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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Jun 20. 2024

글을 썼더니 우리가족이 TV에 나왔다.

프롤로그

나는 아이를 보는 아빠다. 


그것도 중학생, 초등학생, 유치원 연령도 다양한 세 아이의 아빠다. 처음부터 아이를 보는 아빠가 된 것은 아니다. 이직과 사업을 하다 막내가 태어나면서 부터 본격적으로 육아에 뛰어들었다. 본가와 처가 모두 멀리 떨어져 있어 조부모찬스를 쓸 수 없는 우리 부부는 우리 손으로 아이를 키워야 했고, 고심끝에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그리하려 하지는 않았다. 잠시만..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닐 무렵까지만 돌보기로 했던 육아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게 되었다.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인서울의 4년제 대학을 나오고 그럴듯한 직장이 있던 사내가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소위 어딘가 잘못된 선택처럼 보이기 쉬웠다. 사내는 바깥일을 해야 한다는 인식은 지금도 유효하고 당시에는 더 심했다. 여전히 나의 부모는 아이를 돌보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신다. 나 역시 그 시선들은 감당하는데 오래 걸리기도 했다. 이제껏 부모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는 자부심에 적잖은 상처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아이를 데려다 주는 어린이집이 싫었다. 아니 어린이집을 매일 같이 출근하는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주위의 엄마들이 수근거리는 것만 같았고, 선생님들의 시선을 불편하게만 생각했었다. 


건너 건너 들었다. 자상한 아빠라는 소리를. 어린이집 선생님이 주변 사람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때면 자상하고 멋진 아빠라고 이야기 하신다는걸.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저 듣기 좋게 말하시려 하는 것이라 치부하고는 잊으려 애썼다. 아무리 자상한 아빠라도 남자는 사회 생활을 할때 그 가치가 있다고 단정지어 버렸다. 잊을만 하면 한번씩 전해주시는 이야기를 몇 년이 흘러서야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이는 또래들과 잘 지냈고, 내가 보아도 올곧게 자라고 있었다. 주변의 아이들에게 곧잘 양보하면서도, 항상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를 보고서야 나는 자상한 아빠라는 타이틀을 받아들였다. 


스스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나서부터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지금껏 아이를 키우면서 보낸 나의 시간이 마냥 헛된 것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었고, 내가 하는 일이 조금은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쓰는 글이 대단한 깨우침을 지닌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한 사내가 아빠로서 성장하면서 깨우치게 된 경험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조금은 성장하게된 한 사내의 이야기를 적어내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불안함도 있고, 안도감도 있고, 아쉬운점도 많다. 우리는 보통 어려운 일을 겪으며 조금씩 성장한다. 장애를 극복할 때 조금씩 배우며 나아가곤 한다. 그런 나의 이야기가 조금 궁금했는지 모르겠다. 


올해 초 다큐멘터리 작가분께 연락이 왔다. 아이를 키우는 부부들의 이야기를 담는 다큐를 준비중이라며,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아이들과 아내의 스케줄을 조절하느라 힘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3일에 걸쳐 촬영을 했다. 막내 아이의 생일 파티를 기점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촬영하고,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해 두 시간 가까이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사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다. 


화면 속 우리 가족은 실제 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방긋 미소짓는 아이들이 예뻤고,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방송에 나왔다. 편집의 힘을 참 대단하다. 방송을 보니 문득 댓글도 궁금해 시간 날때 마다 유투브를 들여다 보곤 했다. 응원의 댓글만 있는 건 아니다. 요즘처럼 결혼과 출산이 대단한 결심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습마저 예쁘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응원의 댓글 사이 사이에는 잡초처럼 태어난 아이들을 조롱하고, 세상을 시기하며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댓글들이 있었다. 속이 상하기도 하고,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들의 세상은 저리도 지옥같은지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도 공영방송이어서 심심찮게 잘 봤다는 연락을 받곤 한다. 졸지에 아이 보는 아빠로 커밍아웃 한 기분도 든다. 커밍아웃의 장점은 더이상 들킬까 전즌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어찌되었건 나의 정체성은 드러났고, 내 걱정과는 다르게 세상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보통 그렇다. 대부분의 일은 우리의 걱정보다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때로는 이미 충분히 고민했기에 들키고 나 뒤 오히려 후련해지기까지 한다. 


나는 아이를 보는 아빠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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