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걸리게 목표입니다만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인지, 아니면 요즘 세태가 그런 건지는 모호한데 주변에서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같은 동에 살아서 거의 매일 마주치는 엄마가 있는데 말은 거의 섞어본 적이 없어서 친분은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는 분이 있다. 나에게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왠지 철벽 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도 간단히 목례로 인사만 할 뿐 따로 말을 걸어보지는 않았다.
뭔가 그 엄마에게서 좀 이상한 기운을 포착하기는 했는데,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엄마가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며 화내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 애들이 워낙 말 안 들을만한 나이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조금 과하다는 느낌은 들었다. 후에 우연찮게 알게 되었는데, 그 엄마는 현재 우울증을 앓고 있어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제야 내가 그 엄마에게서 느껴졌던 묘한 기운에 대한 답을 얻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바로 떠올리지는 않았지만 뭔가 불안정해 보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벼운 육아우울증 정도보다 더 심각한 것 같았다. 왜 우울증을 앓게 되었는지 나는 철저한 타인이기에 그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말 한 번 안 섞어본 사람이 느껴질 정도라면 본인은 그로 인해 상당히 힘들 것 같다는 추측만 들 뿐이었다.
시어머니가 반년 가까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과 소화불량으로 고생하셨다. 큰 병원에도 가서 온갖 검사를 해봐도 원인은 발견되지 않았다. 용하다는 한의원에 갔더니 한의사는 단번에 화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 나이 때에 여자들에게 흔히 발병되는 증상이라고 아무리 좋다는 대학병원가도 원인 불명이라고 나올 거라면서 비싼 한약을 처방해 주었다. 이런저런 치료를 받고 약을 복용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고, 소화가 안돼서 음식 섭취를 제대로 못하니 몸무게도 4킬로 이상 빠지셨다.
소화기계통 쪽에 자꾸만 통증이 와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셔서 불면증과도 사투를 벌이신 듯했다. 처음에는 췌장 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온 가족이 강하게 의심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평소에 굉장히 엄격하게 식단관리를 하시기 때문에 저녁은 거의 드시지 않고 드신다고 해도 간단히 야채와 두부, 삶은 계란 정도만 드신다. 운동도 매일 빠지지 않고 꾸준히 하시고, 교회에서 봉사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시립합창단 활동도 활발하게 하신다. 도저히 어딘가 아플만한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몇 달간 아프셔서 기력이 다 사라져 버린 어머님을 보고 있자니 답답했다.
그런데 우연히 병명을 알게 되었다. 뜻밖에도 어머니는 우울증 진단을 받은 것이었다. 몇 달간 너무 아파서 잠도 제대로 못 자니 수면제라도 처방받아볼까 싶어서 정신건강의학과를 가보게 되셨고, 우울증임을 확인했다.
온 가족은 놀랐다. 도저히 우울증과는 전혀 공통분모가 없을 만큼 사회활동도 활발히 하시고, 참여하는 모임도 많으신 외향적인 분인데 우울증이라니.
결국 약을 처방받아 드시면서 몸 상태는 상당히 호전되었고 소화력도 좋아져서 몸무게도 회복되셨다. 본인도 인정하기 힘들어했다. 정신력 하나는 어딜 가도 손색없을 만큼 대단하다 여겼는데 우울증 진단을 받다니,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진단명이라고 하셨다. 또 한 가지 놀란 사실은 정신과 병원이 늘 진료받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라서 이렇게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되셨다고.
친정엄마도 갱년기를 거치면서 굉장히 예민해지고 걱정이 많아져서인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한 때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복용했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걱정할까 봐 숨겼는데, 엄마는 한동안 잠을 잘 못 잤다고 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엄마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위로를 해야 할지, 약의 도움이라도 받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렇게 힘들었는데 왜 말을 안 했느냐고 화를 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어렸을 때 아이를 봐주던 이모님을 최근에 만났는데 좀 살이 빠진 듯 수척해 보이셨다. 일부러 다이어트를 하신 건가 싶어서 나는 살이 좀 빠지셨어요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러냐며 요즘 통 잠을 못 자신다고 대답하셨다. 저녁에 자려고 누우면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을 못 자서 수면제를 복용하기 시작하셨다고. 성격이 원체 밝고 활달한 분이시라서 어린아이들 봐주는 게 천성에 맞으신 분이었는데 마음속으로는 티 내지 못한 걱정이 많으셨나 보다 싶었다.
대학동기를 오랜만에 만나 함께 카페에 갔는데 웬일인지 커피를 주문 안 하고 거들떠도 보지 않던 카모마일차를 주문하는 것이었다. 항상 커피를 즐겨 마시던 친구였고 같이 커피숍을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커피 외에 다른 음료수를 주문하는 걸 본 적이 없는 나는 놀라서 왜 커피를 마시지 않냐고 물었다. 친구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점심 이후에 커피를 조금이라도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잔단다. 그래도 너무 좋아하는 커피를 끊을 수는 없어서 이른 아침에 한 잔만 마시고 이후로는 웬만하면 자제한다고. 대학시절만 해도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근처 카페를 다니면서 그 당시 한창 생겨나던 프랜차이즈커피전문점을 탐색하고 다니던 우리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냐며 세월을 한탄했다.
사실 지금껏 나열한 주변 사람들 중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걸릴만한 당위를 가진 사람은 나다.(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입장에서) 아이가 발달장애 앓고 있는 엄마들 중에 처음에는 아이 약을 처방받다가 나중에는 같이 처방받아먹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요새는 정신과에 대한 시각도 많이 달라져서 도움 받을 수 있는 건 받는 게 낫다는 식이라 약으로라도 의지해서 버티는 게 좋다는 의견도 많다는 걸 안다.
그런데 의외로 나는 잠욕심이 엄청나게 많아서 밤에 등만 대면 오분이내에 바로 잠드는 편이다. 오후에 카페인을 섭취한 날처럼 외부적인 원인이 있지 않고서야 나는 매일밤 잠드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러한 나의 습성이 의외로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남편은 너는 항상 등만 대면 잠들잖아 하면서 잠 많은 나를 놀리기도 하는데, 내가 불면증에 힘들어하면서 수면제 먹고 그러면 좋겠느냐고, 아내가 잘 자고 잘 먹어서 우울증 안 걸리는 것에 감사하라고 일침을 가했다. 물론 남편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였다.
잠을 잘 자서인지 원래 타고난 먹성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어도 입맛이 떨어져 본 적이 거의 없다. 애 때문에 마음이 힘들고 속상해도, 남편 때문에 열받아도, 그냥 혼자 울적한 기분이 들어도 이상하게 식욕은 사그라들지 않아서 주변 상황과 무관하게 배고프면 누가 챙겨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챙겨 먹는다. 게다가 귀찮아도 채소를 식단에서 빼놓지 않고 단백질 섭취량까지 고려해서 먹는다. 매번 건강식단을 먹는 건 아니지만 두 끼니 중 한 끼는 몸에 해가 되지 않는 음식을 먹고자 신경 쓰는 편이다.
보통 정신과 의사가 우울증을 겪는 환자와 상담할 때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게 요즘 잘 자고, 잘 먹느냐는 질문이라고 들었다. 나는 타고나기를 수면욕과 식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일상의 최우선이며, 늘 스스로 알아서 채우기 때문에 평생 우울증에 걸릴 일은 없겠다 싶었다.
사람 일은 장담할 수 없지만.. 여태 우울증과 불면증에 걸리지 않고 버텨왔다는 사실만으로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잘 자고, 잘 먹는 거가지고 자화자찬하다니 웃기긴 하는데, 나이 먹으니 이런 별 볼일 없는 특성도 유일한 장점이자 자랑거리가 되었으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