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올해 봄은 지난 어느 해보다 느리게 올 것만 같다. 지난 며칠 전, 입춘이 지났어도 여전히 바람이 매서웠다. 가고 싶은 커피숍에 가려고 나갔다가, 살인적인 칼바람에 다시 발길을 돌려 일터와 가까운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향했다. 프랜차이즈 카페 커피는 왠지 자판기 탄산음료 먹는 느낌이라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이 매서운 바람과 의미 없이 싸워봤자 나만 손해지.
‘봄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구시렁거리며 달달한 라테 한잔을 주문했다. 먹지 않아도 이미 아는 라테 맛을 생각하며 창 밖 찬바람에 고통스러워하며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 먼 커피숍 안 가길 잘했지 라는 생각이 두 번 더 들었다.
따끈한 라테가 나왔다. 어머! 한 모금 마셨는데, 이미 아는 맛이 아니었다. 여느 때보다 고소한 우유 맛이 더 느껴졌고 라테 몇 모금에 얼어있던 몸이 사르르 녹았다.
항상 익숙해진 맛에 더 발전된 맛을 느낄 수 있을 때 괜스레 신이 난다. 라테에 시럽 한 방울 더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라테를 만든 바리스타의 기분과 컨디션이 좋은지 나쁜지, 그날의 우유의 온도 등 얼마나 변수가 많겠나.
뭐... 어쨌든 커피 한 모금이 주는 만족감이 크면 좋은 거지.
카페를 둘러보니 어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 채 노트북에 집중하며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마스크를 벗은 채 음료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데 그 광경이 여전히 낯설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멀었 나보다.
텅 빈 눈동자, 흐릿한 이목구비, 검은색 외출복.
그림 속 군중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녹색 빛 혹은 박제된 굳어진 얼굴로 병약한 안색이다. 요즘 우리도 아프지 않은데 마스크를 낀 채 단 한 가지의 표정으로 살지 않는가? 그림 속 하늘은 붉게 타올라 사람들을 덮칠 듯하게 강렬하다. 산책을 하는 것인지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으로 가세요?”라고 섣불리 말을 걸기에는 무참히 무시당하거나 공격을 당할 것만 같다. 뭉크는 왜 이 익명의 사람들을 이렇게 병적 질환이 있어 보이게 그린 것일까?
네덜란드의 표현주의의 개척자라고도 할 수 있는 에드바르드 뭉크는 질병이 주는 공포감을 어린 나이부터 접해왔다. 악마처럼 슬며시 다가와 목숨을 앗아가는 질병은 뭉크의 어머니와 누나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당시 뭉크의 나이는 다섯 살. 그의 여동생 역시도 정신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삶을 살았다.
온전히 평안한 삶이란 상상해 볼 수 없었던 뭉크는 삶의 지속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른 나이에 알았다. 죽음이라는 존재를 떼어내고자 처절하게 고군분투 하기보다는 자기의 삶 속에서 자연스레 함께하는 동거인처럼 여기며 인간의 내면적 불안이라는 근원에 집착했다.
“질병, 광기, 죽음은 내 요람에 참석 한 천사들이었고 그 이후로 내 평생 동안 나를 따라왔다.”
-에드바르드 뭉크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요람에는 세명의 요정 (이름: Fauna, Flora, Merryweather)이 모여서 축복과 선물을 주었던 것과 대비되게 뭉크의 요람에는 ‘질병, 광기, 죽음’이라는 세명의 ‘천사들’이 우두커니 있었다. 뭉크가 그러한 광기와 어두운 존재들을 ‘천사’라고 표현한 점을 보면 자신의 ‘팔로워’로 인정한 샘이다. 아마 '그 삼총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뭉크가 표현하는 개인의 내면의 탐구과정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절제되지 않고 정돈되지 않은 뭉크의 찝찝한 표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우리 마음속 불안을 건드린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광경을 보며 지낸 지도 어느새 일 년이 다 돼간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쯤 종결될지 모르겠지만 끝은 있겠지. 그 끝이 언제인지 모르니 다들 불안한 것이지만. 가뜩이나 코로나 때문에 불안한데 알 수 없는 자연재해는 엎친데 덮친 격이다. 뭉크도 평생을 이러한 질병, 광기, 죽음 그리고 스페인 독감도 이겨내며 자신만의 회화 속 새로운 길을 만들며 살았다. 81세까지 꽤나 긴 인생 살았다.
우리도 잘할 수 있길 바라본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