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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빗 Feb 01. 2020

곰 같은 여우 vs 여우 같은 곰

눈칫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의든 타의든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를 만큼 눈칫밥을 종종 먹는다. ‘누구는 여우같이 생겼는데 엄청 곰이더라’ ‘여우인 줄 알았는데 눈치가 없던데?’ 직장에서 식사시간이나 티타임에 듣는 이런저런 말들을 곱씹어보다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역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저들이 별 의미없이 내뱉는 말에 눈칫밥을 심하게 얻어먹고 있는 나는, 과연 곰인가 여우인가.


옛말에 '곰 같은 여우'랑은 살아도 '여우 같은 곰'하고는 못 산다고 했다.


옛말에 ‘곰 같은 여우’랑은 살아도 ‘여우 같은 곰’하고는 못 산다고 했다. 눈치 없고 느릿한 ‘곰’과를 비하하고 상황판단과 눈치가 빠른 ‘여우’과를 칭찬하는 표현이다.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많은 ‘곰이라 불리는 자’들은 고민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혹여 거래처와 미팅 자리에서 빠릿하게 행동하지 못한 것이 실례가 되진 않았던가, 분위기를 띄우려 했던 농담이 되려 상대방의 기분을 해치지는 않았을까 하고.


얼마 전 회사에 퇴사자가 발생했다.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서 떠난다’는 말로 에둘러서 표현했지만, 동료들은 결국 모든 게 사람 때문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퇴사자를 두고 이 조직에 걸맞지 않아 떠난 ‘부적응자’ 취급을 하며 자신을 합리화했고, 또 다른 상사는 자신이 ‘여우 같은 스타일’이라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진작에 알고 있었다며, ‘인력 손실은 모두 저 사람 때문’이라고 화살을 상대방에게 돌렸다.

그리고 떠난 자는 말이 없었다.


- 그게 아니라, 다 당신 때문이야!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사람 사는 곳’에서는 이 같은 일이 어디나 비일비재하다. 일례로, ‘짬 때린다’는 은어가 있다. 자신이 해야 마땅할 일을 연차가 낮은 사람에게 미룬다는 뜻으로, 군 부대뿐 아니라 수직적인 조직에서 종종 쓰이는 표현이라고 한다. ‘내가 바빠서 그런데, 이것 좀 처리해 줄래?^^’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친절한 말투로 부탁하는 사수에게 칼같이 거절할 대담한 작자는 없다. ‘여우’ 같은 부하는 상사 몰래 일을 다시 밑으로 내리곤 자신이 처리한 일인 양 뽐내고, 일이 잘 돌아가면 상사는 ‘역시 내 새끼’ 하고 만족스러워 한다.


거기에 일부러 들으라는 듯 혀를 끌끌 차면서 한 마디를 덧붙이기도 한다. ‘저 곰 같은 놈은 언제쯤 쓸모가 있으려나’ 하고. 있는 듯 마는 듯 묵묵히 일 처리를 하는 사람을 못 알아보는 사람이야말로 눈치를 어디다 팽개치고 온 게 아닌가 싶은데. 이쯤이면 ‘곰 같다’는 표현이 ‘소리없이 진국인 사람’을 표현하는 못된 말일지도 모르겠다.


비단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대개 ‘여우같은 아이’가 잘 살아남는다고들 말한다. 애가 둘 이상 있는 집이면 예쁘게 떼쓰는 아이에게 사탕 하나라도 더 쥐어주는 경우가 많다. 같은 말 한 마디라도 예쁘게 해서 어른을 웃게 해주고, 애교를 부리며 ‘용돈 달라’ ‘새 운동화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확률이 높은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징징대거나 요구사항이 없는 아이보다 자신이 원하는 걸 정확하게 얻어내는 법을 터득한 현명한 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건 부모가 아이들을 차별해서거나 어느 한 명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리라. 하지만 부모는 알고 있다. 떼쓰지 않는 아이가 바보라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곰 같은 여우’와 ‘여우 같은 곰’ 중 어느 쪽에 속해야 하는 걸까 고민된다면.


결국 우리는 모두 성향 차이를 가진 불완전한 사람이다. 사람은 신묘하고 복잡한 생명체인 지라,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게 성향을 설명하기 어렵다. 완벽한 곰과 여우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 남들이 심심풀이 땅콩 까듯 말하는 ‘곰’‘여우’ 같은 사소한 단어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사람마다 보는 시선과 주어진 상황에 따라 전자와 후자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니. 스스로를 ‘여우 같은 곰’인 것 같다고 자책할 필요도, ‘누가 봐도 여우’라고 자부심을 가질 이유도 없지 않나.


약간의 센스와 눈치, 그리고 융통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다. 세상이 ‘여우’를 원한다면 되어줄 줄도 알고, ‘곰’이 필요하다면 변신할 줄 아는 일종의 ‘처세술’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둘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물으면 답을 피하고 싶다.


- 여기는 '사람이 사는 세상'이지, 곰과 여우가 머리를 맞대고 씨름하는 곳이 아니다.


그러니 기억하자.

곰과 여우,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제3의 색을 지닌 생명체가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곳임을.

'내가 다 헤아려 보지 못하는 당신의 귀한 모습을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음을.'


내가 다 헤아려 보지 못하는 당신의 귀한 모습을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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