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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지 Aug 30. 2024

양궁과 자세 #00 슈팅라인

Shooting Line: 우연과 우연과 우연과 우연과 우연

나를 설명하는 언어에 양궁이 추가된 지 2년이 넘었다. 운동, 특히 양궁이라는 단어가 내 삶에 이렇게 착 붙게 될 줄 몰랐었는데, 지금은 나를 돌보는 고마운 일상이 됐다.


양궁을 배우면 자세의 일정성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듣게 된다. 그러니 꾸준히 활을 들어 올리고, 활시위를 당기며 자세를 잡아나가는 연습이 훈련의 대부분이다. 양궁을 배우고 일정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훈련을 하면서, 나는 내 삶을 대하는 자세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양궁은 현재와 나를 계속 감각하는 운동이고, 화살은 앞으로 나아가는 물질성을 지녔는데, 신기하게 활을 쏘고 자세를 잡으면서 내 마음은 지나간 일에 대한 위로를 받았다. 앞으로 나아간 화살이 빙글 돌아 과거의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순간을 자주 마주쳤다.


얼마 전 예전에 썼던 양궁일기를 오랜만에 펼쳐봤는데, 양궁을 시작했을 때의 들떠있던 마음과 그때의 깨달음이 좋았다. 읽다 보니 좋아하고 아끼는 운동이 된 양궁이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나눠보고 싶어졌다.



양궁과 자세 #00

슈팅라인(Shooting Line):

우연과 우연과 우연과 우연과 우연


내가 양궁인이 된 건 겹겹이 쌓인 우연 덕분이었다.


➹ 우연 1 : 조직검사

2021년 7월, 발톱에 생긴 이상한 점이 수상해 피부과에 갔다가 대학병원 소견서를 받았다. 흑색종 검사를 위해 조직검사를 권유한다는 내용이었다. 발톱을 들어내 그 아래 피부조직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작은 발톱 하나가 뭐라고 한 달을 꼼짝 못 하고 집에 갇혀있게 됐다. (사실 그 작은 발톱 하나가 진짜 아팠다...) 3주 후에 나온다는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게 무엇보다 힘들었다. 결과가 나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 우연 2 : 올림픽과 덕질

이번 올림픽에서는 양궁을 꼭 봐야 한다며 추천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하나 둘 늘어났다. 특히 안산이라는 선수가 너무 귀엽고 멋지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운동경기 관람에는 흥미가 없어서 평소라면 듣고 넘겼을 텐데, 마침 나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칩거생활로 심심했다. 그렇게 실시간으로 양궁혼성단체전 경기를 보게 됐다. 그리고 안산선수에게 또 양궁이라는 운동에 푹 빠져버렸다. 그것도 꽤 깊고 길게!


➹ 우연 3 : 생일카페와 양궁체험

조직검사 결과는 아주 좋았다. 색소세포가 엉뚱한 곳에 자리 잡아 색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라고 했다. 색소 품은 발가락을 지니게 된 나는 안산선수도 계속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해가 바뀌고 안산선수의 생일이 다가왔다. 살다 살다 내가 생일카페에 갈 줄이야. 광주에서 열리는 생일카페에 가는 김에 안산선수의 모교에서 열리는 양궁체험도 신청했다. 실내 체육관에 들어서자 화면으로만 보던 멋진 양궁 장비들이 눈에 보였다. 함께 방문한 친구들과 들뜬 마음으로 설명을 듣고 각자 과녁 앞에 섰다. 그리고 활을 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다. 활을 한발 두발 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넓은 체육관에 나와 과녁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끄럽던 체육관 소음도 필터를 거친 것처럼 흐릿하게 들렸다. 생각으로 꽉 차 있던 머릿속이 맑게 비워진 것 같았다. 활을 쏘는 순간 느껴지는 진동이 경쾌하게 느껴졌다.

한 시간짜리 짧은 양궁체험은 그 뒤로도 내 마음에 남아서 마음이 복잡한 날엔 '아... 그때 진짜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좋았었는데...'라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게 했다.


우연 4 : 번아웃

이틀 밤을 새우고 마감파일을 보낸 어느 날이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9시가 다 되어있었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일해야 할까? 그때 난 아마도 번아웃을 겪고 있었던 거 같다. 재택으로 일 하며 일과 삶을 구분 짓기 어려워졌고, 일에 몰두하면서 나를 돌보는 삶에서 많이 멀어져 있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이틀이나 밤을 새웠는데 참 이상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건 지금부터인데... 양궁을 했던 그날이 자꾸 떠올랐다. 그걸 해야 살 거 같았다. 침대에서 번쩍! 일어나 양궁장과 양궁수업을 열심히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인지 수요가 없는 건지 대부분 폐업했거나 정보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곳은 집에서 너무 멀었다. 검색을 이어가다가 체육회에서 운영하는 양궁장을 찾게 됐다. 그곳이 그나마 가까웠다.


우연 5 : 양궁인이 되다?

 막무가내로 ♣︎♣︎시청 담당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양궁장에서 양궁 배우고 싶어서 전화드렸어요~!" 담당자분은 앞뒤 없고 해맑은 나의 질문에 잠깐 당황하시더니 ♣︎♣︎시양궁협회 전무이사님 번호를 알려주셨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화는 넘어가기를 듭했다. 드디어 수업을 담당하시는 총무이사님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로 일반인을 위한 생활양궁 수업은 진행하지 않는다고 하 거다. 어떻게 연결된 기회인데!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저 광주에서 양궁체험도 해봤어요!", "정말 너무 배우고 싶어요ㅠㅠ" 등등 끈질기게 어필한 끝에 양궁장에 와보라는 대답을 받아내고 말았다. (! 스포! 그리고 그는 저의 스승이 됩니다... 후후) 다음 주 토요일엔 드디어 양궁을 배우는구나!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일주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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