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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Jun 20. 2024

육아는 사표를 쓸 수도 없고...

쓰디쓴 에스프레소가 물과 얼음을 만나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된다. 제법 마실만 하고 어느 순간엔 절실하기 까지 해진다. 마냥 쓸 것만 같은 육아도 경험이 쌓이고 노하우가 생기니 이제는 제법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만 같다. 이러다가는 아이가 넷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미안해 여보야. 내가 낳는것도 아니면서...


하지만 때로 과도한 커피는 위장장애를 일으키고 밤에 숙면을 방해하기도 한다. 익숙해 졌다고 느꼈을 때 새로운 위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어느 순간 매몰되어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허우적 거릴 때가 생긴다. 아이들의 웃음과 동화속 같은 장면들로 얻는 행복도 있지만, 때로는 라떼파파로 살아가면서 내려 놓아야 할 것들이 생긴다. 남들은 쉽지만 나에게는 어려운 것들이 생겨난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모든 일에는 댓가가 존재한다는 진리에 따르면 불평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당연히 개인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문제들. 자 이제 두서없는 라떼파파의 불평이 쏟아내어 보려한다. 



나도 친구란게 있거든요?


이제는 친구들을 만날 수가 없다. 보통의 남성이란 아침에 일터로 나가 저녁에 퇴근을 하며, 회사의 동료나 친구 거래처의 사람들과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법. 그에 반해 라떼파파는 그럴 시간이 없다. 일단 모든 육아는 반복이며, 종료의 시간은 없다. 아이가 잠에 들어도, 그 이후의 다른 삶을 살아가기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퇴근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자니, 눈치가 보인다. 하루 종일 고생한 사람에게 육아마저 떠 맡기는 느낌이라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다. 이상하게도 집에서 아이들을 본다고 하면 밖에서 일하는 사람에 비해 덜 힘들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나 역시 나가서 일 할래? 아이들 볼래? 하면 나가서 일을 하는게 차라리 쉽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육아하는 것을 티내는 게 어렵다.


내가 그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내 스스로 인정을 못하는가 보다. 스스로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 자신있게 말을 해야 상대방도 인정할 텐데 이상하게도 육아를 그냥 다들 하는 일들처럼 보인다. 생색을 내자니 다들 아이들 잘만 키우는데 뭐 그리 요란이냐고 타박을 받을 것만 같다. 


아직 집안일과 육아를 스스로 대단한 일이라 말을 하지 못하니 어디가서 나 힘들어요란 소리가 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 나 당당하게 나가서 놀다 올거야란 말도 못한다. 강아지라 제 꼬리를 쫓듯 뱅글뱅글 돌아가는 형상처럼 보인다. 


주말을 활용해 보면 어떨까도 싶었다. 아내가 집에서 쉬는 주말은 나의 친구들이 작가의 집에서 육아를 하는 시간이 된다. 이제는 그들과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나에게도 친구란게 있었는데... 네... 있었는데요.. 없어졌어요 



저 멀쩡한 사람이에요 

이건 아빠라서 그럴 것 같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그들만의 커피 모임이건 동네 마실이건 좀 더 쉽게 만남을 가지곤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빠가 끼는것이 마냥 편하지만은 못하다. 어린이집의 행사가 되어 학부모들이 모인자리에서도 아빠의 참석을 거의 없는데 참석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주목을 받게 된다. 그 주목이 마냥 따스하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다. 


'저 아빠는 뭘 하기에 매번 이시간도 참석이 가능할까?' 

'저 아빠가 집에서 애 보고, 와이프가 돈 벌어온데...'

'사지 멀쩡해 보이는데 왜?'


등등의 호기심이나, 묘한 수근거림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일이 반복 되다 보면 꼭 가야할 모임이 아니라면 피하고 싶은게 사람마음이다. 점점 아이와 둘 만의 시간만이 남는다. 10년의 육아는 나에게 사회생활의 능력을 감퇴시켰다. 


직장 다닐때야 좋아서만 만나는게 아니니 좋던 싫던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고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지만 지금은 내가 싫으면 안만나도 크게 아쉬울게 없으니 적극적일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다가오는 인연은 굳이 피하지 않지만 내가 쫓아가는 일은 크게 줄었다. 천성이 외로움도 즐기는 편이니 이게 나에게는 맞는 생활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아이가 좀 크면 진지하게 산으로 올라가 자연인을 좀 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한다. 아내는 들을 때마다 아주 질색팔색을 하지만 산 속에서 아무도 신경쓸 필요없는 삶이 자꾸 근사하게 보여 큰일이다. 가끔 가는 캠핑 때 보면 나도 벌레가 싫은 거 보니 자연인의 삶 보다 외딴 곳에 집을 지는 것으로 방향을 바꿔야 하나 보다. 



라떼파파 오래되면 늪이다. 


라떼파파 뿐만 아니라 경단녀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육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회로 복귀하기에 더 여렵다. 물론 간단한 아르바이트 같은 일을 구하는 것에 대해 큰 제약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육아 전에 내가 가진 커리어를 잇거나 다시 복귀할 수 있는 확율은 시간이 흐를 수록 반비례 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막상 일을 찾다보면 "내가?? 이런 일을 해야해??" 라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아직 굶어 죽지 않을 정도라 절박하지 않으니 버팅기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나도 근사한 일을 하고 싶은 거다. 10년간의 육아로 인해 나의 경력은 끝이 났다. 내가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 이전의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경험의 양분은 되어줄 지언정 다시 옛것을을 복구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되어주진 못한다. 만약 누군가 라떼파파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면 제일 첫 번째 조언을 무엇으로 할지 정했다.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조언은 [데드라인을 정하고 시작하라] 이거다. 육아는 끝이 없지만 라떼파파는 끝을 정하고 시작해야한다. 우리는 육아만 할것이 아니라 가정도 꾸려나가야 한다. 



자존감을 지켜라


아내가 일을 하고 남편이 집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일단 남성은 자존감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내 또래의 사내들은 그렇게 보고 배우며 자라왔다. 멋진 슈트에 날카로운 눈빛의 비즈니스맨, 몇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님, 스타트업을 하며 꿈을 키우는 프로그래머등 암튼 사회에서 일하는 모습을 꿈꾸며 살아왔다. 남성들의 꿈에 현모양처는 없었다. 좀 가부장적인 집안에서는 남자가 부엌만 들어가도 큰일 나는 줄 안다. 세월이 흘러 적지 않은 수의 아빠들이 육아에 참여해도 이런 문화적 경험들을 무시할 수 는 없다. 


남.자.는.바.깥.일.을.해.야.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어머님은 아직도 못마땅해 하신다. 가정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어머니이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그 아들이 집에 있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신다. 가정을 책임지는 며느리에게 이제는 오히려 눈치를 보시며 아들의 옆구리를 꼬집으신다. 언제 사내구실 제대로 할 거냐고. 나는 


"엄마 내가 애들이 셋이야~ 얼마나 더 낳아야 사내구실 제대로 하는 줄 알까?" 이라 능글맞게 넘긴다.


물론 이런 대답후엔 다 늙은 아들에게 꿀밤을 먹이실량 쫓아오시지만 어쩐지 아들은 아직 잡힐 생각이 없다. 

도망가는 발걸음은 빠르지만 무겁다. 어머니의 걱정의 무게를 알기에. 누군가의 걱정과 불만은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낮아지게 만든다. 늪에 발을 담그기전에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방패를 찾아야 한다. 



육아는 언제나 골키퍼


축구를 보면 상대방의 날카로운 공격을 수차례 막은 수비수가 단 한번 실수를 해서 경기를 지게 되면 그 선수는 욕 좀 먹는다. 그 선수가 세골 네골을 막았더라도 단 한 번의 골을 잃어버리면 그 선수의 평가는 사정없다. 육아는 그런 셈이다. 왜 [애 키운 공은 없다]는 말이 괜히 있었을까. 옛 사람들 말은 정말 잘 표현해 주셨다. 하루종일 아이와 잘 놀고, 잘 먹이고, 씻기고 했어도 잠시 비운 사이에 넘어져 이마에 상처라도 생기면 그날의 아빠는 애를 안 본거다. 예방접종도 챙기고, 손발톱도 이빨도 깨끗하게 닦였어도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옮아온 감기에 아빠는 아이의 면역력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렇게 적나라하게 비난하지 않지만, 아이가 아프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의 아이를 바라보는 걱정스런 눈빛과, 


[조금만 더 신경 좀 써주지...뭐...하느라...]라는 듯 아빠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쩔 수가 없다. 육아는 축구의 수비같은 존재다. 한번의 실수가 무섭다. 게다가 어찌 되었던 아프거나 다친 아이를 바라보는 아빠가 [나는 잘 했는데 얘가 이랬어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육아는 잘해야 본전이다. 




세상에 똑같은 아이는 없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부모는 없다. 누군가는 처음이고, 누군가는 그래도 익숙하다. 하지만 매번 반복해도 매번 새로울 수 밖에 없는 것도 육아이다. 나의 에피소드는 누군가에겐 친근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겐 신선한 일일 수 있다. 나도 세 아이를 키우며 매번 다른 감정과 방식을 배운다. 똑같은 반응에 아이들은 똑같이 기뻐하지 않는다. 나의 육아는 아직 진행 중이다. 아직은 한참을 더 키워야 한다. 아이가 성장하는 가운데 나도 함께 자라길 바란다. 솔직히 벌써 인생이 끝난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많다. 글을 쓰고 뱉어내면서 그 부정적인 감정을 희석하려 노력중이다. 아빠의 육아를 추천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각 가정은 선택일 뿐이다. 한 때 그 선택에 매몰되기도 했고, 극복하기도 했다. 우리는 순위를 매기는 경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과 같지 않음에 초조할 필요가 없다. 천천히 나의 속도로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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