려고 하겠지. 나는 시간을 돈을 받고 팔지 않는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줄 테니 너는 나에게 너의 마음을 다오. 순수한 마음 말이야."

  경호는 시간을 받고 마음을 준다는 말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경호가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는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한 시간, 아니, 세 시간만 주세요."

  아저씨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자아, 그럼 이제 너에게  세 시간을 주겠다. 그 대신 나는 너의 마음을 세 뭉치 가져가겠다. 이제 네가 이 가게를 나가서 시계를 보아라."


  아저씨는 경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냥 한 번 경호를 쳐다보며 웃어주기만 했을 뿐이다. 경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호는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문을 나섰다. 그리고 아저씨의 말대로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들여다보던 경호는 깜짝 놀랐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학원에 가야 할 시간인 4시였는데 지금은 시계가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경호는 시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다시 들여다보았지만 분명 경호의 시계는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학원에 갈 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 남았다. 정말 경호는 세 시간을 얻은 것이다. 경호는 신이 나서 게임방으로 달려갔다.


  다음날, 경호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다시 시간을 파는 가계로 갔다. 혹시 가게가 없어졌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가게 앞에는 여전히 <시간을 팝니다>라는 광고문이 붙어 있었다. 경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 너 또 왔니? 또 시간을 사려고? 그래, 오늘은 몇 시간이나 사려고?"

  경호는 아저씨에게 다섯 뭉치의 마음을 주고 다섯 시간을 샀다. 시간을 파는 아저씨는 싱글벙글 거리며 즐거워했다. 경호도 다섯 시간 동안 컴퓨터 게임을 할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 입이 절로 벌어졌다. 왜 진작에 이런 곳을 알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마저 들었다. 시간을 산 경호는 게임방을 향해 달려갔다.


  경호는 매일같이 마음을 주고 시간을 샀다. 점점 경호가 사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런 만큼 컴퓨터 게임에 점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게임을 한두 시간씩 하던 것이 점점 늘어나 이제는 대여섯 시간씩 해도 마음속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면 경호는 다시 시간을 파는 가게로 달려가 마음을 주고 원하는 대로 시간을 샀다. 시간을 사는 것은 아주 간단하고 쉬웠다.


  오늘도 경호는 시간을 파는 가게로 가고 있었다. 경호는 자기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샀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경호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고, 손가락도 저리고 아팠다. 그러나 이미 컴퓨터 게임에 중독이 되어버린 경호는 자신도 모르게 시간을 파는 가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때? 시간을 마음 놓고 살 수 있으니 좋지? 그래, 오늘은 또 얼마나 시간을 줄까? 네가 원하는 대로 줄게. 하하하!"


  아저씨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저분하게 보였던 장비의 수염도 없어졌고, 머리카락도 단정해졌고, 눈동자에는 초롱초롱한 생기가 돌고 있었다. 아저씨는 예전보다 훨씬 젊어졌다. 그와 반대로 경호는 날이 갈수록 피부가 거칠어졌고, 눈동자도 풀리어 힘이 없어 보였다. 또한, 머리카락도 희끗희끗하게 새치도 났다. 경호는 오로지 컴퓨터 게임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경호는 학교에 가지 않은지가  꽤 오래되었다. 그러고 보니 학원에도, 집에도 가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요즘은 거의 하루에 스무 시간씩, 서른 시간씩 시간을 사서 게임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경호는 자신의 얼굴에 수염이 나고 있다는 것도, 하나 둘 주름살이 생겨난다는 것도 몰랐다. 


  경호는 게임을 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시간을 파는 가게로 갔다. 가게 앞에 도착하니 가게는 문이 닫혀 있었다. 한 번도 가게의 문이 닫혀 있었던 일이 없었는데 하며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경호가 몇 시간을 가게 앞을 왔다 갔다 하며 가게문이 빨리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 하나가 경호 앞으로 걸어왔다.

  "이제 이 가게는 더 이상 문을 열지 않아. 아무리 기다려 봐도 소용없어. 하하."

  경호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생글거리며 비웃듯이 바라보았다. 아이가 왠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를 알아보겠니? 그래, 나는 여기서 시간을 팔던 사람이지. 나는 네 덕분에 다시 어린이로 돌아갈 수가 있었어. 나는 어릴 적에 책보다는 만화책을 좋아했지. 그래서 매일같이 만화방에서 살다시피 했지. 나는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며 살았어. 뒤늦게 어른이 되어서야 나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어 버렸지. 나는 어떻게 하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방법을 하나 생각해냈지. 어린이에게 시간을 팔고 잃어버린 동심을 되찾을 수 있는 묘안을 말이야. 네가 마음을 주고 사갔던 시간들은, 사실은 너의 미래의 시간들이었어. 미래의 시간들을 당겨 쓴 너는 네 자신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버렸지. 자, 저 거울에 비친 네 모습을 봐. 너는 이제 동심이 없는 어른이 되었어.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나는 간다. 하하하!"

  아이는 웃으며 뒤돌아 갔다. 


  경호는 가게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수염이 덥수룩하고, 행색이 초라한 아저씨 한 사람이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경호는 자신도 몰라보게 변해버린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단 며칠 사이에 노인네가 되었던 것이다. 경호는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멍하게 유리창만 바라보았다. 


  다음날 오후, 학교 교문 앞에서는 늙수그레한 노인이 돗자리를 깔아놓고 앉아 하교를 하는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자아, 여러분! 놀고 싶어도 시간이 없고, 시험공부하고 싶어도 시간이 모자라 공부를 못 하는 학생들에게 시간을 팝니다. 돈 없어도 시간을 살 수 있어요. 어서어서 이리 오세요! 아주 간단하게 시간을 사 가세요. 늦으면 시간 없어요, 없어!"


  아이들은 무슨 소린가 싶어 모여들었다. 노인은 아이들 속에서 짝꿍인 미정이를 발견하고 반갑게 말했다.

  "미정아, 나야 나. 모르겠어? 경호야. 자세히 좀 봐."

  미정이는 손을 잡으려고 하는 노인을 피해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다른 아이들도 머리에다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하나 둘 흩어졌다.

  "아무래도 정신이 나갔나 봐."

  "도대체 시간을 어떻게 판단 말이야? 이상한 할아버지야. 학원 늦겠네.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빨리 가자."  


  미친 사람 취급하는 아이들을 보며 노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다시 어린이로 돌아가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노인은 다시 힘을 내어 아이들을 소리쳐 불러 모았다. 

  "황금 같은 시간을 팝니다! 시간은 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돈 없이도 시간을 살 수 있습니다. 문방구에도 없고 백화점에도 없고, 물론 인터넷 쇼핑몰에도 팔지 않는 시간을 제가 팝니다. 어서 오세요! 오늘 이 시간이 지나면 살 수 없어요!"


  아이들은 고래고래 소리치는 노인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피식 웃는 아이,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는 아이, 혀를 쯧쯧 차며 지나가는 아이, 아무도 노인의 돗자리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때, '호르르르! 호르르르!'하고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관이 노인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집이 어디세요? 신분증 안 가지고 다닙니까?"     

  경호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있었다. 경찰관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을 말했지만, 젊은 경찰관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경호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시간을 팔다니요?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주민번호를 말해보세요. 아니면, 집 주소를 말하시든지..."


  아직 초등학생인 경호가 주민등록증이 어디 있겠는가.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경찰관이 답답했지만, 경호가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긴 했다. 


  그러나, 그건 분명 사실이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지 갑갑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집 주소를 가르쳐줄 수도 없었다.  치안센터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은 머리카락이 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살도 여기저기 보이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엄마, 아빠가 자기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늙은 노인이 된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 할 것이다. 경호는 빨리 시간을 팔았던 그 아저씨를 찾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아야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경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고 있는데, 한쪽에서 시끄럽게 소란이 일어났다. 술 취한 아저씨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경호를 조사하던 경찰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갔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소란을 피우는 아저씨에게 돌아가 있었다. 경호는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몰래 치안센터를 빠져나와 황급히 골목으로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 숨을 헐떡거리며 동네 공원 벤치에 걸터앉았다. 평소 달리기라면 다른 아이들에게 지지 않았는데, 노인이 되어서 그런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혹시나 경찰관이 자기를 잡으러 따라오지나 않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군데군데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무사히 도망을 치기는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딜 가서 그 아저씨를 찾는단 말인가? 해는 어디로 갔는지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왜앵~'하고 경호의 앞을 지나가던 스쿠터가 거리를 돌아다니던 강아지를 피하려다 그만 우당탕 미끄러지고 말았다. 스쿠터는 길 한쪽에 나동그라져 처박혀버렸고, 헬맷을 쓴 사람은 길바닥에 쓰러졌다. 경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으로 갔다. 


  "괜찮아요?"      

  청년은 경호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많이 다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긁힌 팔꿈치에서 피가 조금 나고 있었다. 경호는 주머니를 뒤져 휴지를 꺼내 닦아주었다. 


  "아,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청년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경호도 머리를 숙였다.


  청년은 쓰러진 스쿠터를 바로 세우고 뒷자리에 들어있는 물건을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경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부르릉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경호는 벤치로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놓여 있는  벤치에는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할아버지도 있고, 유모차를 들여다보며 미소 짓는 할머니도 있고, 아예 자리에 드러누워 자는 사람도 있었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개나 고양이도 보였다.      

  경호는 막막했다. 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상한 노인이라며 문도 열어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꼬르륵 뱃속에서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밥을 먹은 게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갈 곳도 없고, 경호는 눈물이 핑 돌았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 시간을 팔라는 그 이상한 아저씨의 꼬임에 넘어간 자기가 밉고 후회스러웠다.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부르릉 소리를 내며 스쿠터가 경호 앞에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좀 전의 그 청년이 스쿠터를 세워놓고 경호에게 다가왔다. 청년은 종이봉투를 내밀며  어색하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할아버지, 이거 드세요. 좀 식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먹을 만할 거예요..."


  "아니, 왜 배달 간 게 아닌가요?"


  "아, 예... 늦게 왔다고, 넘어졌을 때 상자가 찌그러졌다며 못 받겠다고 해서요..."


  경호가 받아 든 상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날개를 활짝 펴고 힘자랑이라도 하는 닭이 그려져 있는 걸 보니 치킨인가 보다. 청년은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갔다.     

  마침 배도 고팠는데 잘 되었다며 치킨 한 조각을 꺼내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닭고기가 있었던가? 경호는 순식간에 서너 개의 치킨을 먹어치웠다. 


  "야옹~~“


  길고양이 한 마리가 경호를 올려다보며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경호는 길고양이에게 치킨 한 조각을 던져주었다. 고양이는 치킨을 물고 더 어디론가 사라졌다. 


  "멍멍. 낑낑~~"


  어느새 경호 앞에 행색이 허름한 강아지 한 마리가 불쌍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너도 한 개 먹어라~~“


  강아지는 경호가 던져준 치킨을 물고 저 멀리 사라졌다. 경호는 주위를 둘러보다 벤치에 누워있는 아저씨에게 갔다. 


  "저, 아저씨... 이거 좀 드실래요?"


  부스스 일어난 아저씨는 경호가 내민 치킨 상자를 보고 입맛을 다시며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 경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자리로 돌아온 경호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경호는 꿈을 꾸었다. 엄마, 아빠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며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경호는 큰 소리로 엄마를 불러보았지만, 아빠 앞에서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했다.  잠에 빠져 든 경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 보세요, 영감님! 일어나세요..."


  경호는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여기저기에서 맑은 새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경호가 누워있는 벤치 앞에 서 있었다.


  "이거, 이 치킨 상자 버릴 건가요?" 


  노란 조끼를 입고, 손에는 빗자루와 마대자루를 든 두 할머니가 경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할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어제 먹었던 치킨 상자가 발치에 놓여있었다. 벤치에 누워자던 아저씨를 돌아다보니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치킨을 다 먹고 나서 빈 상자를 다시 경호가 잠든 사이에 자리로 갖다 놓았나 보다.  


  할머니들은  노인일자리사업에서 거리청소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경호의 할머니도 얼마 전부터 일을 하러 다닌다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두 할머니는 저 상자를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말똥 한 눈망울로 경호를 쳐다보았다. 


  "아, 예... 가져가셔도 됩니다..."


  할머니들은 상자를 마대자루에 넣고 주변을 빗자루로 쓸고는 경호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 다른 곳으로 갔다.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에는 '쯧쯧쯧... '거리는 표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할머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경호는 자기만 보면, "어이구, 내 새끼..." 하며 반가이 맞아주시던 할머니가 생각나서 눈에 눈물이 맺혔다. 


  경호는 공원을 나와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사란들에게 시간을 팔 수 있을까? 지나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누가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 궁금한 얼굴로 길을 걷다가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라 급히 발걸음을 서둘렀다.      

  경호는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타임 PC게임방>이라고 써져 있었다. 경호가 자주 갔던 게임방이었다. 어쩌면 자기처럼 게임에 빠져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올라 2층 게임방을 들여다보았지만, 어른들만 몇몇 자리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시간이 남아돌아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하품을 하기도 하고, 컵라면을 먹으며 모니터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기도 하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거기에 경호 같은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경호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왔다. 


  길을 걷다 보니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타났다. 강바람이 불어와 경호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멀리 하늘에는 흰구름이 여기저기 떠다녔다. 다리 아래 강물은 흐르는 건지 멈추어있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경호는 천천히 다리를 건너다가 다리 난간을 붙들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갈색 양복을 입은 그의 얼굴은 어둡고 무거운 표정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다리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만 내려다보던 그 사람은 한쪽 다리를 들썩거리며 심한 갈등에 몸을 떨고 있었다. 경호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아저씨, 잠깐만요..." 


  남자가 경호를 돌아다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숨을 다급하게 쉬고 있던 그는 시원한 강바람 속에서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경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제게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아니, 제가 시간을 나누어 드릴까요?" 


  남자는 무슨 말인가 싶어 멀뚱히 경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시간을 나누어준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아무래도 이 사람이 지금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호는 먼저 대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저씨, 무슨 사정이 있는지 제게 말씀해 주시면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경호의 말에 그는 어깨를 늘어떨이며 힘없이 난간에 기대어 섰다. 


  "오늘 오후 다섯 시까지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면, 우리 회사가 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종업원들이 결국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되고 말아요... 하루만 더 시간이 있으면 어떻게 해볼 텐데... 이제 남은 시간이 없어요... 흑흑. 내가 능력이 모자라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말았어요... 이젠 어쩔 수가 없어요. 나 같은 사람은 없어져도 괜찮은데, 왜 저를 말립니까? 흑흑..." 


  경호는 흐느끼고 있는 그의 팔을 다시 붙들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시간을 만들어 주겠습니다. 얼마나요? 아, 하루가 더 필요하다고요? 그래요. 당신에게 하루의 시간을 주겠어요. 아니, 넉넉하게 일주일의 시간을 주지요. 당신은 내게 당신 네 회사 종업원들을 위하는 마음을 주세요... 자, 이제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남자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껌뻑거리며 경호를 쳐다보았다. 경호는 그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에게 주먹 쥔 손을 내밀어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자, 이제 나는 당신에게 시간을 팔았어요. 그러니, 확인해 보세요..." 


  남자는 지금 자기를 놀리고 있나 싶어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혹시 핸드폰 있으면 꺼내서 날짜를 확인해 보세요..." 


  남자는 "허~ 참, 내..."하고 혹시나 하며 가졌던 기대가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쪼그라져 드는 것 같았다. 볼품없는 노인 네의 말에 놀아난 기분이었다. 자꾸만 손짓으로 주머니를 가리키며 핸드폰을 확인해보라는 경호의 말에 남자는 할 수없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남자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아니, 이럴 수가! 오늘이 며칠이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남자는 일주일 전으로 돌아간 날짜를 보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경호를 쳐다보았다. 


  "확인했지요? 자, 어서 돈을 구하러 가세요. 당신 회사를 살려야지요... “


  남자는 흥분된 얼굴로 경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연방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달리기를 하듯이 다리를 건너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한 마리가 강물 위를 천천히 날아갔다. 다리 위를 걸어가는 경호의 얼굴에는 기대에 찬 미소가 걸리고,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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