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절을 하러 바닥에 엎드렸을 때 몸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 무덤 앞에서 마치 어머니에게 안기듯이 나는 땅에서 몸을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처음엔 무슨 기도를 하듯 마치 어머니께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하였지만, 이내 머릿속은 하얘지고 그저 슬픈 감정만 복받쳤다. 결국 나는 흐느끼고 있었다. 옆에서 아빠가 언제 몸을 일으킬지 눈치를 보는 아이들이 느껴져 눈물을 감춘 채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머리와 무릎이 닿은 땅바닥이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게 느껴져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어머니가 가신지 3년이 되어 간다.
어머니는 나이 60에 파킨슨 확진을 받으셨다.
새천년을 맞고 얼마 되지 않을 무렵 내가 2년간 방황하던 휴직을 마치고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휴직하는 기간 서른이 다 된 아들이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에 속을 까맣게 태웠을 어머니에게 나는월급을 받게 되자마자보답하듯보약을 지어 드렸고 다시 만난 회사 동료들에게 그 얘길 뿌듯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서얘기를 같이 듣고 있던 팀원 중 누군가 어머니가손을 떠시는 증상이 혹시 파킨슨 증세랑 비슷한 게 아니냐는 걱정을 해줬다.
나는 동료의 그 얘기를 듣자마자 안 좋은 예감을 느꼈고 가장 빨리 예약이 가능한 분당 종합병원에 어머니를 바로 모시고 가서 파킨슨 의심 소견을 받고 곧 이어진 3차 의료기관에서 파킨슨 확진을 받았다.
진맥을 했던 분당 동국대 한방병원의한의사는 그런 병에 대한 의심이나 언급이전혀 없었고 기력이 쇄하셨다며 쓸데없는 한약을 50만 원어치나지어준 것이었다.그 약을 다 먹으며 시간을 더 보냈더라면 파킨슨 병은 더 빨리 진행되었을 테니 생각할수록 정말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일찍 발견돼서 다행입니다. 어머니, 앞으로 제가 20년은 보장해 드릴게요.'
당시로부터 20년 후면 어머니의 팔순 잔치는 치를 수 있을 터이니주치의 선생님의 말씀이감사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 정말팔순을 겨우 넘기시고 돌아가시기까지의시간은긴 터널과도 같이 어둡고 긴 그러나너무짧기도 한 시간이었다. 그 후로 나는 인근의 응급실이 있는 모든 병원들과 친숙해졌고 들어설 때마다 떠오를 수밖에 없는 힘든 기억들을 새기며 살았다.
20여 년의 길고도 험난한 투병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늘 밝고 긍정적이셨던 어머니.
'앞으로 10년은 더 살아야지.' '현석이 장가가는 건 보고 죽어야지. 그럼 그래야지..'
의식불명이 되기 전날화상전화를 하면서빨리 퇴원해서이제집으로 가자는 말에 환한 미소를 지으셨던 어머니. 어머니는 투병기간 한 번도 비관적인 말을 하신 적이 없으셨다. 며느리의 운전 부주의로 여기저기 뼈가 조각이 났을 때에도, 곁에서 병수발을 하시던 아버지의 탈진으로 결국 요양원 입소를 결정하게 됐을 때에도, 누구를 원망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부족한 아들에게 가시는 순간까지 핀잔 한번주신 적이 없던 어머니.
당신의 무덤 앞에 엎드려 사죄를 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나는 그런 비슷한 소리도 들을 수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