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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자녀 디자이너 Jun 08. 2024

휴직의 기억 1

에피소드

20대 후반에 멀쩡히 직장을 다니다 휴직 했었다. 사실 퇴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휴직을 하게 된 것이다.


별생각 없이 덜컥 합격이 되어 다니던 회사였던지라 큰 동기 부여도 없었고 다른 꿈? 도 은근하게 자리 잡고 있던 지라 언제든 때려치우고 싶은걸 꾹꾹 참고 겨우 3년을 채웠던 시점이었다. 특히 당시 회사는 그룹 회장의 지시에 따라 '칠사제'(7시 출근 4시 퇴근)를 하였는데 매일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춰 놓고 일어나는 생활은 도저히 그 나이에 인간의 삶이 아니었다. 정시 출근도 어려웠지만 어쩌다 정시 퇴근 하여 4시에 거리에 나오면 기분이 참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건축설계 업계에서는 대기업 수준의 연봉과 복지를 제공하는 파격적인 조건의 들어가기 쉽지 않은 회사였지만 난 그런 것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청춘이었다. 휴직결심할 때는 IMF 외환위기의 여파가 스멀스멀 보이던 시절이라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휴직을 유도하는 정책을 시작하던 참이었다. 난 회사 다니는 게 싫었을 뿐 다른 진로가 명확했던 것도 아니었기 우선 휴직하기로 결정했었다. 사람일은 모르는 거 아닌가? (역시나.. 2년 후 복직해서 같은 회사를 오늘까지 다니고 있다.)


부모님에게 휴직은 내 의지가 아닌 걸로 얘기했다. 죄송한 일이지만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등쌀에 휴직이 휴직이 아니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나라의 위기가 그대로 우리 아들에게도 전가된 것으로 인식하시고는 불쌍한 나를 2년간 그저 묵묵히 바라만 보셨다. 다행히 아버지의 사업은 그럭저럭 유지가 되어서 집안이 경제적인 이유로 불행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막연히 유학을 동경하며 영어공부나 하는 백수로 위장?을 하고 아주 게으르게 지냈다. 타고난 기질대로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꼼지락 거리다가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나곤 했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이 계속 미뤄져서 나중엔 낮 12시가 넘어야 겨우 일어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아직 20대였는데도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들이 유학 가기를 소망하셨던 어머니의 마음도 위로할 겸 오전에 영어 학원을 다니기로 결정했다. 영어학원을 끊는 덕분에 영어실력 보단 내 생활의 질서가 잡히는 효과가 더 확연했다. 겨우 한 시간 수업을 듣기 위해 나는 분당에서 강남역까지 마을버스, 광역버스를 갈아타고 하루 왕복 두 시간을 소진했다. 백수에게 남는 건 시간인데 길에서 하루 두 시간을 채우는 게 어찌 낭비라고 할 수 있으랴? 또한 덕분에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이 었다.




조금 늦은 오전 시간대의 영어 강의를 분당에서는 찾을 수 없어서 강남에 있는 학원을 알아봤다. 오전 11시쯤에 여는 토플 강의는 강남에도 거의 없었는데 딱 하나가 적당해 보였다. 강의 첫날 출석을 했는데 역시나 백수 맞춤 평일 늦은 시간 강의인지라 텅 빈 교실엔 나 이외는 아무도 없었다. 뿔테 안경을 끼고 퉁퉁하게 생긴 인상 좋은 강사가 들어와서는 수강생이 나 혼자이니 그냥 작은 회의실로 옮겨서 1대 1 수업을 하자고 했다. 나는 같은 값으로 1대 1 개인 교습을 받는 행운을 누리게 된 셈이었다.


학원이 이래도 되는 건가? 수업료를 더 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마음 조금 불편하기도 했지만 곧 1:1 강의의 효과를 톡톡히 보며 영어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받게 된다. 정말 유학을 한번 가봐? 하는 생각까지.. 강사는 정말 열정적으로 나의 토플 점수를 올려주려 애썼다. 그 열정에 감복하여 나도 마음을 열고 친한 형처럼 대하며 공부 외에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사의 유학시절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어느 날 이 형이 갑자기 자기가 쓴 책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 책은 '성 소수자'에 관한 책이라고 했다. 맞다. 이분은 게이였다.


오전 9시쯤 겨우 눈 비비고 일어나 씻고 먹고 강남역까지 가서 수업을 듣고 나오면 서울 강남역 한복판이 그렇게 썰렁할 수가 없었다. 짧았던 직장 생활 동안 모아놓은 돈이라도 많았으면 어디 들어가서 돈을 더 쓰며 시간을 때웠겠지만 그럴 경제적,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그냥 배가 고파서 점심을 먹기 위해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싣곤 했는데, 강사 제의로 언제 강의 끝나고 맥주나 한잔 할까 하다가 말로만 끝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게이에게 커밍아웃을 듣게 된 일반인 남자는 제일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를 거 같은가? 맞다. 아마 십중팔구 일 것이다. 그리고 그땐 아직 20세기였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분위기나 인식이 지금과는 많이 달다.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떨치며 태연히 하던 수업을 계속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달 개강엔 제발 수강생이 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녔는데 그다음 달에도 수강생은 나뿐이었다.


묘하게 불편한 한 달이 더 지나가고 나서야 다른 수강생이 두 명 더 붙었고 우리는 드디어 작은 회의실이 아닌 강의실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학원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분이 나의 마음을 모르셨을 리가 없을 터이니.. 글쎄 이 에피소드의 주제는 세련되지 못한 '촌놈 수강생'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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