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방>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동명의 웹툰과 드라마도 있다. 이전에도 매우 유명한 말이었는데, 여러 매체에서 패러디되고, 인용되면서 더더욱 유명해진 문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대사를 '타인'이 곧 '지옥'이라고 오해하는 듯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니, 천천히 따라와보시길.
<타인은 지옥이다> 공식 포스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에게 해악을 끼치는, 나와 불화하여 닿을 수 없는 존재가 타인이기에 그들을 지옥이라 표현했다고 많이들 해석한다. 하지만 저 말의 진짜 의미는 타인의 '안에' 지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나 '사이에' 지옥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나를 오해하는 친구,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가족, 관계가 삐걱거리는 연인 들이 내게 지옥인 것이 아니라, 여러 형태로 내 주변에 존재하는 타인들의 시선을 경유하여 나의 주체성이 확립될 수밖에 없는 진실, 그 자체가 지옥임을 사르트르는 지적한 것이다. 일견 복잡해보이는 이야기지만 실상은 매우 단순하다. 저 말은 나의 관계론의 기초적인 토대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이 지구에, 온우주에 오로지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없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볼 수 있지만, 나의 실제 모습은 영원히 볼 수 없다. 내 모습은 오로지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만 형상화될 수 있는데, 온우주에 오로지 나밖에 없다면 누가 나를 보아줄 수 있을까? 나의 존재를 누가 확인해 줄 수 있을까?
나밖에 없는 세상에서는 '내가 나인 것'조차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나의 '실존'을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다. 그렇기에 나를 보아줄 타인의 시선은 나의 실존을 확인시켜주고, 나아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아니,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시선과 인정으로부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서서히 학습해간다고 보아야 한다. '너 참 예쁘구나.'라는 칭찬, '너는 글을 참 잘 쓰는구나.'라는 인정,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라는 애정 섞인 말들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 깨달아 알게 한다. 비난과 지적과 날선 평가 또한 마찬가지일 터다.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 (중략)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타인들의 판단과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1965년에 어느 강연에서 사르트르가 한 말이다. 한국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에 얼마나 민감한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비교하고, 줄 세우고, 개인의 고유성을 짓뭉개고 평가하는 문화가 만연한 한국 사회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의 가장 극적인 현현(顯現)을 보여준다.
출처: <아이뉴스24>
인구 5천만의 조그마한 동아시아 국가인 대한민국은 1인당 명품 소비량이 전세계 1위이다. 한정판 명품백이나 콜라보 제품이 나오면, 전날 새벽부터 매장 앞에 줄을 서는 '오픈런'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되었다. 다른 한편, 대학 진학률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고, 1인당 GDP가 상당히 준수하여 잘 배우고 풍족하게 사는 사회임이 분명한데, 출생률과 행복도는 매우 낮다.
이러한 현상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그 근원에 '타인의 시선에 과도하게 민감한 사회 분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타인의 시선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면, 행복은 '상대적인 상태'가 된다. 등 따시고, 배부르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옆집 철수가 아파트를 사거나, 앞집 영희가 수입차를 뽑으면 상대적 박탈감에 손쉽게 노출되는 것이다.
나는 건강한 삶을 위해, 정신의 안녕(安寧)을 위해 '타인의 시선'에 갇힌 노예 상태에서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칭찬에 기뻐하고 감사하되 들뜨지 않도록, 타인의 비난에 내 행동을 돌아보되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도록 마음을 섬세하게 컨트롤하려는 노력.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일렁이는 내면의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감정의 진폭을 최소한으로 조절하려는 노력을 말이다.
출처: 잘 모르겠다. 어떤 영화인지 아는 사람?
솔직히 나는, 타인의 조언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지만,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타인과 나 사이에는 깊고 뜨거운 지옥이 존재한다. 내가 나일 수 있는 모든 증거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으로부터 나오기에.. 그러나, 우리에겐 지옥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칠 수 있는 '자유' 또한 있다.
나는 브런치에 3년 안에 1억 원을 모으는 이야기를 연재한다. 자산가 부모도 없고,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대기업에 다니지도 않고, 주변에서 돈 공부를 도와줄 어른도 없는 나는 아주아주 많이 노력해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음을 처음부터 알았다. 1억 프로젝트는 만 25세~만 28세라는 인생의 황금기를 고군분투하는 시간으로 가득 채워야 가까스로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이다. 그래서, 마음먹은 만큼 노력 중이다.
수많은 주변인들은 "젊을 때 인생을 즐겨야 한다.", "잘하고 있다. 젊을 때 모은 종잣돈은 가치가 높다.", "돈에 매몰되는 삶이 행복할 리 없다.", "독한 놈.", "너가 돈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운다.", "돈을 모으는 것보단 스스로에게 투자해야 할 때 아니냐?" 같은 긍정/부정적인 수많은 평가를 쏟아낸다. 이때 중요한 점은, 타인의 수많은 관점과 시선에서 나오는 다양한 말에 휩쓸리지 않도록 닻을 단단히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옹고집을 부리라는 말과 질적으로 다른 말이다.
타인의 반응이 저토록 다양한 것은, 우리가 타인을 볼 때 나의 인생을 경유하여 보기 때문이다. 즉 "젊을 때 인생을 즐겨야 한다."라고 조언하는 사람은 자신이 젊은 시절을 즐기지 못하고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 크게 후회가 되어, 자신의 삶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조언으로 건네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 한번의 삶을 오로지 자신으로밖에 살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시선' 안에 갇혀 타인을 볼 수밖에 없다. 내가 타인의 조언과 평가를 대부분 거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타인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위와 같은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영화 <벌새>
글이 또 너무 길어지려고 한다. 어쨌든, 뭐, 결론은 이렇다. 타인과 나 사이에서 형성된 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나의 판단을 신뢰하며 끝까지 가봐야겠다는 것. 나의 마음과 생각을 타인은 절대로 정확히 알 수 없다. 나를 완벽하게 공감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절망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희망이기도 하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를 완벽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웬 참견? 이렇게 말이다.
내가 1억 프로젝트를 마치고, 끝내 당도한 그곳에서 마주하게 될 풍경은 어떤 느낌을 줄까. 기대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미지의 풍경일 것이기에 궁금하고, 흥미진진하다. 무언가 기다려지는 것이 있는 만큼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1억 원 프로젝트, 가능한 한 재밌고 신나게 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리라!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