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잠전문가 Mar 04. 2024

스팸과 브로콜리, 죄책감과 뿌듯함 사이



우선 만세 삼창부터 하고 시작해 볼까. 

개학 만세! 만세! 만세!

저마다의 설렘과 긴장으로 코끝의 공기조차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3월. 겨울 늦잠에 길들여진 어린이들이 어찌어찌 이른 아침에 정신을 차려야 하는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아이의 방학을 핑계로 게으른 겨울을 보낸 나도 다시 규칙적으로 생활을 꾸려볼 참이다. 아이들에겐 참으로 달콤한 방학이 엄마들에겐 극기훈련처럼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삼시 세끼'를 해먹여야 한다는 의무 때문일 것이다. 특히 뚝딱뚝딱 요리를 만들지 못하는 데다 레퍼토리도 빈약한 엄마라면 삼시 세끼를 차려야 하는 공포는 극한에 달한다. 감사하게도 저학년인 아이는 방학 내내 돌봄 교실을 다녔기 때문에 그곳에서 제공되는 점심 도시락도 먹고 왔지만, 지난 한 주는 돌봄 교실의 재정비와 개학 준비를 위한 방학이 있었기 때문에 요 며칠 주방에서 허둥지둥 보냈다. 일주일도 쉽지 않았는데, 두 달의 겨울 방학 삼시세끼와 정면승부하신 양육자분들께 진정한 존경을 표한다. 


요리를 잘 못하는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물리도록 반복하는 요리 권법은 '볶.문.비'다. 무조건 볶고(볶음밥) 뭉치고(주먹밥) 비빈다(냉장고 털어 다 비벼버림)! 특별한 재주 없어도 있는 재료로 만들면 되고 아이도 간편하게 먹다 보니 자꾸만 반복하게 된다. 꾀돌이 엄마는 멸치 볶음과 콩나물 무침 같은 반찬은 만들면서 애초에 나중 일을 생각한다. 먹다 남은 멸치는 잘게 다져서 주먹밥행, 남은 콩나물 무침은 들기름 바른 무쇠 냄비에 밥과 볶은 야채, 고추장과 함께 비빔밥행이다. 그래도 남으면 삼겹살 구워 먹으면서 같이 구울 수도 있다. 이렇게 메뉴의 스펙트럼을 넓힐 생각은 하지 않고 잔머리만 굴리는 것이, 마치 시험 시작하자마자 5분 전에 외운 수학 공식먼저 시험지 귀퉁이에 써넣는 중학생 시절과 썩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한 주도 그랬다. 누군가는 후다닥 차려낼 빈대떡과 어묵탕 따위를 한식 정찬 내듯 느릿느릿 버겁게 만들어 내다가 한 삼일 정도 지나자 주먹밥, 볶음밥, 비빔밥 다 튀어나왔다. 목요일 정도 되자 지친 엄마는 라면이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오늘 점심은 라면이다! 이제 열 살이 되었으니 일주일에 한 번쯤은 특식으로 먹이곤 한다. 마음은 불편하고 몸은 겁나게 편한 라면은 어쩌면 엄마에게 특식(특별히 편한식)일지도.

둘이 배 터지게 떡라면을 끓여 먹은 후 아이는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나는 식탁을 치우고 앉아 저녁을 생각했다. 점심엔 부실하게 먹었으니 저녁엔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해야 할 텐데... 대단한 걸 차려주는 것도 아니면서 저녁 메뉴 생각은 왜 반나절이나 하는 걸까. 이것은 아마 이십 년 후에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될 듯하다. 무거운 머리로 장을 보러 갔다가 700원이 써붙여진 브로콜리 앞에서 이마를 탁 친다. 그래, 이거야! 전국 브로콜리 재배면적과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는 제주에서는 제철 브로콜리를 매년 정말 싸게 판다. 브로콜리야 말로 세계 10대 슈퍼푸드에 속하는 영양 덩어리 아닌가! 심지어 끓는 물에 데치면 끝이라 간편하기까지 하다. 브로콜리를 메인 반찬으로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저녁 반찬에 끼워 넣기로 한다. 



이른 저녁 시간, 나는 또 주방에 서서 골똘히 생각한다. 있는 반찬이라곤 멸치, 콩나물, 브로콜리인데 건강 반찬이긴 하지만 속세의 맛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닐까. 식탁을 보고 시무룩해질 아이 표정을 떠올리다 나는 그만 그것을 발견하고 만다. 명절에 어디선가 받은 스팸. 의사들이 절대 안 먹는 음식 Top5에 성실하게 노미네이트 되는 가공육! 그러나 갓 지은 밥에 올려진 그것의 유혹을 쉽게 떨칠 자 누구랴. 평소 소시지나 햄류 같은 가공육은 잘 사지도, 먹지도 않지만 다 떨어지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레퍼토리에 나는 슬그머니 스팸을 주워 들었다. 분홍 덩어리가 도마로 척 미끄러지고, 햄을 감싼 기름처럼 죄책감이 찝찝하게 마음속을 맴돌았다.


칙- 햄을 얇게 썰어 달궈진 프라이팬에 하나씩 올리기 시작하자 시장한 아이는 다다다다 달려와 코를 벌름거리며 야단이 났다. 오! 맛있겠다. 식탁에 갓한 밥과 멸치 콩나물, 그리고 슈퍼푸드와 의사 기피 음식이 동시에 놓였다. 아이가 브로콜리를 입에 넣고 아삭아삭 씹으면 마음이 너무 뿌듯하고. 안 그래도 짠 스팸을 초고추장까지 찍어 먹으면 살짝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아이는 금세 한 그릇을 비우고 이렇게 말했다. "엄마, 가끔씩 이렇게 스팸 구워주면 안 돼?" 

그래. 자주는 그렇지만 가끔씩은 라면도 먹고 햄도 구워 먹고 하는 거지 뭐. 나는 브로콜리와 스팸으로 때운 저녁을 치우며 이 두 메뉴가 꼭 내 육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최선을 다해서 잘해주고 싶지만 언제나 그러기엔 힘이 부치고, 때로는 대충 때우고 싶은 그런 마음. 아이를 떠올릴 때면 늘 내가 애써온 일과 아쉬운 일들이 뒤섞여 오묘한 감정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모래알 같이 많은 시간과 날들을 함께 보내는 것이 부모와 자식이다. 한 톨의 아쉬움에 집중하기보단 지속가능한 편안함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되뇌어 본다. 


아이의 식사를 챙기는 일은 만만치 않지만, 아이가 있어 사람답게 산다. 혼자 점심을 먹는 날이면 일을 하다가 식사가 늦어지거나,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다 공복을 견디지 못해 위기탈출처럼 대충 아무거나 먹으며 배고픔을 탈출하기 급급하기 때문. 제철 채소, 제철 과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도 다 아이 덕분이다. 살뜰하고 똑소리 나는 살림이랑 거리가 먼 나. 아이가 독립하면 삼시세끼 시리얼 먹으며 방구석에서 골골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새삼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먼 미래의 걱정은 접어두고 아이가 학교에 간 오늘은 만세를 외치고 싶다. 영양 만점 급식 제공해 주는 공교육 만세! 



(지난주 연재글은 주방에서 우물쭈물하느라 올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ㅜ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