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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 Jun 30. 2023

활자가 쌓인 마을

도시의 글자

을지로는 창작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그중에서 간판에 쓰여진 글자들은 시각디자이너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으며 모티브가 되어주었습니다. 그 많은 활자들은 왜 과거에 기호에 머물지 않고 끊임 없이 재생산 되는 걸까요. 디자이너를 만나 이제는 '멋'이 된 '옛 활자'들을 소개합니다.


한글 티셔츠 '쌀' ⓒ덕화맨숀


한글 활자


500여년 전 한민족의 글자는 세상에 탄생했습니다. 1446년 10월 9일 훈민정음이 반포된 날입니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글자라는 것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여러 작용들 사이에 위치하며 발전해 왔으나 유독 훈민정음만이 만든 자와 반포된 날을 알고 있는 유일한 글자입니다. 물론 훈민정음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해왔습니다. 우리의 말이 변해 왔으니 표음문자로서 자연스러운일일것입니다. 


훈민정음이 가진 가치와 무관하게 반포 후 500여년 동안 주류 문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세상의 철학을 담았다는 한자를 그들의 문자로 여겼습니다. 훈민정음은 언문이라 불리며 한자가 하지 못하는 표음 역할을 보완하거나, 한자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글자로 역할을 했습니다. 때문에 오랜 활자 역사를 가진 한반도에서 교화를 위해 언문으로 된 서적을 편찬하긴 했으나, 기능을 넘어 심미성에 대한 고민으로 새롭게 활자를 설계하는 일은 흔치 않았습니다. 18세기에 접어들어 간행된 「오륜행실도」의  활자가 붓글씨체로 만들어져 글꼴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평가되지만 이러한 발전은 특수한 사건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독립국가의 지휘를 상실했습니다. 반만년간 만들어온 삶의 형식을 부정당하는 식민 지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주' 필요해졌습니다.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여 1910년대 주시경 선생을 필두로 조선어 연구를 하는 움직이이 태동합니다. 그렇게 '언문'은 ‘한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민족을 대표하는 글로 자리 잡게 됩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한민족의 새로운 국가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글을 국가의 문자로 정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독립'을 상징하는 글자로 위상이 달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1947년 이후 서양식 글쓰기의 도입, 한국전쟁 발발 등의 요소로 인해 느리게게 발전하던 한글 서체는 1990년대에 접어들며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급속도로 발전 하게 됩니다. 컴퓨터는 글자의 원도를 제작하고 조판과 인쇄까지 제어하게 되면서 개발의 폭을 넓힙니다. 결과적으로 한글 활자는 다양성을 갖추게 됩니다. 나열해서서 쓰는 타 문자에 비해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배치에 따라 다른 형태를 갖춰야 했기에 활자 한 벌을 만들기 위해  2780자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수고스러운 일이었고, 정성을 필요로하는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글씨가 만들어낼 수 있는 오차를 컴퓨터가 줄여주므로 보다 수월하기 새로운 활자들이 탄생할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을지로를 매우고 있는 활자들은 한글 타이포그래피가 폭발적으로 발전한 1990년 전후의 글자들입니다. 대한민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하고 있던 때와 맞물립니다.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자영업자들이 중산층으로 성장합니다. 범 국민적 자존감이 높아지는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사업은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며 한 집안을 대표하는 사업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개성을 중요시하게 됩니다. 경제 발전, 개성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사회의 중심에 을지로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 을지로 일대는 한국 문화, 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을지로는 컴퓨터를 이용한 가공 기술의 첨단지역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이었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IMF 이전까지 한 국가를 견인했던 지역은 이후 30년간 그 시절이 박제된 듯 남겨진 곳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린 2020년대에 1990년 을지로를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환된 간판

30년의 세월이 쌓인 마을의 간판은 한때 가정의 꿈과 희망, 기원, 정체성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남겨진 이름을 통해 그들의 고향, 가훈, 좌우명, 금쪽이의 이름을 알 수 있습니다. 붓 글씨 부터 손 제도, 컴퓨터 가공까지 다양한 공정 과정으로 각 시기에 맞춰 만들어진 폰트는 어지러움을 유발 할 정도로 스스로를 강렬하게 드러내며 쌓여있습니다. 다양한 제작방식, 폰트 디자인이 밀집된 곳은 한국사의 한 단면을 머금고 있는 곳이기도 하면서 디자인사를 펼쳐놓은 현장 백과이기도 합니다.


같은 공간에서도 개인 마다 다른 것을 봅니다. '을지로'라는 광산은 하나의 획일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디자인 자원을 가지고 있고, 찾아드는 이의 바램에 맞춰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신을 드러내 창작자의 의식에 의탁한 결과로 다양한 형태의 작품, 디자인 상품이 탄생했습니다. 그중 다섯 갈래의 결과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을지로 간판 뺏지

을지로 간판 뺏지 ⓒPrag Studio

Prag Studio는 2016년 부터 을지로 일대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지역이 가진 가치를 발굴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습니다. 도심제조단지, 전통시장과 로컬의 의미를 강화 할 수 있는 디자인 작업을 쌓아갔습니다. 그 중 '뺏지'를 주 소재로 삼은 프로젝트는 지역의 제조공장의 가공·생산력에 디자인을 더한 결과물들을 만들어 냈고, 젊은 층을 대상으로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시작점에 위치했던 프로젝트가 간판의 활자를 모티브로 삼아 제작된 뺏지들이었습니다. 


*을지로 4가 산림동 일대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디자이너와 함께 카카오의 제안으로 펀딩을 기획하게 되면서 을지로 간판을 모티브로 삼은 뺏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참여 스튜디오 : 산림조형·소동호, 새작업실·김선우, 을지로움·강나래 이지성, Prag Studio·이건희 조민정 최현택, R3028·고대웅 




을지로체

을지로체  ⓒ배달의 민족


'우아한 형제'는 2012년 이후 글자를 디자인해 왔습니다. 글자에 담긴 의미를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시간을 쌓았다고 합니다. 2019년 을지로 간판에 남아 있는 붓글씨를 모티브로 하여 《을지로체》를 만들게 됩니다. 도심에 중심으로 예술가·디자이너들의 활동이 피어날때 쯤 을지로라는 지역이 다시 대중 속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 시점에 을지로가 가진 본연의 가치를 '글자'를 통해 더 확산 되길 바랬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간에 따라 낡아가는 간판 위 글씨는 3년의 시간 속에서 하나씩 대중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첫 을지로체 탄생 배경엔 을지로움의 이지성 디자이너와 R3028의 고대웅 작가가 있었습니다. 당시 을지로체 프로젝트를 총괄했던 디자이너 '야채'는 미국에 유학중인 이지성을 통해 을지로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낡은 공간에서 고군분투 한 이후 배달 시켜 먹었던 닭도리탕이 그렇게 맛있었다나요. 이지성의 낭만은 이후 고대웅과의 인연으로 이어져 지역상인들의 증언을 통해 붓글씨 간판을 썻던 간판쟁이의 이야기를 담아 낼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을지로 10년후체》에서는 김명중 사진작가가 지역민들과 라포를 형성해 나갈 수 있도록, 《을지로 오래오래체》에선 온라인 전시에 을지로 예술가들이 참여 할 수 있는 관계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2019. 을지로체 이야기


2020. 어이 주물씨, 왜 목형씨 사진展


2021. 을지로 입구 99번 출구




을지로 간판 의자 ·  조명 ·  작품


2018년 R3028은 어반플레이의 공간 '아는 을지로'를 운영하는 중 운 좋게 간판정비 사업을 목격합니다. 세운대림상가에서 버려지는 간판을 수집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고객의 눈에 띄기 위해 중복되어 걸려 있던 간판은 대표 간판 1개만 남기고 모두 철거됩니다. 때를 포착한 작가 고대웅과 기획자 김재강은 다급하게 몇가지 간판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간판의 옛스런 조형에 흥미를 느꼈을 뿐 이후 어떤 모습으로 남겨지게 될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 대림음식백화점 간판 의자, R3028 x Prag Studio

대림음식백화점 간판 의자 ⓒR3028

2018년 R3028은 Prag Studio를 찾아갑니다. 간판이 남겨진 유물로 작업실 한켠에 놓여있지 않고 새로운 역할을 얻어서 사람들 속에 살아 있도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그해 겨울 Prag Studio를 통해 간판은 벤치가 되었습니다. 


*대림음식백화점 간판 의자 더보기 ▶ instagram highlighth



· 세운기술서적 간판 의자, 청두

세운기술서적 간판 의자 ⓒ청두

2021년 세운협업지원센터는 고대웅작가에게 《세운기술서적》간판으로 의자를 만드는 것을 제안합니다. 세운상가에 있었던 모든 점포들이 각 시대를 상징하고, 역사를 담은 곳이었겠으나《세운기술서적》은 그 상징이 남다른 곳이었습니다.


《세운기술서적》을 통해 선진국에서 만들어진 전자기기들의 새로운 지식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책을 보고 공부한 이들이 오늘 세운상가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이땅에 없던 것을 만들고, 추억이 담긴 물건을 고쳐 간직 될 수 있도록한 시작이 이곳이었습니다. 이제 그 시간은 역사가 되어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는 벤치가 되었습니다.


*세운기술서적 간판 의자 제작기 더보기 ▶ 역사가 된 의자, 세운멥, 고대웅

*세운기술서적 간판 의자 더보기 ▶ instagram highlighth



· Courtesy of artist, Sammy Lee

Courtesy of artist, 2022 Taking Root, Denver Botanic Garden, Denver, CO ⓒSammy Lee


2017년 C.A.A.R.P를 운영하는 예술가 Sammy Lee가 R3028과 연연을 맺게 됩니다. 1년 후인 2018년 R3028의 공간에서 레지던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공간 한켠에 놓여 있던 간판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어줍니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는 현대미술작가이자 아시아 미술을 미국에 소개하는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기획자이기도 합니다. 세운상가와 을지로 일대는 어릴적 부모님과의 추억이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새옷 한벌을 선물 받고 근처 순대국집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작가로 성장한 오늘은 그녀의 작업을 돕는 장소로 역할을 전환 하였습니다. 


여성으로 경제활동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이 수레라고 생각해 을지로 철공소에서 분리 조립이 가능한 수레를 제작합니다. 당시 R3028에서 보관중인 '거상아트플라자'와 '대림음식백화점' 간판에 담긴 이름이 작업의 이야기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주게 됩니다. 거대한 상인이라는 뜻의 '거상'과 다양한 음식을 판다는 '음식백화점'이라는 문구는 1인이 물건을 판매하는 작은 공간의 의미를 확장하기에 더 없이 좋은 문자였습니다. 한지로 간판 탁본을 떴습니다. 가볍운 표피가 된 간판은 그를 따라 국경을 오갈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Sammy Lee 더보기 ▶ https://www.studiosmlk.com/

*CAARP 더보기 ▶ https://www.collectivesmlk.com/residency-info



· REMIND EULJIRO FREEDOM, 이온에스엘디

ⓒ2019 Amsterdam Light Festival

2019년 빛을 디자인 하는 이온에스엘디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라이트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됩니다. 밤이 되면 한국 골목을 메우는 간판의 빛으로 작품을 만들게 됩니다. 그때 '거상아트플라자'의 간판 본체는 조명디자이너를 만 을지로를 떠났습니다.


*이온에스엘디 더보기 ▶ http://www.eonsld.com/

*암스테르담 라이트 페스티벌 리마인드 을지로 더보기 ▶ REMIND EULJIRO FREEDOM




한글 티셔츠, 덕화맨숀

덕화맨숀 한글 티셔츠 '칠' ⓒ덕화맨숀

2021년 부터 덕화맨숀은 을지로 간판에서 모티브를 얻어 디자인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독특한 글씨체를 가진 간판이 걸린 상점을 발견하면 그곳의주인을 만나고 어떤 이야기가 담긴 곳인지 들춰 봅니다. 그렇게 발견하고 채집된 글자들은 티셔츠가 되고, 장갑이 되고, 달력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시간'은 '멋'을 더하게 됩니다.


*덕화맨숀 더보기 ▶  https://duckhwa.com/

*덕화맨숀 스마트 스토어 ▶ https://smartstore.naver.com/duckhwamention 

*노트폴리오 ▶ 한글티셔츠는 왜 안이쁠까?

*작은도시이야기 ▶ 한글티셔츠는 왜 이쁠까?



활자가 남겨준 기억


낡은 마을 속 세월 속에 흐려진 간판은 오늘도 누군가의 눈에 들어 영감을 주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도시는 많은 것들을 바꾸고 있습니다. 바꿔나가려 합니다. 한결 같을것 같았던 을지로는 아파트로, 오피스텔로, 빌딩형 공장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습니다.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는 오늘,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고 새롭게 '멋'을 더한 이들을 통해 기억하고 공유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물리적 공간은 변하겠지만 새롭게 탄생한 간판의 활자를 통해 그곳에 있었을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여지가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녹아든 그 간판 아래 조그마한 점포에 있었을 이야기들을.




참고자료


web site

을지로 DNA를 담은 디자인 그룹, 신한카드블로그, 프래그스튜디오

오래된 한글 간판이 있는 풍경, 을지로, GRAFOLIO, 클로서

배달의민족 폰트 다운로드

REMIND EULJIRO FREEDOM, 공식 홈페이

역사가 된 의자, 세운멥, 고대웅


사진

한글 티셔츠 '쌀', 덕화맨숀, 2020

을지로 간반 뺏지, Prag Studio, 2019

을지로체, 배달의 민족, 2019

을지로10년후체, 배달의 민족, 2020

을지로오래오래체, 배달의 민족, 2021

대림음식백화점 간판 의자, R3028, 2018

세운기술서적 간판 의자, 청두, 2021

Courtesy of artist 제작과정, 청두, 2022

Courtesy of artist, Denver Botanic Garden, Sammy, 2022

Remind Euljiro Freedom, Amsterdam Light Festival, 2019

한글 티셔츠 '칠', 덕화맨숀, 2020


영상

[을지로이야기] 여덟 번째 서체, #을지로체 이야기, YOUTUBBE, 배달의 민족, 2019

[을지로이야기]어이, 주물씨 왜, 목형씨 사진展, YOUTUBE, 배달의 민족, 2020

배달의민족의 세 번째 을지로체 전시, 을지로입구 99번 출구, YOUTUBE, 배달의 민족,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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