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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시음회 Oct 30. 2022

제 10회, 비밀

[금요시음회] 가현의 시 같은 나날, 내 플레이리스트에선 동요가 흘러




     아이는 하루 세 번 영양제를 먹는다. 아침에 점심에 저녁에. 공식적으로 사탕이 금지되어 있는 우리집에서 오독오독 씹을 수 있는 맛있는 건 오로지 츄어블 영양제이므로 아이는 잠자리에 누워 아침이 어서 와라 두 손 모아 기다린다. 예전에는 잠에서 깰 때마다 울었던 것 같은데 영양제를 먹기 시작한 이후로는 번쩍 일어나 약통을 소중히 안고서 온다.


“ 엄마- 사탕이 먹고 싶어요 ! “


     손바닥 위에 딱 하나를 얹어 주면 아이는 아쉬운 표정을 짓지만, 금세 얼굴을 바꾸고 입안에 쏘옥 넣는다.


“ 엄마~ 선우가 사탕을 먹었어요 !!!!! 선우는 사탕이 너어무 좋아요 ! ”


     행복한 표정을 한다. 사탕 하나로도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을 지어 보일 수 있는 나이라니, 어쩜 이렇게 가성비가 좋은지. 뚜껑을 열지 못해 도움을 청하기를 수십 번 요즘은 제법 손아귀에 힘이 생겨 혼자서도 열 수 있게 되었다. 뚜껑을 열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혼자서 사탕 먹기를 해낼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아이는 내게 달려와 자랑하지 않는다. 입안에 한 움큼 해바라기 씨를 숨긴 햄스터처럼 약통을 들고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진다.


“ 엄마 사탕은 딱 한 개만 먹는 거야, 맞지 ? ”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다음 등장한 아이는 괜히 말을 더한다. 나는 몇 개나 먹었는지 묻지 않지만, 입술을 핥는 아이의 얼굴에 슬쩍 다녀가는 만족스러움에서 상황을 읽는다.


“선우야, 너 비밀이 뭔지 알아 ? “ “비밀 ? 그게 몬 데에 ?”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짓는다.


비밀은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밤마다 딸 아이가 집을 나선다.’ 


     엄마의 수첩에 조그맣게 적혀 있었다. 바야흐로 열여섯, 내 오랜 짝사랑이 가장 무르익었던 여름이고 막 터지기 직전의 가을이었다. 나는 매일 밤 열 시쯤 되면 문을 열고 나서서 당신의 집 앞 벤치에 짐짓 모르는 체 자리를 잡곤 했다. 가로등이 적당히 내리는 자리에 앉아서 책이나 영화 잡지를 보고 있었다. 보는 척을 했나. 한 장도 겨우 넘어갈 정도로 온 신경이 다른 데 가 있었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다. 고개를 들면 머리 위로 나뭇잎이 하늘에 가득했다. 봄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 나무였다. 그 나무 아래서 만발하던 꽃을 곱씹으며 우두커니 당신을 기다렸다.


     당신은 집에 가다 나를 발견하는 날이면 인사를 건넸다. 야속하게 스쳐 지나가는 날도 있었다. 나는 당신을 부를 용기조차 없어 가만히 멀어지는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또 어떤 날은 당신이 와서 아이스크림을 건네고 가는 거지. 오는 방향으로 눈을 뗀 적이 없는데, 어느 틈새에 사라졌다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너무 놀랐고. 나는 아이스크림 껍데기마저 소중해서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다가 책갈피로 쓰기도 했다. 할머니는 하다하다 쓰레기도 못 버리냐고 혀를 찼다.


     어느 날부터 당신은 보이지 않았다. 자꾸 다가가기만 하는 내가 부담이었을까. 티나지 않게 마음을 묻어도 당신 앞에만 서면 고장나는 나는 버젓히 드러나곤 했으니까. 거름 한 번 주지 않은 밭인데도 새순이 굳은 땅을 비집고 돋아나서 이미 웃자란 데 옆에 또 줄기를 키우고 그랬다. 


     집에 가는 길목을 돌아갈 정도로 내가 싫으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가볍게 말하지 못하는, 무거운 마음을 가진 내가 너무 싫었다. 그렇다고 고백할 용기도 없었다. 우리는, 그래. 우리가 우리던 시절이 아주 잠시 있 ...

나는 또 끝을 보는 게 무서워서, 지금처럼도 못 지낼까봐서 나무가 앙상해지도록 기다리기만 했다.

 

     당신의 곁에 내 자리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원하는 자리는 없을 거란 걸 어느 날 당신은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내 입으로 제대로 된 고백도 못 해보고 사랑이 끝났을 때 친구들은 툭하면 우는 내가 그렇게까지 우는 걸 처음 봤다고 했고, 정말로 잠깐 제 정신 아니기도 했다. 그래도 당신은 또 보고 싶어서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루를 살다가 정말 당신을 마주치곤 어느 길목에 주저 앉아 한참을 울었다. 눈물을 닦고 일어난 다음에는 당신을 기다리는 일 따위 하지 않겠다 굳게 다짐했다.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싶어 당신의 학교 앞이나 도서관 앞이나 집 근처를 배회하던 일도 그만두겠다고. 지독한 관성을 거슬러 보겠다고.


     며칠을 내리 울고 있으니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그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나눠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지 않냐며, 가지지 못해도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도 있는 거라고, 엄마는 말해주었다. 하지만 막 실연 당한 내게 그런 이상적인 말은 사치였다. 당신의 한 마디에 저만치 날아오르고, 앞으로 굴렀다가 뒷걸음질 치면서 넘어지고, 와장창 부서지던 나는 사랑을 받고 싶은 고작 열여섯이었다.

 

     살다 보니 다른 누군가가 눈에 차는 날도 생겼고, 차오르다 높은 파도가 되면 울렁거리기도 했지만, 그 사람만은 기어이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떠나지 않고, 죽지도 않고 살아남길래 이게 진짜 사랑이구나 그랬다. 이제 나는 더 큰 사랑을 만나 그 시절을 구석으로 밀어내고 현재를 살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그 사랑이 과거가 되는게 지금 내가 아픈 것보다 더 두려웠던 때가 있었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라는, 어느 영화 속 카피를 한때는 죽을 만큼 싫어했다. 나는 절대로 그 문장이 될 수 없으니까. 정작 나는 그 문장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들 있었다. 당신이었는지, 당신을 사랑하던 나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물 밀 듯 흘러들어오는 그리움에 나는 몸을 떨고는 했다. 당신과의 기억을 하나하나 꺼내다 보면 나는 금방이라도 뚝뚝 물이 떨어졌다. 적시고 말리고, 반듯이 개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다시 저 깊숙한 곳에다 묻기를 반복하며 많은 해를 보냈다. 오래된 기억들이 헤지고 바래져 색을 잃고 바스러지는데도 어찌나 소중히 감싼 건지 그 시간만은 먼지 하나 없이 아름다운 면만을 간직한 채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았다.

 

     솔직히 말할게. 당신을 욕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알아. 당신은 그냥 당신으로 살았을 뿐인데, 내가 당신을 한참 좋아하고 좋아하다가 미워도 했다는 걸. 당신은 그런 나를 그냥 아무 말 않고 지켜봤다는 걸. 다 알면서도 내 비밀을 지켜주었던걸. 그래서 이렇게 고마워졌다. 애틋하다가 미안해졌다.


      엄마의 말을 이해한다. 그래, 어느 하늘 아래서 같은 숨을 나누어 쉬고 있을 당신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알지 못하는 당신의 안부를 늙어버린 벚나무에 묶어도 보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에, 봄 꽃과 가을 낙엽에 실어보내곤 했는데. 어쩌다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진심으로 사과해야지 그랬다. 괴로웠으므로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그래도 당신의 절망을 바란 적은 없었다고. 내가 없는 당신의 미래에서 부디 내가 준 마음이 가장 작은 사랑이길 바란다고. 


     아이가 나와 같은 비밀을 만드는 날을 상상한다. 우리가 모르는 모습을 가진 선우라니 벌써 아찔한데. 조금은 섭섭하고 부쩍 커버린 느낌이 들까. 내심 기쁘기도 하겠지. 공유하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는 것, 비밀들이 너를 마침내 너로 만들거야. 진짜 너로 말이야.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아도 내 안부를 수첩에다 묻던 나의 엄마처럼 굴겠다. 은근슬쩍 운을 띄우는 경솔한 엄마가 되지는 않겠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빤히 보이는 거짓말도 애써 모른 척하겠다. 이 시간을 살아봤으므로 수십번을 더 오갈 천국과 지옥으로부터 기꺼이 너를 지켜내 보겠다. 혹시라도,

너의 비밀이 그 시절의 나처럼 아픈 사랑이라도 나는 네 사랑을 두 팔 벌려 응원하겠다. 네 세상에서 네가 가장 작아지게 되면 내가 너를 크게 사랑해줄게.

 

     어린이집 생활을 듣다가 선우 친구들 안부를 묻는다. 


그래서 선우는 가윤이랑 친해, 아윤이랑 친해 ? 리아와 노는 게 행복해, 리안이랑 노는 게 즐거워 ?

선우는 지오가 좋아 민재가 좋아 ?


     이 대목에서 항상 선우는 대답을 망설인다. 재잘거리는 친구에게서 보통은 찾아오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우리를 관통한다. 지오와 민재는 알까 ? 선우가 너희 이름을 소리낼 때 옅은 미소를 숨기지 못한다는 걸. 말을 아끼는 선우에게서 움트는 새싹을 본다.


아무래도 작은 비밀이 생긴 거 같지 ? 소년에게 들려주니 아니 벌써 ? 하며 웃는다. 

시작일까. 나는 괜스레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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