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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홍래 Feb 17. 2020

김대건 신부 축일을 마치고

  

나는 성당에 처음 나올 때부터 의문점이 하나 있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상이 없는 십자가를 사용하지만 카톨릭에서는 십자가에 예수가 처형될때의 모습으로 계신다 나는 미사 중에 가끔 그모습을 올려다 보면서 그 당시 얼마나 처절 했을까?

하는 애절함이 생기곤 한다 내가 다니고 있는 성당의 십자가 예수상을 바라보면 상반신은 벗고 우리나라의 옛 시골에서 있는 평범한 농부가 매달려 있다 밭일을 할 때 입는 고쟁이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시고 상투를 틀고 심하게 마르고 왜소하신 흔히 우리의 옛 할아버지 같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힘든 표정으로  계신다    

”왜 예수가 상투를 하고 고쟁이를 입고 있을까“    

의구심이 생겨서 주위에 성당에 오래동안 다녔던 교력이 깊은 성도에게 물어보았으나 설명을 해줄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의구심만 가진채 성당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의 축일을 맞았다 한국 카톨릭에서는 성인들의 축일로는 큰 행사이다

나는 김대건 신부를 천주교에 와서 알았다. 우리나라의 최초 신부이며 순교를 하신 분이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아버지까지 이르는 3대에 거친 천주교 성도 였다 그런 집안의 영향으로 스스로 마카오를 찾아가서 프랑스 신부들에게 신부 수업을 받았다 25세 나이에 신부가 되고 이듬해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전도를 하다가 관군에게 잡혀서 새남터(용산부근)에서 순교를 했다 관군에 잡혀 있을 때 해박한 지식과 라틴어로 된 문서를 번역 하면서 관의 일을 도와서 일부 관리들은 그의 총명함을 알고 구명운동까지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김대건 신부의 축일을 위해서 특전 미사로 드린다고 했다 제1독서, 제2독서가 

이어지고 이어서 주임 신부의 강론이 시작 되었다 옛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신부 교육 중에

당시 조선의 카톨릭 성도들과 정세를 보고하는 짧막한 편지를 낭독 하셨다

김대건 신부는 중국에서 조선의 정세를 조선으로 들어오려고 긴 여정을 준비하는 중 마침 중국을 다녀오는 조선의 사신단을 만나서 사신단을 통해서 조선의 정세를 보고하는 내용이다

조선에서 천주인들이 200명 가까이 처형을 당했다 누구 김아무개는 자식이 천주인이라서 자식은 처형을 당하고 부모는 곤장으로 형벌을 했다 그리고 또 누구 아무개는 골목길을 걸어 가다가 십자가가 있어서 무심결에 주웠더니 관군이 숨어 있다가 천주 쟁이라 하면서 곤혹을 치렀다 그리고 누구 아무개는 관군이 무서워서 깊은 산 중에 일가족과 친척들과 함께 들어가 자급 자족을 하면서 살았는데 그곳까지 관군이 들어 닥쳐 모든 사람을 다 연행을 했다 문초를 하면서 천주 쟁이가 아니라고만 하면 살려 준다고 말하는데 이들은 끝내 천주인을 밝히고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중국에 계시던 프랑스 신부가 상복을 입고(당시 예법이 상을 치루는 상주들은 얼굴을 삼베 천으로 가릴 수가 있었다) 중국 통역인과 함께 지금의 전라도 지역을 잠행을 했다 그러자 전라도 지역 내에 있는 성도들이 몰려 와서 5년 간 고해성사를 하지 못해서 성사를 받아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신부는 말이 통하지 않지만 서로간 손짓과 몸짓으로만 성사를 했다 그리고는 그 프랑스 신부는 이 조선의 성도들만 이 땅에 두고 혼자서 살겠다고 중국으로 돌아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끝내 성도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신부의 강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 주변으로 많은 천주성도들이 처형이 된 곳이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 보면 많은 성지가 있다 그때 조선의 천주 성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우리 성당의 예수상이 그 분들의 모습이다“    

”어쩌면 그분들의 모습이 예수 일 것이다“    

이제는 예전이라고 편하게 말을 할 수가 있는 몇 년전 개신교 시절을 생각 해보면 당시 내가 다녔던 교회는 꽤나 오래된 옛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교회였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 올 때 초창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의미가 깊은 교회이다

그러나 교회 내에 어디에서도 그 역사를 찾아 볼수가 없었다 마치 누가 일부러 걸레를 들고 다니면서 그 흔적을 지운 듯이 너무나도 깨끗했다 그리고 목사나 지배층들도 관심이 없는지 아니면 일부러 숨기는지 그렇게 긴역사 속에서는 많은 담임 목사가 있을 것인데 그 마저도 지금의 목사 바로 전의 목사가 누군지를 몰랐다

그리고 누구도 그 역사를 알지 못했고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교회와 성도들 모두가 교회가 70년이 되었다고 그 말만 반복을 하고 있었다 그 교회를 다닐때는 가까운 역사 마져도 알지를 못해서 늘 안타까운 적이 있었다    


이렇게 살아가는 현실이 힘이 들어서 때로는 역사가 옛날 이야기로 만 들릴때가 많다 그래도

우리가 서 있는 이 순간도 먼 훗날에서 바라다 보면 역사의 휘몰아 치는 강물 위에서 서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잊고 산다고 해서 역사는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역사로 인해 오늘의 우리가 이 자리에 있고 내일의 후손들이 갈 길을 바로 잡을 수가  있다    


늘 가슴 손에 품고 있던 의구심은 풀렸지만 왠지 서글퍼 지고 눈물이 났다

미사가 끝나고 본당을 나오면서 예수상을 몇 번이고 올려다 보고 인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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