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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ae Nov 04. 2018

제주의 아이

chapter jeju island

시작하기 전, travel journal B의 인트로 읽기

<travel journal B>

오랫동안 써왔던 손노트의 정리입니다.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8시 반 전에는 꼭 들어오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이 꽃반지 만들면서 놀자고 말하지 않는 것.

어떤 그림은 다시 그리거나, 고쳤지만 이 그림만은 온전히 그대로 함께하고 싶었다.



가감 없이 마음을 받는 일은 행복하다.

오랜만에 많이 웃고 기꺼이 먹고 자연스럽게 행복했다.


벅적한 게스트하우스를 유독 낯설어했지만, 이곳은 제가 스텝으로 일하고 있었고 이상하게 제와 주인 가족 외에는 딱히 부딪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둘째 날 밤에 다 같이 앉아서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웃었던 것도, 나는 가지 않을 자리였지만 옆집에 새로 가게를 연 사람들이 도와준 작은 입간판 이야기나 그 뒤풀이를 계획하는 것도 이유 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주인 가족 꼬마 아이한테 흠뻑 애정 공세를 받고 왔다.


어쩜 그렇게 그냥 그 모습으로 좋아해 주는지.

아주 잠시지만 지금의 나를 좋아하게 됐다.


다 기억에 오래 남을 거다.

같이 오일장을 나설 때, 차 뒷좌석에서 이리로 타라고 기꺼이 팔을 잡아당기며 좋다고 해주는 들뜬 목소리.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보고 먼저 대답했던 것. 니모의 모험 이야기와 치과 진료실에서 튀어나오던 니모와 기꺼이 모험을 떠났지만 자꾸 길을 잃는 그 친구!라는 내 말에 '도리 말이지'라고 눕썹을 쓱쓱 올리며 기꺼이 답해줬던 모습.

하지만, 아마 제일 오래 기억에 남을 건 그 너머에 있는 쓸쓸함이겠지.   


처음 만난 날, 아침 일정을 떠나는 내 뒤를 따라 꼬마는 버스정류장까지 나왔었다.

와다다 뛰지도 깨끔 발로 깡충깡충도 아닌 그저 맴돌던 아이. 특유의 팔자걸음으로 나서는 듯 마는 듯 따라나섰었다. 그러다 갑자기 길가 여기저기 핀 유채꽃을 쭉 뜯어다가 자 하고 나랑 제한테 한 송이씩 쥐여주고는

"반지 만들어서 껴" 하더니

곧장

내꺼는 여기있어 하고

한송이를 뚝 뜯어 들고는 억지로 엄마를 쫓아 터덜터덜 들어가는 모습 하고는.


그 날밤 들었는데 꼬마는 서운할 때는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걷는다고 했다. 이미 꼬마는 잠들고 난 뒤였다. 보통 8시 반에 씻고 9시 반에 잠든다고. 그 날은 억지로 버티다 9시가 되자 어김없이 꾸벅꾸벅 졸다가 업혀 들어갔단다.


그 날 나가는 나한테 물었었다.

아홉 시 지나고 와? 아무렇지 않게 응 하니 곧 아쉬워하는 얼굴을 하고 그냥 들어갔다.

8시 반 전에는 꼭 들어오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이 꽃반지 만들면서 놀자고 말하지 않는 것.


오늘 아침 숙소에서 모습도 오래오래 남겠지.

전날 같이 찍은 사진을 깔깔거리면서 보다가 이모 귀엽다고 이야기하더니, 무심하고 밝게 남자 친구 없지 하고 확신에 차서 신나게 웃으며 소리치던 거 하며.

녀석에 더하기 빼기, 앞과 뒤가 없는 지금 그대로 가장 따뜻하고 선하게 해주는 ‘이뻐'와 '그냥 좋아'라는 목소리에 나는 오랜만에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사진 찍을 때는 내가 너무 커서 진심으로 놀래 놓고는.

같이 아침을 먹고, 맥북을 막 켠 내 옆에 가만히 앉았다가 같이 사진 찍었었다. 아기들은 왜 아주 작은 것에도 그렇게 쉽게 까르르하는지. 한 참 나랑 꼬마, 제랑 주인 가족들 모두 앉아서 깔깔거리다가 갑자기 일어나 봐 했다.

의아해하며 일어나니, 어 나보다 커 하고 진심으로 놀랬다.

그러고는 또 오늘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전날 같이 찍은 사진을 깔깔거리며 보다가 귀엽다고 이야기하다니.


다행히 숙소를 떠나는 오늘 본 마지막 뒷모습은 팔자걸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한 껏 들떠서 내 손을 꼭 잡고 오일장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그게 풀썩 꺾여서 뒤돌아 서는 걸 보는 게 참 어려웠다.


제의 얘기로는 마당에서 놀다 울다 잠들었단다.

울다 일어나서는 오늘 떠나는 스텝 이모에게 사랑해라고 마구 고함쳐 보내줬단다.

고약한 게스트하우스 아들의 운명이라니.

사람을 보내고 돌아와서 다시 또 이별하는 게 어딨냐.

아이는 그냥 보내줘야 하는 순간을 아는 사람으로 크고 있다.

마음이 아프면서 마음이 한 껏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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