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16만 원"
"쓰읍. 음..."
"15만 원에 자물쇠까지 드릴게. 상태가 나쁘지 않아요. ‘삼천리’ 거라서 튼튼하고"
"음..."
"...14만 원 괜찮아요?"
"사이즈가 좀 작지 않나요? 딱 제가 찾던 싱글 기어 자전거긴 한데. 쓰읍. 이거 참, 원"
자전거방 아저씨가 말을 잊지 못했다. 순간. 나는 13만 원이라는 먹잇감이 코앞까지 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맹수처럼 그 정적 뒤에 숨어 천천히 턱을 만지작거렸다. 엄지와 검지와 턱수염이 비벼지는 까끌까끌 소리만이 자전거방을 채우고 있던 찰나. 먼저 입을 땐 건 역시나 아저씨였다.
"그럼 그냥 13만 원에 가져가세요."
"넵!"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양심은 있어서 계좌이체로 결제했지만, 자물쇠에 점멸 라이트 두 개까지 야무지게 챙겨 받았다. 성공적인 거래가 아닐 수 없었다. 통장 잔액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 나도, 누군가 수리 맡기고 찾아가지 않아 골칫거리였을 ‘상태가 나쁘지 않은’ 중고 자전거를 처리한 아저씨도. 두루두루 윈윈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자전거를 사기로 마음먹은 건 겨울이 한창이던 2월쯤이었다. 인생 첫차를 산 지 3개월이 지났을 때였고, 살다 살다 무릎까지 쌓이는 눈을 처음 겪은 주였으며, 이런 이런 몸무게가 4kg이나 찐 걸 알아버린 날이었다.
30년 평생을 자동차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부산과 서울에서만 살았으니 오죽할까. 남이 운전해 주는 대중교통이 국내에서 제일 잘 돼 있는 두 곳인데 내 힘들여 운전하는 게 여간 못마땅한 일이 아니었다. 20대 후반이 되자 주변에선 차를 사라며 설득까지 했다. 데이트부터 시작해서 연애사를 거처 결혼은 물론이고 자녀계획까지 이어지는 논리정연하고 담백하기 그지없는 설득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에게 필요한 건 네이버 실시간 버스노선 정보의 빠른 업데이트뿐이었다.
그런데 강원도 양양군은 만만한 지역이 아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주문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강릉 최북단이고, 지금 일하고 있는 땡땡가게로 말할 것 같으면 양양 최남단이다. 즉, 차로 15분 거리지만 지역과 지역을 넘나들어야 한다. 시외버스는 있을 턱이 없다. 강릉을 가로지르는 300번 대 시내버스를 집 앞에서 타고 10분쯤 가다, 강릉의 끝인 향호리 종점에서 내려야 한다. 그리고 양양을 가로지르는 마을버스를 갈아타면 되는데 이놈에 마을버스가 1시간마다 운행한다. 환장할 노릇인 게 출근은 오전 10시지만 마을버스는 9시 15분에 있다. 그걸 놓치면 영락없이 지각이다. 몇 개월을 그렇게 출퇴근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오토바이를 샀다. 그런데 겨울이 문제였다. 11월까지는 어떻게든 버티며 오토바이를 탔지만, 12월에 들어서자 더 이상의 고집은 동상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설득보다 양양의 마을버스와 강원도의 추위가 훨씬 논리정연하고 담백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하루 만에 결정하고, 하루 만에 차를 받았다. 이렇게 편할 수가! 따뜻한 히터 바람에 한번 놀라고, 나날이 늘어가는 노래 실력에 두 번 놀랐다. 이동식 개인 노래방 치곤 비쌌지만, 운전도 퍽 재밌었고 생활 반경도 팍 늘어났다. 그렇게 2개월이 지나자 점차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개구리 뚜벅이 적 생각 못 한다고, 가까운 거리도 에라 모르겠다. 아늑한 운전석에 앉아 90년과 2000년을 관통하는 발라드 한 곡만 열창해도 코인노래방 값은 번다는 생각으로 시동을 걸기 일쑤였다. 버스 탈 때는 그래도 많이 걸었고, 오토바이 탈 때는 추위를 이겨내느라 칼로리 소비가 많았는지 오히려 살이 빠졌었다. 그런데 걷기를 포기하고, 따뜻한 히터 바람에 노곤해진 몸은 제정신을 못 차리고 비대해져만 갔다.
아무튼. 어떻게 하면 여름 전에 살을 쏙 뺄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자전거가 번쩍했다. 주문진에서 땡땡가게가 있는 남애1리까지 7.5km. 왕복 15km를 자전거로 출퇴근하면 살은 금방이고, 해안 길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날이 따뜻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4월이 끝나는 무렵에 자전거방에 들른 것이다.
집 앞에서 페달을 밝기 시작하면 주문진 시장길을 가장 먼저 만난다. 양옆으로 늘어선 수많은 건어물 가게엔 오징어와 명태, 쥐포 등의 바짝 마른 생태계가 벽을 장식하고, 난생처음 보는 젓갈들이 냉장고에 가득하다. 입구 앞에 한가로이 앉아 있는 주인들은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손짓하고, 줄지어 새워진 관광버스에선 화려한 등산복을 휘두른 어르신들이 쉴 새 없이 내리며 그 손짓에 이끌린다. 그곳을 지나면 건어물 가게와 횟집, 회 센터, 어민시장, 대게집들이 뒤엉킨 거리가 나오고 나는, 그 거리를 지날 때 풍기는 비릿하고 습한 고농축 바다 향이 더 이상 싫지 않아졌다.
주문진 시장길을 지나면 해안길을 따라 뻗은 자전거도로가 나오고, 그 도로를 조금만 따라가다 보면 금세 소돌해변이다. 얕은 수심 위로 일렁거리는 바닷물은 큼직한 에메랄드 수십만 개를 뿌려 놓은 듯 빛나고, 낮은 파도는 부드럽게 밀려와 그 빛들을 차례차례 쓰다듬으며 모래사장에 도착한다. 소돌해변 길은 티 나지 않을 만큼 낮은 내리막길이라 그런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와 자전거도 부드럽게 밀려가 주문진 해변에 도착한다. 강원도 해변은 워낙 넓어서 눈으로 보기엔 한 해변처럼 이어져 있지만, 나름의 경계를 두고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돌해변과 주문진해변도 이어져 있고, 주문진해변과 지경리해변도 이어져 있다.
주문진 해안길엔 명실상부 최고의 관광지가 있다. 국내 관광객보다 외국 관광객이 더 잘 아는 곳. 바로 BTS의 앨범 자켓 사진 촬영지가 있어서 언제나 외국인들로 붐빈다. 그런데 하필 자동차와 자전거 도로가 함께 있는 길 바로 옆에 있어서 경적을 울리지 않으면 쉽게 지나갈 수 없다. 그곳을 지나자마자 오직 자전거와 보행자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도로가 나온다. 나도 자전거를 타기 전까지는 들어가 보지 못했던 해안길.
입구부터 한 무리의 대가족같이 크고, 작고, 어중간한 키의 소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도로와 해변 사이엔 난관이 없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사람 한 명 없는 해변은 침착하고 고요했다. 간간히 지나가는 자전거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만 있을 뿐. 어느 해변에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요란한 엔지소리와 북적거리는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바람도 눈치가 있는지 불어오지 않았고, 햇빛도 사정을 아는지 조용하게 살갗을 두드렸다. 모든 공간과 모든 감각이 바다로만 메워졌고, 이전에 알던 모든 바다가 부끄러운 듯 마음에서 숨어버렸다.
낯선 길을 가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남이 운전해 주는 대중교통도 걷어내고, 남들이 그렇게 그렇게 설득하던 자동차도 치워 놓고. 오직 나의 두 손이 움직이는 방향과 오직 나의 두발이 움직이는 힘으로 앞으로 나가는 자전거만 있으면 되는 거였다. 움직임의 이유는 건강과 체중 관리를 위한 운동. 뒤늦게 터득한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만약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식에 관심이 없었다면, 그 낯설고 신비로운 해안길은 영원히 가지 못했을 것이다.
공기를 가르는 선선한 촉감을 느끼며 낯선 그 해안길을 지나 땡땡가게에 도착했고, 자전거에서 내리자마자 몸에서 열기가 폭발했다. 그리고 ‘이대로 라면 체지방률이 5% 미만으로 낮아져 너무 탄탄한 몸이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될 정도 땀이 쏟아졌다. 앞으로도 날이 좋으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할 생각이다. 그래서 여름 전까지 건강과 멋진 몸을 두루두루 얻어볼 심산이고, 대중교통과 차로 갈 수 없는 길도 두루두루 다녀볼 심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