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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Mar 23. 2020

그 어렵다는 간섭하지 말고 공존하기

아이를 키우며 생긴 강박 아닌 강박이 있다. 날씨가 끝내주면 무조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놀아야 한다. 즐겨야 한다. 나가고 볼 일이다!

지난 일요일도 그런 날이었다. '날씨가 끝내줄 때 하는 강박적 과업 2'인 대청소와 이불 빨래를 부랴부랴 해치우고 집을 나섰다. 남편이 예약한 헤어샵에 들렀다가 바다에 가려던 참이었다. 아빠 머리 다듬는 동안 헤어샵 근처 교회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는 아빠가 왔음에도 한참을 놀이터에 머물렀다. 또래 친구도 없었고 집 앞 놀이터나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그저 아기들이 발을 구르며 타는 지붕카가 한 대 추가되었을 뿐인데, 아이는 다소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한참 작아 보이는 장난감 자동차에 몸을 구겨 넣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발을 굴렀다.


남편과 나는 빨리 바다에 가자고 채근했지만 아이는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발만 구를 뿐이었다. 결국 한참 후에서야 음료수 사러 가자는 말에 먹보만보를 그 작은 장난감 차에서 꺼낼 수 있었는데, 슈퍼로 향하며 아이는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나 주차 연습한 거야. 엄마 아빠처럼 주차한 거야."


열혈 주차 시뮬레이션 중


평소 초보 운전자인 엄마의 식은땀 나는 주차 행태를 눈여겨보아 온 아이는 옆에서 가르쳐주는 남편 말을 따라 '삐뚫게 댔다'거나 '너무 붙었다'거나 하며 훈수를 둔다. 시동 끈 운전석에 앉아보기도 하며 운전에 관심을 갖던 아이는 마침 눈 앞에 보인 장난감 자동차가 반가웠던 것이다. 내가 무미건조하다 느꼈던 아이의 표정은 알고 보니 차가 삐뚤어졌나, 너무 붙진 않았나 앞뒤를 살펴보던 심각하고 골똘한 표정이었다. 무료하고 따분해 보이던 발구르기는 사실 신중을 기한 정교한 방향 조절이었던 것이다.


일주일에 다섯 번도 더 머무는 놀이터 말고 바다에 가고 싶어 채근하던 나를 말리며, 그냥 놀 때까지 두라던 남편에게 고마워졌다. 무언가에 깊게 몰입한 아이를 이토록 무신경한 엄마는 몇 번이나 방해하고 귀찮게 굴었을지 또 미안해진다. 잠깐 책 몇 페이지도 못 넘기게 하는 아이가 성가시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왜 너는 5 분도 엄마에게 시간을 주지 못하냐고. 차마 뱉지 못하고 꿀꺽 삼킨 말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놀이터에 기껏 데려가 놓고 어느 정도 놀았다 싶으면 이제 가자, 가자 노래를 불렀다. 어느 정도 놀았다는 건 순전히 내 기준이었다.





가끔 집 앞 초등학교에서 아이와 놀곤 하는데 그날도 아이는 운동장 스탠드에 앉거나 구름다리에 걸터앉아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도 안 하고 멍 때리는 아이 옆에서 나는 괜스레 지루해졌다. 좀이 쑤셨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 잠깐 나왔을 때라도 좀 뛰고 걷고 팔랑팔랑 놀지!' 

안타까운 마음에 옆구리 쿡쿡 지르며 "공 찰래?", "같이 한 바퀴 뛸까?" 하며 아이를 채근했다. (이쯤 되면 채근의 아이콘...)


한 두어 시간을 그렇게 지루하게 보내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는데, 아이는 연습하던 초등학교 축구부를 구경하는 것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코치 선생님은 왠지 어른이 아니고 어른 같은 오빠(청소년)인 것 같다거나 계단 오르내리기 연습하면 달리기가 빨라지는 건가 보다며 오늘의 관찰 소감을 줄줄 읊는 것 아닌가.

으이그. 걷고 싶으면 아이 근처에서 좀 걸으면 되는데. 심심하면 책이라도 챙겨 와 옆에서 읽으면 되는데... 아이는 내가 아닌데, 나는 아이가 아닌데 왜 그랬을까. 왜 내 주장만 했을까. 아이는 점점 나와 멀어지며 자기 세계에 몰입해가는데 나는 아직도 한 몸처럼 붙어지내는 신생아 엄마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에 뒷머리가 띵했다.


얼마 전 읽은 오소희 작가의 <엄마의 20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가족끼리 간섭하지 말고 공존하라고. 자식이 똥차를 골라타 더라도 아이 스스로 똥차의 한계를 느낄 때까지 모른 척하는 수밖에 없다고. 심지어 끝까지 똥차만 좋대도 그뿐이라고.


여태 뭐 "나는 나, 애는 애지." 하며 되게 쿨한 척, 깨어있는 척 해왔는데 어쩌나. 아이가 이제 6 살인데 벌써 이래서야... 똥차 탄다 그러면 뒤에서 쫓아가며 클락션 겁나게 누를 것 같은데 어쩌나.

한 몸으로 열 달을 지내고 삼사년을 한 몸같이 지내온 아이... 그 시간이 때로 버겁고 답답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아이를 분리된 존재로 생각하는 게 더 어려운 시기가 된 것 같다. 머리로는 알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 그것. 독립적인 인격체로 아이를 대하기. 같이 문을 나서면 저만치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씩 네 세계를 뚝 떼어 낯설게 바라보리라 다짐해본다. 




자녀는 부모의 분신이 아닌 독립적인 인격체입니다. 언젠가 떠날 손님이라고 생각하면 내맘보다 아이 맘을 더 살피게 되고 단점보다 장점에 눈이 갈 겁니다. 곧 닥칠 이별을 떠올리면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거에요.
_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저자, 여성학자 박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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