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같지 않은 너를 사랑해
놀이터에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엄마, 오늘 저녁 뭐야?”
“아싸~!!”
과연 아싸를 외치게 한 저녁 메뉴가 무엇일까. 잡채? 불고기?
뭣을 먹느냐는 일생일대의 고민. 나 역시 귀가 솔깃해졌다. 옆에 있던 친구들도 그래서 저녁에 무얼 먹느냐고 채근했다. 정답은 싱겁게도 라면.
소녀들은 좋겠다고 호들갑을 떨며 자리를 떴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 집 작은 사람과 살면서도 많이 겪어 본 상황이다. 딸은 대강 있는 반찬과 밥에 들기름 쪼르륵해서 잘게 부순 김으로 조물조물 만든 주먹밥을 좋아한다. 조미액과 건야채가루를 섞은 밥에 유부에 넣으면 끝나는 유부초밥이나 마트에 파는 가쓰오부시 우동… 아무튼 5 분 내 조리 가능한 메뉴들을 좋아한다. 언젠가 엄마가 해준 기억에 남는 요리에 ‘짜장 라면’이라고 적어온 어린이집 활동지를 보고 민망함에 콧구멍을 벌름거렸던 기억이 난다.
이런 나라고 정성과 시간을 들인 요리를 아주 안 하진 않는데 어쨌거나 반응은 유부초밥이나 미역국 라면에 밀리기 십상이다. 그럴 땐 좌절하기보다 ‘역시 MSG 맛을 이길 순 없지!’ 라며 아주 간단히 항복 선언을 한다. 그리고 서로 행복하게 간단한 한 끼를 먹는다.
아이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로서 매번 간편식으로 먹일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아싸를 부르는 불량한 맛도 괜찮지 않을까. 아이의 행복지수를 높여준다면 그것도 일종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거라며 정신 승리를 해본다. 놀이터 소녀의 통화를 듣고 왠지 모를 위안을 얻는다.
문득 아이가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인상적인 요리로 짜장 라면을 해준 엄마가 쓸 글은 아니지 않아?”라고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같은 맥락에서 그림책을 읽을 때도 종종 그런 것을 느낀다. 내 딴엔 뭐 해외에서 권위 있는 상을 받았거나 아동심리학자가 추천하는 책을 나름 고심해서 골라 보여줬는데 심드렁할 때. 그런데 앞뒤 맥락이 없고 도대체 뭘 말하려는 지 알 수 없는 책엔 또 깔깔깔 넘어갈 때. 심지어 전날 읽었는데 오늘 또 읽고, 내일도 읽을 거라고 방방 뛸 때. 삼십 중반의 인생은 동심을 잃은 것일까. 의아해하며 아이가 좋아하는 포인트가 뭔지 곰곰이 찾아보곤 한다.
그림책을 읽어주다 난데없이 부모의 역할이란 뭘까 궁금해진다. 적어도 재미없다는 세계명작도서를 억지로 들이미는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 깔깔거리는 아이보다 더 크게 깔깔 웃는 것. 내 배 안에 있던 아이는 이제 응애- 하는 경쾌한 울음으로 세상으로 나선, 나와 다른 인격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육아하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내 마음 같지 않은 아이의 모습을 볼 때였다. 더 좋게, 편하게 해주는 건데, 더 건강한 음식을 주는 건데… 종종 아이가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생각했다.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아이가 답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는 내가 아니니까. 아이가 내 마음을 모르는 게 당연하고, 나 역시 아이 마음을 백 퍼센트 이해할 수 없다.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아이에게도 좋은 것이 되리라는 법은 없다. 아이가 여섯 살인 지금은 덜하지만 크면 클수록 중대한 선택 해나가게 될 텐데 좀 더 자주 나와 아이의 다름을 되새겨야 할 것 같다. 자식 때문에 가슴이 답답할 때면 한 번씩 외쳐보는 것 어떨까.
저 아이는 내가 아니다. 나는 쟤가 아니다.
책임감도, 부담감도 살짝 내려놓고 그저 나와 다른 인격체를 탐구 관찰하며 사는 것도 육아의 재미라면 재미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