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픽은 바로 나다.
아이들과 도서관에 왔다. 나는 운이 좋게도 이사를 하는 곳마다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다. 이사를 할 때 도서관을 요건에 넣지는 않는다. 항상 멀지 않은 곳에 도서관이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큰 책장을 언제나 소유하고 있다. 각자 책을 빌리고 오랜만에 스타벅스에 가기로 했다. 이사 후 아는 사람이 없는 나로서는 아이들이 카페에 다니는 친구들이다.
나는 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데 오늘은 이미 집에서 마셔 아이스바닐라라떼, 아이들은 아이스 쵸코를 각각 하나씩 시켰다. 우리 아이들은 에이드나 과일주스보다 코코아를 좋아한다. 딸은 조금 커서인지 가끔은 같이 커피를 시키기도 한다. 기다리던 음료가 나왔다. 아이들이 각자의 음료를 마신다. 그 얼굴이 참 행복하다. 이런저런 수다도 떨지만 많이 시끄럽지도 않고 눈총을 받을 행동은 없다.
나는 어릴 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 친구였다. 할아버지랑 구슬치기도 하고 화투도 치고 천자문 공부도 했었다. 지금은 한자를 잘 모르지만 할아버지 옆에서 하늘 천, 누를 황을 외웠던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집에 계시다 가끔 외출을 하셨는데. 짙은 회색 바지에 반팔 셔츠, 그위에 옅은 회색 점퍼를 입으시고 회색 중절모를 쓰고 다니셨다. 할아버지는 머리숱이 많이 없어서 내가 항상 신기해했다. 나는 까맣고 찰랑거리는 머릿숱이 많은 생 단발머리였다. 나도 예전에 젊을 때는 머리숱이 많았다고 멋쩍게 웃으셨다.
그날도 나는 외출 준비하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냥 따라 나가면 사탕이라도 하나 사주시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초콜릿을 좋아하지만 어렸을 때는 사탕도 잘 먹었다. 유치원을 다니기 전이니 아마도 4-5살 정도 되었을 때인 것 같다.
집에서 충렬사까지는 멀지 않았다.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걸어가면서 덥지 않냐고 물어보시면 하나도 안 덥다고 능청을 떨었다. 테이블에 작은 컵이 하나 놓였다. 나를 응접실에 앉혀두시고 사무실에 들어가셨다. 기다리면서 나는 코코아를 호호 불면서 마셨다. 할아버지를 따라나선 그날 집이 아닌 곳에서 처음 코코아를 마셔봤다. 코코아를 마시는 아이를 보니 그 생각이 났다. 나도 코코아를 좋아한다. 나이가 들수록 코코아보다는 커피를 마신다.
할아버지 하면 코코아와 함께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더 있다. 할아버지 댁은 마루에서 내려와 옆에 작은 문을 열면 부엌이다. 언니랑 나랑 부엌을 왔다 갔다 하니 할아버지가 위험하다면서 부엌에 들어오셨다. 아마 내가 5살, 언니는 초등학생 4-5학년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사촌언니는 부산에 살면서 방학이면 외갓집으로 놀러 오곤 했다. 나는 혼자 있는 것보다 언니가 오면 훨씬 신이 났다. 어린 우리에게 옛날 부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가 라면을 끓이려는 걸 보시고 본인이 끓여 주시겠다고 했다. 안성탕면과 짜파게티..
어린 손녀들이 소꿉놀이하듯 하는 모습에 어른이 나섰다.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부엌에 들어가시는 걸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생각해보니 항상 할머니가 다 했다. 물 한 잔을 직접 뜨시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우리보다 못 미덥다. 큰소리를 치시면서 라면을 끓이신다. 70년이 넘는 시간 만에 첫 라면. 제대로 먹었는지 버렸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냄비도 타고 하여튼 불이 안 난 게 다행인 날로 기억된다. 내 기억 속에 그날이 할아버지의 첫 부엌이며 마지막 부엌이다. 외출하시고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언니랑 나랑 불장난을 했냐며 언성을 높이신다.
“애들이 배고픈데 굶기냐.”며 내가 그랬다 할아버지 소리에 할머니가 조용해지신다. 설명서만 읽으면 쉽다는 혼자 말을 하면서 부엌을 정리한다.
할아버지의 라면을 먹어 본 사람은 나와 언니 우리 둘뿐이다. 언니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내 기억으로 다른 손자들보다 나를 많이 이뻐해 주셨다. 분가하는 부모님 대신에 나를 키워 주셨기도 했다. 매일 보니 정도 들었지만 애처로워하셨던 것 같다. 이것보다 더 많은 기억이 있을 텐데 그때는 어려서인지 생각이 안 난다. 이 2가지는 나름대로 기억이 선명하다. 어린 시절은 기억 못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도 이야기를 하면 거의 기억을 못 한다.
아들의 돌 사진을 보는데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참 신기하다. 나는 할아버지를 싫어하지 않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