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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백 자판기 Apr 04. 2021

[찻집과 일상] 벚꽃 없는 벚꽃 다과회

그 날의 공간 : 찻집  <한국의 집>

벚꽃이 보고 싶었다.


  회사에 무슨 일이 있어도 휴가를 쓰겠다고 말한 건 오직 그 하나 때문이었다. 특별한 일정도 특정한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 차를 마시기로 했다. 봄이 되면 다양한 이유로 즐기지 못했던 봄날의 한 철을 이제는 제대로 즐기고 싶었다.


  벚꽃 놀이는 생각보다 어려운 과제다. 매년 피는 꽃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즐기려고 마음먹을 때면 신기하리만큼 금방 사라지는 게 벚꽃이다. 벚꽃 놀이에 실패하는 이유도 다양하다. 비가 와서. 황사가 심해서. 한창 이쁘게 폈을 때는 시험공부를 해야 했어서. 날이 밝아 벚꽃이 가장 아름답게 흐드러질 때는 회사에 있어야 했어서. 나와 함께 벚꽃 놀이를 해 줄 사람이 없어서. 시간은 났지만 지금은 딱히 벚꽃에 감흥이 없어서. 언젠간 할 수 있을 테니까. 내년에도 꽃은 피니까. 벚꽃은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그런 이유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벚꽃을 수없이 흘려보냈고, 흘려보낸 시간은 늘 후회로 남았다.


  그래서였다.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벚꽃을 제대로 즐기기로 마음먹은 건. 검토를 필요로 한다는 요청 메일이 수북하게 쌓여있어도, 함께 일하시는 분이 문의 사항을 메신저로 보내도. 휴일에 이동하는 지하철 안에서 답변하는 한이 있어도 올해만큼은 성공적인 벚꽃 놀이를 하기 위해 충무로에 위치한 [한국의 집]으로 바쁘게 이동했다.


오늘의 찻집 [한국의 집] : 시즌별로 다른 궁중 다과를 제공해주는 찻집. 처음 가면 생각보다 큰 한옥에 놀라 멈칫하게 된다.


  본래도 맛집은 자주 찾아다녔지만, 찻집 탐방에 푹 빠진 건 작년부터였다. 찻집에 빠진 계기도 단순했다. 다양한 다구를 쓰며 차를 마시는 순간이 너무 재밌어서. 귀엽고 아기자기한 다구들을 들고 어떻게든 잎차를 즐겨보겠다고 애를 쓰며 한적한 공간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카페에 있을 때보다 편하게 깊은 이야기도 하게 되곤 했다.


  그래서 이번 벚꽃 놀이는 찻집으로 가고 싶었다. 기왕이면 흐드러진 벚꽃과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은 찻집. 벚꽃잎이 떨어지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다과회라니. 생각만해도 근사하지 않은가. 마침 [한국의 집]이라는 공간 역시 최근에 알게 된 공간이라 어떤 곳일지 궁금하던 차였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사진으로만 어떤 곳인지 추측할 수 있었지만, 한옥과 녹음이 함께 어우러진 공간이니 벚꽃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없었다.


  녹음도 있고 멋들어진 한옥도 있고, 심지어 다과상도 근사하고 평일에 함께 놀 친구까지 급하게 섭외했건만 벚꽃은 없었다. 심지어 [한국의 집]은 채광 좋은 한옥에 편하게 앉아 좋은 친구와 맛있는 차와 다과를 한가로이 먹을 수 있는 완벽한 곳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찾던 벚꽃은 파랑새마냥 보이지도 않았다. 따지고 보면 오면서 벚꽃을 가장 많이 본 건 집 앞이었으니 행복은 바로 옆에 있다는 파랑새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벚꽃은 항상 그랬긴 했다. 본래 가장 이쁜 벚꽃은 집 앞 거리에 있는 벚꽃이더라) 그래도 서러웠다. 벚꽃 놀이 한 번 제대로 즐겨보자는데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한국의 집] 궁중 다과 고호재(2021 봄 다과상) : 구성도 좋고 맛도 깔끔하고 좋다. 조금 더 배를 채우고 싶다면 계절별 죽도 추가 가능. 봄 시즌에는 "씨앗 오자죽"이 제공


    서글픈 마음으로 내어주신 매화차를 한 모금 마시니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봄이었다. 벚꽃은 없어도 봄은 봄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휴가다. 업무 메일이 있어도. 메신저가 오고 있어도. 틈틈이 챙길 건 다 챙기며 살아가는 일상이라 하더라도 회사가 아닌 다른 공간에 분리되어 있었고, 좋은 친구와 진지한 이야기부터 사소한 이야기까지 편하게 이 한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소중한 순간들은 벚꽃만큼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그라든다. 그렇게 쉽게 떠난 순간들이 때로는 야속하게 느껴지지만 그만큼이나 나 역시 수많은 순간들을 매정하게 떠나보냈을 것이다. 벚꽃 놀이에 집착 아닌 집착을 했던 이유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보냈던 모든 순간들을 붙잡지 못한 것에 더 이상 핑계를 붙이고 싶지 않아서. 올해 필사적으로 벚꽃을 찾은 걸지도 모른다. 소중한 걸 알면서도 충실하지 못했던, 과거의 시간들을 부정하고 싶어서.


  그럼에도 또다시 벚꽃 놀이에 실패했다. 오후의 해는 점점 기울어져갔고, 다과상에 올려져 있던 다식들도 싹 비웠다. 벚꽃이 가장 반짝이며 빛날 때 나는 벚꽃 하나 없는 이 곳의 풍경들만 추억으로 남기고자 사진 찍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벚꽃 놀이를 하겠다고 했건만. 오날도 역시 벚꽃 놀이를 하지 못한 이유 하나를 또다시 남겼다.


좋은 찻집 찾았다


  그랬다. 벚꽃은 없지만, 정갈한 다과상이 좋았고. 향기로운 차에 어울리는 삼삼한 다식들도 좋았고. 다식에 담긴 이야기를 친절한 설명과 함께 들을 수 있는 것도 좋았고, 고소한 죽도 맛있었으며, 편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옥을 거닐던 시간들도 좋았다. 벚꽃 하나 없는 공간이지만 새싹이 돋은 나무들을 보니 이 곳의 여름이 궁금하고 눈 내리는 겨울이 궁금했다.

  지나간 과거의 나를 부정하고 싶어 벚꽃을 찾았지만. 그 시절의 나도. 지금의 나도. 이 순간의 행복과 성취감에 만족해 벚꽃, 그리고 소중한 순간들을 붙잡지 않고 지나쳤다. 하지만 행복했다.


그러면 된 거 아닐까


  아직 봄이 남아 있다. 만일 봄이 이대로 끝난다 해도 어렵게 온 이 공간이 좋았다. 벚꽃 놀이의 추억도 소중하겠지만 이 곳에서 쌓은 기억 역시 행복했고, 적어도 오늘 벚꽃 놀이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오늘의 공간을 찾지도 못하고 맛있는 다과상도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객전도된 행복일 수도 있지만, 벚꽃 덕에 좋은 경험 했으니 충분한 벚꽃 놀이를 한 게 아닐까.
  2021년 3월의 한 시절. 그 날의 나는 크게 만족하며 벚꽃 없는 벚꽃 다과회를 마무리 지었다.




그 날의 공간 
한국의 집

한국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공간

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예약은 필수

다과상 외에 한정식 예약도 가능

코로나로 인해 1시간 이용 제한 있음



매화차

무난하게 향기로운 꽃차. 맛보다는 향기로 마시는 차에 가깝다.

차는 주전자로 내어주시며, 마감 시간까지 리필해주신다


다식
고호재 2021 봄 시즌 다과상 & 죽

쑤구리단자, 금귤 청과, 호두강정, 설기, 꽃 약과, 단호박 증편

씨앗 오자죽

1인당 한 상씩 나오기 때문에 깔끔하게 즐길 수 있다

다과상을 내어주실 때 간단한 설명을 곁들여주신다.


이런저런 주관적인 생각

  생각보다 큰 한옥 공간이기 때문에, 조금 위압감이 느껴진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볍게 갔다가 주춤하게 되는 곳.(하지만 몇 번 가고 나면 별생각 없이 돌아다닐 것 같다) 선착순으로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있지만 공간 자체가 이뻐서 어딜 앉건 좋지 않을까 싶었다.

  다식은 한국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맛이 삼삼하고, 정갈하다. 차와 잘 어울리는 다식이지만 "맛있다!"는 느낌 자체는 덜할 수 있다. 죽 역시 고소하지만 담백한 편인데, 소금을 요청하면 가져다주신다.(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필자는 몇 번 먹다 웃으며 소금을 요청했다. 고소한 씨앗 죽에 약간의 짠맛을 가미하니 참 맛있더라.)

  친구와 가도 좋고, 가족과 함께 가도 좋을 것 같은 곳. 시즌마다 다과상이 달라진다고 하니, 시즌마다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다.



[한국의 집] 인증샷. 사진은 언제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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