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열심히 공부를 했고, 성준이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좋았다. 뭘 해도 금방 배우지만 끈기는 없었다. 함께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부터 우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성준이는 집안 누구도 닮지 않았다. 좀 더 남성스러운 이목구비에 어깨는 나보다 배는 넓어진 듯했다. 당뇨병으로 먹는 것에 대한 제약이 많았는데. 무얼 먹고 저리 되었는지 궁금하다. 성준이는 거의 모든 간식을 먹을 수 없었지만 우유만은 어머니가 허락하셨다. 물처럼 마셨다. 그리고 어깨가 저리도 커졌다. 나도 마셨어야 했다.
체형도 얼굴도 형제 같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둘이 형제인지 잘 몰랐다. 서로 일부러 알리고 다니지도 않았다. 심지어 둘이 형제인 줄 알고 놀라는 사람도 있었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술집에서 우연히 합석한 여자애들에게 나이가 성준이랑 같길래 혹시 아느냐 물었더니 잘 알고 있단다. 성준이한테 형이 있는 건 아냐고 했더니 알고 있단다. 그 형이 나라니까 거짓말하지 말라더라. 우린 그렇게도 달랐다.
나는 대학을 잘 갔다. 소위 수능 대박이 터졌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다니지만 속으로는 잘 될 줄 알았다. 으스김도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는 것도 좋았지만 집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았다. 동생 때문에 하지 마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듣고 자랐다고 생각했다. 집안 분위기가 어두운 것은 동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춘기의 성준이는 보기 힘들었다. 모든 일에 불만이었고, 건강을 위해 자제하라는 잔소리가 싫었나 보다. 인슐린 주사만 잘 맞으면 당장에 쇼크가 올일이 없었기에 부모님 눈을 피해 먹는 것도 가리지 않기도 했다. 결국은 다 티가 나지만 당장 눈앞에 드러나지 않으니 성준이 눈에는 심각함이 덜했는지 모른다. 그럴 때면 속상해하시는 엄마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때로 내가 나서서 동생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성준아 좀 엄마 말 좀 듣자"
"냅둬.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야 좀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쫌 너.. 너 몸 때문에 그러지 누가 이러고 싶어서 그래? "
"알았다고 그냥 두라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알았다고 그냥 좀 두라고"
그쯤에서 좋게 타이르던 내 인내심은 사라지고 성준이의 콧등에 주먹을 날렸다. 어깨가 넓어지고 덩치가 커졌어도 동생은 동생이다. 주먹은 콧잔등에 꽂히고 빨간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타이른다는 명목으로 그간의 화풀이를 한 건지 모른다. 바보 같은 동생은 형한테 대들지는 못하고 맞고만 있다. 형제의 소란에 어머니는 놀라 달려오시고 벌어진 참극을 보시고는 고개를 돌려 기이픈 한숨을 쉬셨다. 어머니의 한숨에 맞은 동생보다 형이 먼저 글썽인다. 차마 말로는 못하고 속으로 죄송합니다를 외치고는 집을 뛰쳐나가 밤이 늦게야 들어왔다. 그사이 어머님은 동생의 코피를 닦아주시고 얼음찜질을 해주신다. 성준이는 때린 형한테는 한 마디 못하면서 어머니한테 툴툴거린다.
"이제 됐어, 그냥 둬. 내가 할 거니까. 쫌.. 그냥 쫌 냅두라고 나 좀 정말!"
".. 응 그래 알았어.. 이거 좀 코에 대고 있어 붓겠다.. 참 너네 형도.. 에휴"
나는 그런 동생을 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차라리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덜 신경 쓰일 것 같았다.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를 밀어 두고 싶었고, 대학은 가장 훌륭한 도피처였다. 하지 말라는 말은 성준이가 듣고 자랐음에도 내가 그 소리가 싫었다. 몸이 힘든 건 성준이고, 가장 고생하시는 건 어머니다. 난 관찰자였으면서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 코스프레를 했다. 철없는 반발에서였을까? 대학에서는 하고 싶은데로 살았다. 더 이상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모든 것이 대학교의 낭만이라며 음주가무를 즐겼다. 시골에서 올라오는 생활비는 받는 족족 학교 앞 술집에 외상을 갚았고, 생활비가 모자라면 짧은 알바로 생활비를 채웠다. 돈은 항상 모자랐다. 학교 앞에서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99년도는 그랬다. IMF가 터져 나라가 위기이면서 대학교 앞에서는 가판에서 신용카드를 발급해 주는 그런 시대였다. 그리고는 모자란 유흥비는 카드를 긁었다. 3학기를 마치고 군대를 갔다. 갚지 못한 카드값을 모른 척, 오라는 군대에 얼씨구나 입대를 했다. 군대에서 첫겨울을 보내니 성준이가 대학생이 되었다. 분명 문과였는데 이과 계열의 서울 대학에 합격했단다. 사연은 경쟁률 추이를 보고 미달될 것 같아서 그냥 교차지원을 했다고. 그렇게 성준이는 인서울 대학에 합격했다. 성준이의 약싹 빠른에 혀를 내둘렀다. 스스로 미달이 될 것 같은 과를 찾아서 넣고 합격하는 실행력이 무서웠다. 나는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그간 열심히 공부한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성준이와 따로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또다시 겨울이 찾아올 때쯤 부모님이 면회를 오셨다. 내가 입대한 지 15개월 차였다.
"그동안 뭘 하고 살았니?"
"예? 저야 뭐 여기서 나라 좀 지키고 근무 좀 서고 그랬죠"
"아니 그거 말고. 어이구 녀석아 다 갚아놨다. 그냥 네가 뭘 하고 다녔는지 궁금해져서"
"아?! 예...."
잊고 있었다. 군입대 당시 갚지 않은 카드값 150만 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본가로 채무에 관한 독촉장이 날아왔나 보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부모님께 마냥 착한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남인지라 어디 가서 부모님 얼굴에 먹칠하거나, 걱정시켜 드릴 만한 일은 끌고 오지 않았었는데 사고를 크게 쳤다. 돼지저금통이 떠올랐다. 다른 장병들은 하하 호호 그간의 회포를 풀고 있다. 나는 부끄러움에 부모님이 싸 오신 음식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부모님은 괜찮다고 하셨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하염없이 고개만 끄떡이고 싸 오신 치킨을 입에 욱여넣었다.
병장을 달자마자 2002 월드컵이 한창이었다. 군대 밖의 세상은 온통 축제였다. 내 평생에 이런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티브이에 보이는 저 응원 인파 속 어딘가에 내가 아는 녀석들도 있겠지. 무언가 억울했다. 그런 날은 괜히 후임들 청소를 꼬투리 잡았다. 군대의 두 번째 겨울을 지나고 세 번째 겨울이 올 때쯤에 나는 전역했다. 휴가를 나와서도 성준이를 제대로 본 적 없으니 근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반가워해야 할지 보고 싶었다 말해야 할지 몰랐다. 서로 얼굴을 보고 눈이 마주쳤다.
"어~ 왔어? 형"
"응 나왔지. 잘 살았냐?"
"올~ 예비역~ 좋겠어?"
"면제 주제에.. "
함께 살 자취방은 방 하나 거실 겸 주방이 딸려 있는 형태였다. 혼자 살기에 충분한데 둘이 함께 살 수 있을까 싶었다. 갓제대한 터라 어디도 군대보다 나았고, 별 투정 부릴 사항도 아니었다. 그냥 견디기로 했다. 어차피 대학에서 시간을 보내고 여기는 잠만 자는 곳이 되겠지 싶었다.
성준이는 게을렀다. 청소나 빨래 정리 같은 것은 할 줄 몰랐다. 세탁하려 벗어놓은 티셔츠를 세탁기에서 그대로 꺼내어 다시 입고 나갔고, 집에 들어와 옷을 벗는 그 자리가 옷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음식은 식단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인스턴트식품을 달고 살았다. 밤늦게 들어오는 날은 영락없이 술에 취해 있었다. 때로는 외박을 하긴 했고 그 외박 중에는 응급실도 몇 번 포함되었다. 성준이는 내게 알리기 싫어서였을까? 성준이의 응급실에서 보호자는 친구들이 되었다. 단 한 번도 내게 보호자냐 묻는 연락이 온 적 없었다.
나는 도체체 성준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나보다 체격도 커지고, 능글맞음도 늘어 무슨 이야기를 해도 한 귀로 흘리며 때로는 넉살 좋게, 때로는 무시하고 흘려듣기도 했다. 이런 생활에 나는 곧 익숙해졌다. 특별히 성준이가 눈앞에서 쓰러지지 않으면 나는 성준이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대면대면한 형제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사이가 좋아졌다. 내가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 싸울 일이 없었다. 성준이도 당뇨병에 대한 잔소리만 아니면 다른 잔소리는 곧 잘 들었다.
"저기 먹은 것 좀 치우시지요~"
먹은 컵라면은 쫌 치우라는 내 성화에 성준이는 씨익 웃고는 주섬주섬 갖다 쓰레기통에 버렸고, 빨래는 돌릴 테니 널어놓으라는 잔소리에 건조대 위에 옷을 펴지도 않고 잔뜩 올려놓는 식으로 흉내는 내었다. 밤 중에 심부름을 시켜도 투덜거리면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형 나 배고파 뭐 좀 사다 줘. 그리고 세탁소에 맡겨 놓은 것도 있는데..ㅎㅎ "
성준이의 전화에 나도 두 손 무겁게 사다 나르곤 했다. 나도 성준이의 부탁은 곧잘 들어주었다. 때로는 성준이의 친구들이 떼로 몰려와 시끌벅적 술판을 벌여도 뭐라 하지 않았다. 말리고도 싶었지만 어쩌면 저 모습이 성준이가 선택한 살아가는 길이었는지 모른다. 서로 나이가 들어서일까. 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줄 았았다.
우리는 그렇게 7년을 함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