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우연에 자신을 맡기지
말아야 한다。”
---명상록(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한국엔 국립국악원이 네 곳 있다。서울과 부산、그리고 나머지 두 곳은 호남에 있다。전남 진도와 전북 남원이다。순창에서 가까워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의 공연을 종종 보러 가곤 하는데 최고의 국악 공연을 무료로 볼 수 있다。그 곳에서 우연히 종희의 대학 동창을 만났다。남원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한다는 그녀에게 종희의 소식을 물었다。홍콩에 사는 교포와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아 두 아이 엄마가 된 종희、1분만에 10여 년의 시간을 들었다。
“1년에 한 번 이상은 꼭 한국에 와요。오면 알려드릴게요。만날 때마다 종희는 선배 얘기를 해요。”
이 말을 듣는데 반갑기보단 두려웠다。만난다 한들 흐지부지 우유부단만 했던 그 때의 나와 다를 바 없이 “미안해。” 라고 한 마디로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 뒤에?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적어도 과거의 남자인 나는 그 과거에 묶여 산다。그 동창을 만나 종희의 그간 소식을 들은 것은 예상도 못한 일이니 분명 우연임에 틀림없다。문득 명상록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우연에 자신을 맡기지 말라'
자신이 맡길 수 있는 우연은 없다。언제나 뜻밖에 불쑥 우연은 찾아온다。의지와 상관없는 우연에 대응하고 대체할 수 있는 게 있을까。그런데 일회성의 우연은 착각을 꼭 동반한다。왜? 특별한 이유를 붙인다。그래서 아우렐리우스가 맡기지 말라는 우연은 '우연을 착각하지 말라'로 들린다。내 얘기를 아직도 한다고? 내가 여태 잊지 못하고 있듯이? 기대를 부풀리지만 결국 그 우연으로 웃고 만다。스쳐오듯 스쳐지나가니 우연이다。우연은 우연일 뿐이다。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잘 살고 있는데。。。 연락 안 해 줘도 괜찮아요。”
피동적으로만 살아온 과거 그대로이다。비참한 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을 뿐더러、지금 와서 이제 무엇을 더? 양복과 양장으로 곱게 잘 차려입고 찍은 종희의 아이들 사진을 보여 주며 그 동창이 하는 말、
“남편이 엄청 부자래요。서울에 2층짜리 건물이 있다고도 하고。”
나와 결혼했다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레코드판을 뒤져 타이스의 명상곡을 듣는다。종희가 내게 선물했던 LP판이다。선물하며 한 말、
“이 곡은 나를 먼 미래로 이끌어。”
먼 미래? 환갑 지나 나와 함께 세계 여행을 다니고 있을。。。
“글을 잘 쓰는 형은 40년이 지난 그 때도 글을 쓰고 있을 테니 난 맛난 커피를 내려 글 쓰고 있는 형에게。。。 이렇게 함께 다닌 세계 곳곳을 기행문으로 꼭 남기고 싶어。난 그림을 그릴 거고。”
종희는 나를 꼭 형이라고 불렀다。10년 쯤 지난 지금 나는 글은 안 쓰고 그림만 끄적이고 있는데。。。
“타이스의 명상곡이네요。”
처음 만들어 봤다며 쑥버무리떡을 가지고 <브람스>에 들른 유나가 묻는다。
“타이스가 작곡가일까요 아닐까요?”
그 사이 유나도 무척 밝아졌다。말투에서 느낄 수가 있다。가족을 위해 피해왔다던 그녀는 쇠약한 몸 때문에 늘 울적했었다。밝은 표정이나 그런 말투는 전염이 빠르다。나도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모름? 아님 설마?”
떡을 한 입 물며 쑥향을 음미하면서 이번엔 끄덕인다。
“뭐 해요? 날 놀리는 거예요?”
“유나 님은 우연이란 것을 어떻게 생각해요?”
입을 앙다물더니 한참을 생각한다。
“생각지도 않게 마주치는 게 우연인데 그걸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생각을 완전 배제시켰으니 우연인 거잖아요。”
라더니 이내 박수를 치며 소리내 웃는다。
“여기 온 거요。맞아、 우연이었지。우연이 나를 이곳에 오게 했네요。오는 것! 우연하게 오는 것! 내가 어쩌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내게로 다가오는 것。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우연인데。。。근데 왜요?”
왜? 난 우연을 물으면서 나에게 최고의 우연은 아들과 만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사랑 없이 어느 여자를 만나 그 여자와의 사이에 생긴 아들、그리고 그 여자는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이런 일련의 긴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딱 하루로 귀결되는데、'모든 그 사건들은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렇듯이 종희도 두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 나와 인연이 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꿰뚫어본 듯 유나가 말없이 웃고만 있는 내게 툭 한 마디를 내놓는다。
“우연이 인연이 되고 때론 기적도 될 수 있겠지요。”
하며 다시 들어보자며 타이스의 명상곡의 처음으로 바늘을 옮겨 놓는다。곡이 다 끝나도록 우린 아무 말이 없었다。좀 전에 유나가 내게 물었던、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무희 타이스>라는 오페라의 간주곡으로 연주된 이 명상곡은 프랑스의 작곡가 마쓰네가 지었다。그는 당시 꽤 유명했지만 더 유명한 바그너에 의해 묻혀진 이름。그가 작곡한 명상곡마저 마스네의 명상곡이 아닌 타이스의 명상곡으로 더 알려져 타이스를 작곡가 이름으로 아는 이들이 많다。한 쪽으로 치우치는 유행이나 열광은 또 다른 말살이 되기도 한다。이런 일화가 역사엔 숱하게 넘쳐난다。마스네의 수많은 작품 중에도 후세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명상곡을 들으며 깊은 산속마을 이 곳이 명상하기 좋은 마을이란 생각도 든다。또 청량한 목소리로 유나가 말한다。
“그러고 보면 이 동네야말로 우연집합체네요。나는 쇼팽、영임 부부는 소녀의 기도、민주의 베토벤、음악선생님의 엘가나 차이코프스키 등등。근데 저기요 님은 어떻게 브람스로 이곳에 우연히 발을 들였나요? 그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어요。마당발 우리 양순 씨도 모르던데요。”
우린 마스네의 명상곡을 다시 듣는다。
'수많은 작곡가 중 왜 하필 브람스였을까?'
내가 내게 묻는다。
'왜 짝사랑이어야 했지?'
또 내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